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금융은 김용환 회장이 최근 인사를 통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등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사진은 농협중앙회 건물.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NH농협금융에는 두 명의 ‘시어머니’가 존재한다. 우선 농협금융 지분 100% 가진 농협중앙회는 논란의 여지조차 없는 확실한 주인이다. 특히 전국 240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농협중앙회장은 농협금융 인사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농협금융 회장은 사실상 농협중앙회장의 아랫사람처럼 대접받았고, 늘 중앙회의 눈치를 보는 자리라는 평가를 면치 못했다.
중앙회와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농협금융이 걷는 길이 극명하게 갈린다는 사실은 신동규 임종룡 전 회장이 잘 보여줬다. 지난 2013년 취임 1년 만에 사표를 던져 충격을 줬던 신동규 전 회장은 중앙회에 ‘밉보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각인시켜준 사례다.
중앙회와 잦은 마찰을 빚었던 신 전 회장은 “농협금융 회장은 제갈량이 와도 안 되는 자리”라는 말을 남기고 조직을 떠났다. 당시 그는 자신의 농협 내 서열이 300위에도 들지 못한다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한탄했다. 신 전 회장이 말한 ‘서열’은 조합장 출신인 290여 명의 농협중앙회 대의원들을 지칭한 것으로, 농협금융 회장의 입지가 지역 조합장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반면 중앙회와 찰떡궁합을 보여준 임종룡 전 회장은 취임 1년 만에 금융위원장으로 발탁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임 위원장은 농협금융 회장 시절 농협중앙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KB금융을 따돌리고 옛 우리투자증권 인수에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렇듯 농협중앙회가 확연히 드러나는 존재라면 정부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농협은행이 여전히 국책은행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을 만큼 정부는 농협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때로는 정부가 점찍은 인물이 농협금융 회장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정도다. 김용환 현 회장 역시 행정고시를 거쳐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 한국수출입은행장 등을 역임한 관료 출신으로, 정부의 ‘낙하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농협금융은 중앙회와 정부 사이에서 ‘정치적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규모 자체만 놓고 보면 공룡급이지만 속사정은 마치 고래 사이에 낀 새우 같던 농협금융이 최근 변화를 시도하고 나섰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농협중앙회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경영의 길을 가겠다는 의도를 암시하는 행보가 계속 나오고 있는 것.
우선 김용환 회장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 때 “농협은행장 선임은 법적으로 농협금융에서 하도록 정해져 있으며 농협중앙회장과 상관이 없다”고 말해 금융권을 술렁이게 했다. 농협은행은 농협금융 계열사이니만큼 CEO(최고경영자) 인사권이 지주사 회장에 있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김 회장이 법률 조항까지 들고 나와 고유 권한임을 천명하자 금융권에서는 김 회장이 친정체제 구축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았다. 연말이 되자 김 회장은 실제로 김주하 당시 농협은행장을 퇴진시키고 농협금융 부사장이던 이경섭 현 은행장을 발탁하며 실행에 나섰다.
김 회장이 이처럼 과감한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덕이다. 농협금융의 ‘첫 번째 시어머니’인 농협중앙회는 지난 연말 최원병 전 회장의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서 선거 국면에 돌입, 농협금융을 챙길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농협중앙회의 리더십에 공백이 생기자 김용환 회장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원했던 인물을 농협은행 고위직에 앉히며 마이웨이를 외친 것이다. 이경섭 행장은 김 회장이 후보자였을 당시 농협금융 업무를 보고한, 대표적인 ‘김용환 라인’으로 꼽힌다.
김 회장은 이 행장뿐 아니라 부행장을 비롯한 농협은행 임원들까지 대거 갈아치우는 대규모 물갈이 인사를 단행했다. 회장과 은행장에 이어 농협금융 내 서열 3위인 농협금융지주 부사장에는 자신과 동향인 오병관 농협금융 재무관리담당 상무를 발탁했다.
김 회장의 오른팔로 떠오른 이경섭 농협은행장 또한 취임 일성을 통해 전에 없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 행장은 취임사에서 “농협은행의 겉모습은 일반 은행과 같지만, 경영방식은 아직 중앙회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취임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포부처럼 들리지만 금융권은 이에 대해 적잖은 의미를 부여하는 분위기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이 행장의 취임사는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새겨볼 필요가 있다”면서 “중앙회의 경영방식은 과거의 것이며 이제는 벗어나겠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이라고 해석했다.
때마침 이뤄진 농협중앙회의 ‘정권교체’는 김용환 회장의 독립선언이 순항할지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변수가 될 전망이다. 52년 만의 첫 호남 출이자 8년 만에 바뀐 김병원 신임 농협중앙회장은 기존 조직과 인적 구조를 뒤흔들어 놓을 가능성이 있다. 당장은 중앙회 내부 조직을 꾸리는 데 집중하겠지만 쇄신 과정에서 농협금융에 어떤 불똥이 튈지 예단하기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이달 김학현 사장의 임기가 끝나는 농협손해보험(농협손보)의 신임 CEO 선임 과정은 김 회장의 앞날을 예측해볼 수 있는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김병원 회장의 정식 취임이 3월이니만큼 당장 농협손보 신임 사장 선임은 김용환 회장이 맡겠지만, 신흥세력의 물밑 작업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김용환 회장의 마이웨이가 새로운 농협중앙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순항할지, 과거 일부 사례처럼 또 다시 파열음을 낼지 지켜볼 일이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