▲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현대 유니콘스의 ‘망가진 헤라클레스’ 심정수(28). 그는 25일 한국시리즈 우승 축하연에서 샴페인으로 목을 축인 후 기존의 묵직함과 침착함을 조금씩 벗어던지고 진솔하고 삶의 깊이가 배어나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는 경기장에서의 우승 축하 세리머니를 정신없이 치른 바람에 아직까지 뭐가 뭔지 분간이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평소 몸 관리를 위해 잘 마시지 않는 술을 샴페인이라는 안도감에 음료수처럼 들이키는 장면에선 우승이 주는 기쁨이 어느 정도의 무게로 자리하는지 약간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해보다도 굴곡 많은 사연을 낳은 시즌의 마지막 자락에서 우승이라는 값진 열매를 안고 2003년을 마무리하는 심정수와의 별난 ‘취중토크’를 소개한다.
이번 ‘취중토크’가 별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연이은 축하 파티를 쫓아다니며 힘들고 어렵고, 또 바쁘게 인터뷰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마감 일정만 아니라면 따로 인터뷰 날짜를 잡아서 맥주를 마시든, 소주를 마시든, 여유 있는 술자리를 통해 ‘힘 좋은 남자’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파악(?)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해 축하연에서의 만남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시리즈 7차전이 정민태의 완벽한 피칭에 의해 일찌감치 현대의 승리로 끝나버려 막상 경기가 끝났을 때에는 약간 김이 샌 듯한 느낌이었지만 심정수는 그래도 우승은 기분 좋고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6차전까지 부진했잖아요. 정말 죽을 맛이었죠. 위기 때 ‘한방’을 터트려줘야 팀 타선이 살아나게 마련인데 방망이가 돌아가지 않으니 동료들 볼 면목이 없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 저나 동료들이나 꼭 그랬어요. 그래서 고마워요.”
심정수는 한국시리즈 6차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기자들한테 메이저리그 진출 포기 선언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6차전 최고의 뉴스메이커가 됐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에 발표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굳이 선수들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6차전을 택해 개인 스케줄에 대한 계획을 발표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차전까지 성적이 안 좋다보니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시리즈 동안 심사숙고했던 부분을 7차전을 앞두고 발표하게 됐죠. 7차전에 집중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고, 메이저리그 진출과 관련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정말 부담됐고, 뭐 그런 이유로 말을 꺼낸 것 같아요.”
“아무래도 포스팅이 걸렸어요. 그리고 1년만 더 기다리면 FA가 돼서 홀가분하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갈 수 있다는 ‘유혹’도 작용했지요. 포스팅을 할 경우 연봉과 구단에서 요구하는 계약금 등이 복잡하게 얽히게 될 것 같더라고요. 특히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고요. 돌아가는 여러 가지 상황이 나한테 유리하지 않겠더라고요.”
94년 OB(현 두산)시절 플로리다 교육리그에 참가하면서 막연하게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품었던 것이 9년이 지나 현실로 승화됐을 때 심정수는 남몰래 묘한 흥분과 떨림 속에서 2003년 시즌을 보냈다고 말한다. 그 이후 메이저리그에 대한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겨울만 되면 영어학원을 다니며 말문 트기에 나섰고 용병들과 친밀감을 유지하는 등 꾸준히 공부한 덕분에 지금은 외국인과의 웬만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올 시즌 내내 심정수와 ‘지겹도록’ 붙어다닌 이승엽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 톤이 약간 올라가는 듯했다.
“정말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홈런왕’ 경쟁 때문이었죠. 기분 나쁜 건 기자들의 평가였어요. 승엽이를 1인자로, 절 2인자로 표현했으니까요. 물론 승엽이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은 대단한 업적이죠. 그래도 승엽이가 아닌 내가 시즌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어 홀가분할 따름입니다.”
심정수는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이후에도 경기장에서 수많은 기자들로부터 이승엽과 관련된 질문들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시즌 중에 신물이 나도록 들은 질문이 결국엔 시리즈 마지막까지 심정수를 ‘괴롭혔던’ 셈이었다.
‘취중토크’가 이상하게도 일반 인터뷰식으로 진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샴페인은 기울이고 있었지만 한가하게(?)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나 ‘취중토크’의 단골 질문-술과 관련된 해프닝-을 물어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른 선수들은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채 본격적인 여흥을 즐기기 위해 숙소를 빠져나가는 상황이었고 심정수도 그들과의 동행을 위해 말이 점점 빨라져만 갔다. 사생활에 대해 평소 궁금했던 부분도 많았지만 그런 자리에서 두 번의 결혼과 두 아이에 대한 사랑 등 다소 동떨어지는 질문을 꺼내기도 마뜩지 않았다.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다가 막연히 유니폼에 대한 동경으로 야구부에 입단했다는 과거지사가 하나둘씩 꺼내지면서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의 탄생 동기에 대해 물었다.
“원래는 ‘소년 장사’였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두산에 입단했는데 당시 체격조건이 고졸 신인치고는 꽤 우람했었나봐요. 그래서 기자들이 ‘소년장사’라고 부르다가 달걀을 많이 먹는다는 소리에 ‘달걀 장사’ ‘에그맨’으로 변하는가 했더니 20대 중반 무렵 ‘헤라클레스’로 자리를 잡았죠. 힘이 세냐고요? 하하 전 잘 모르겠어요.”
심정수의 ‘빵빵한’ 체격의 비결은 보디빌딩에 있었다. 99년부터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하루에 30분 이상 웨이트트레이닝을 했고 튀긴 음식은 삼가고 지방질이 적은 고단백 음식물을 섭취한 것은 물론 계란 흰자만을 먹는 달걀 요법 등으로 유니폼이 꽉 끼는 ‘탱탱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음주가무는 물론, 담배도 못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도 모른다는 심정수는 자신을 한마디로 ‘재미없는 남자’로 표현했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집념과 목표를 향한 준비와 실천에 관한 한 심정수를 당할 자가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은 술 좀 마시려고요. 그동안 선수들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오늘 맘 놓고 회포 좀 풀려고 하니까 더 이상 따라오지 마세요.”
심정수는 선수들과 구단 버스를 타고 강남에서 ‘수질’ 좋기로 유명한 나이트클럽으로 이동했다. 춤을 췄는지, 술은 얼마만큼 마셨는지 확인은 안해봤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부킹은 절대 안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