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율 전 국세청장이 자신의 저서를 통해 30년 국세청 공직생활 비화를 털어놨다. 왼쪽 사진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정두언 의원의 악수 모습. 일요신문DB
한상율 전 국세청장의 책은 공직생활 초반 한 종교단체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책에 따르면 지난 1988년 국세청 외국인세과 한 전 청장의 팀은 수상쩍은 자금 이동을 확인하게 된다. 500만~1000만 원에 해당하는 달러가 지속적으로 국외에서 들어오는데 수취인 명의는 다르지만 도장의 생김새와 필체가 똑같았다. 한 전 청장 팀은 자금추적을 시작했고 결국 돈이 모이는 ‘저수지’를 찾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확인된 규모만 5000억 원대의 저수지는 한 종교단체의 것이었다.
당시 북방외교를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는 이 대표가 막힌 외교의 물꼬를 터줄 적임자로 생각하고 일을 맡기려 했지만 반응이 시큰둥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전 청장은 확보한 5000억 원 자료를 보고했고 얼마 뒤 이 대표는 외교 특사 격으로 활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는 4월 총선에 출마한 안대희 전 대법관과의 인연도 있다. 한 전 청장이 서울국세청 조사4국장으로 일하면서 중점을 둔 사안이 불법 금괴 수출입 거래였다. 원자재를 수출하면 10% 부가가치세를 환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수입업자가 금괴를 수입하고 중간에 소위 ‘폭탄업체’를 끼워 넣고 수입업자는 다시 수출하는 행태를 계속 반복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금괴 거래과정에서 부담해야할 부가가치세를 이 폭탄업체가 모두 껴안고 자폭하듯 폐업해 버린다. 30억 원의 금괴를 수입해 3억 원의 부가가치세를 남겨 수출하고 다시 수입하는 것을 반복한다.
안대희 전 대법관
안 전 대법관의 지휘 아래 서울고검에서 총력을 기울여 수사를 했지만 법원에서 역시 증거 부족으로 패소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 마지막 소송을 남기고 다시 한 번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지난 2006년 안대희 당시 서울고검장이 대법관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해 10월까지 7건의 행정소송에서 국가가 모두 이겼고 승소금액은 829억 원이었다. 훗날 그는 청장이 된 후 안대희 대법관을 청와대 만찬장에서 만나 악수를 하며 웃었다는 후일담을 털어 놓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한 전 청장은 참여정부 사람들을 도덕적, 인간적 면에서 존경한다면서도 항상 아쉬웠던 것은 그들의 편 가르기 의식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최근 더불어민주당 내홍의 뿌리도 이 편 가르기 심리가 짙게 스며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나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책에는 이명박(MB) 정부 초기 ‘개국공신’이었던 정두언 의원의 실각 계기가 된 도곡동 국세청 자료 요청 건에 대한 비화도 담겨 있다. 한 전 청장은 먼저 당시 국세청 자료라고 알려진 MB 관련 보고서는 국세청 자료일 가능성이 낮다고 진단한다. 당시 자료에는 1982년 이전 부동산 거래 내역이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국세청 전산자료에는 1982년 이전 부동산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한 전 청장은 “내 추측으로는 행정전산망의 부동산 자료가 아닐까 짐작은 갔지만 말해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자료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한 차례 고초를 겪은 후에도 이 자료는 한 전 청장을 다시 괴롭히게 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정두언 의원이 한 전 청장에게 그 자료를 보자고 한 것이다. 한 전 청장은 법원의 영장이 없는 한 어떤 경우에도 납세자 개개인의 사생활 정보를 줄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면서도 서슬 퍼런 인수위가 전군표 전 청장과 조사국장 등에게 책임을 묻진 않을까 걱정된 한 전 청장은 한 인수위 관계자에게 이 같은 고민을 상의하게 된다. 한 전 청장은 “정두언 의원이 이 자료를 안 준다고 며칠째 난리다. 도저히 못 견딜 지경이다. 법규정상 줄 수 없는 자료지만 MB 본인이 동의하고 직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이 자료를 넘겨주겠다”라고 말했다.
대화가 끝나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절대 주지 말라”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다음날 한 전 청장은 일이 크게 잘못된 것을 깨닫는다. 인수위 관계자가 이 문제를 상담한 사람은 정 의원이 아니라 바로 MB였기 때문이다. 한 전 청장은 대통령 당선인의 신임을 받으려고 인수위 내에서 치열한 권력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이야기한다.
한 전 청장은 후일 이 사건 이후 MB가 정 의원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고 자료를 모은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해 정 의원을 멀리했다는 소문을 듣게 됐고 그 이후 멀리한 것은 사실이었다고 회고했다. 한 전 청장의 회고가 맞다면 인수위 직후 정 의원의 실각이 당시 자료 때문이었음이 확인됐다고 볼 수 있다. 한 전 청장은 “정두언 의원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당시 상황이 오해였고 억울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었다”고 밝혔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