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한 은행 전광판이 지난 21일 1.82%(344.15 포인트) 하락한 항셍지수를 보여주는 모습. 항셍지수는 이날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아래로 떨어졌는데 이는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이었던 199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AP/연합뉴스
ELS(Equity-Linked Securities·주가연계증권)는 기초자산 가격이 투자 당시보다 반토막이 나지 않는 한 은행 이자의 몇 배에 달하는 수익을 내는 상품으로 알려지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구조는 이렇다. 고객에게 투자금을 받은 증권사는 투자금의 95%를 안전한 채권에 투자한다. 그리고 나머지 5%를 투자위험이 있는 기초자산에 투자한다. 위험자산에 투자된 5%는 향후 채권이자로 채워진다. 최악의 경우에라도 투자원금 자체는 회수 가능한 셈이다.
그런데 원금보장을 위해 채권매입 비중이 높아지면 그만큼 위험자산에 투자해 얻을 수 있는 기대수익은 낮아진다. 그래서 채권매입 비중을 60% 정도까지 낮춘 상품이 나왔다. 원금은 보장되지 않지만 월등한 수익을 낼 수 있다. 최근 나온 상품들의 수익률은 10% 안팎이다. 은행 이자의 5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원금 보장이 안 되더라도 기초자산의 가격이 투자 당시보다 반토막가량 급락하지 않는 한 애초 약속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기초자산 투자를 현물이 아닌 선물과 옵션 등 복잡한 파생상품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급격한 가격하락이 없는 한 수익을 내는 구조로 짜여졌다. 지난해 여름까지 국내에서 팔린 ELS 대부분이 ‘Eurostoxx50(유럽)’, ‘HSCEI(홍콩)’, ‘S&P500(뉴욕)’과 같은 해외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삼고 있다. 시장 규모가 크고 주가 흐름도 좋아 기초자산 가격이 급락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에서다.
문제는 홍콩에서 벌어졌다. 지난해 여름 중국 증시 폭락 사태로 홍콩 증시도 동반 하락했고, 이 때문에 일부 ELS가 기초자산에서 큰 손실이 나 원금까지 까먹을 수 있는 구간에 진입했다. 국내에서는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지만, 홍콩 금융당국은 당시 바짝 긴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증권사들이 홍콩 주가지수를 기초자산으로 발행한 ELS가 너무 많아서다. 당시 홍콩 금융당국은 3~4개 국내 증권사에 선물옵션 포지션 한도 위반을 이유로 H지수 선물옵션 보유고(포지션)를 축소하라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H지수를 기초지수로 발행된 ELS는 36조 원이 넘었다. 이에 따라 국내 증권사들은 H지수 파생상품을 대규모로 보유하게 됐다. 만약 H지수가 급락하게 되면 국내 증권사들은 파생상품 투자손실을 줄여야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미국의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기초자산, 즉 주택가격이 하락하자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파생상품을 대규모로 매도하면서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지난 21일 오후 홍콩 H지수는 7800선까지 떨어졌다. 홍콩 H지수를 기초로 한 ELS가 본격적인 원금손실 가능구간에 발을 내딛게 됐다. 우려가 확산되자 금융당국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금융위원회는 “H지수가 원금손실 가능구간에 들어갔지만, 대부분의 ELS는 일정 지수까지 회복하면 기존에 약정된 수익을 보장받는 구조”라며 “현재 발행된 홍콩 H지수 기초 ELS의 96.7%가 2018년 이후 만기가 도래하므로, 그 때까지 지수만 회복되면 투자자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좀 다를 수 있다. ELS 수익의 핵심이 선물과 옵션 등 파생상품이란 점 때문이다. 파생상품은 적은 돈으로 큰 수익을 낼 수 있지만 반대로 원금 이상의, 때로는 무한대의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파생상품을 거래하려면 투자자산의 일정 비율로 증거금을 내야 한다. ‘일정 비율’이다 보니 증거금은 투자자산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기초자산 가치가 떨어지면 증거금도 더 내야 한다.
홍콩 증시가 크게 떨어져 보유한 파생상품 가치가 하락하면 증거금은 조 원 단위로 급증할 수 있다. 증권사들은 보유 채권을 팔아 이 돈을 마련할 수밖에 없는데, 그 금액이 커지면 국내 채권시장까지 혼란이 생기게 된다. 유진증권 서보익 연구원은 “중국 증시 급락과 미국 기준금리 인상 우려로 출렁였던 2015년 3분기의 경우 ELS 발행 잔액 1조 원당 150억~200억 원의 손실이 난 것으로 추산된다”면서 “홍콩 증시가 추가 하락할 경우 더 큰 악영향이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하반기의 경우 H지수가 그래도 10000선 안팎이어서 원금 손실 시작구간(8000 이하)에서 꽤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8000이 깨진 상황이다.
만약 증거금을 내지 않으려고 파생상품 자산을 다급히 청산하게 되면 아주 싼 값에 팔아야 하고 이는 주가 하락을 유발할 수 있다. 주가 하락은 공매도로 수익을 얻으려는 투기 세력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홍콩 증시가 급락하면 한국 증권사들의 사정을 잘 아는 투기 세력들이 더욱 주가 하락을 부추기고, 이는 증권사들의 자금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유안타증권 이중효 연구원은 “홍콩 증시 급락 때 일부 세력이 대규모 공매도를 해 주가 하락을 더욱 부추긴 점이 발견된다”고 밝혔다. 한국의 ELS 열풍이 홍콩 증시 불안을 더 키우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한편 대우증권은 최근 기초자산의 출렁임이 커지면 ELS 원금손실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사실을 경고했다. 분석 결과 2012년 이후 발행된 ELS의 조기상환 비율을 분석해본 결과, 2014년까지 발행된 ELS의 평균 조기상환 비율은 97.8%였다. 수익확률이 97.8%라는 뜻이다. 주요 증시가 박스권 또는 완만한 상승 흐름을 보이며 덜 출렁인 덕분이다.
그런데 지난해 5월 이후 HSCEI를 중심으로 주요 주가지수들이 하락 추세를 보이고,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우려로 주요 증시가 출렁이며 ELS의 조기상환 비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대우증권 이기욱 연구원은 “2015년 발행된 ELS 가운데 6개월 경과 후 조기상환된 비율은 33.4%로 직전 3개년도 평균 비율인 73.4%의 절반 수준”이라며 “그런데 ELS가 첫 평가일에 조기상환되지 못했다면 그 다음 평가일에 조기상환될 확률은 50%에 미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낮아진다”고 분석했다.
딜러 출신 증권업계 관계자는 “2008년 금융위기 때 은행들이 기업들에 환율변동에 투자해 큰 수익을 얻는 KIKO(키코) 가입을 권유했다가 5조 원에 달하는 손실을 본 적이 있다”면서 “고수익에 급격히 쏠린 투자자들과 이에 부화뇌동해 위험관리에 소홀한 증권사들의 행보를 볼 때 지금 상황은 KIKO 때보다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