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BBC와 미국의 <버즈피드>가 입수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동안 테니스 승부 조작에 연루된 선수들은 28명이며, 이 가운데 16명은 세계 랭킹 50위 안에 드는 상위 랭커들이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로 그 ‘이변’이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갑자기 발목과 발가락의 통증을 호소하면서 다리를 절뚝였던 다비덴코는 계속해서 타임아웃을 요청했고, 잦은 실책으로 연거푸 게임을 내준 끝에 결국 2세트를 지고 말았다. 그리고 3세트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부상을 이유로 그만 기권을 선언하고 말았다. 당시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은 뜻밖의 경기 결과에 놀랐지만 의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온라인 도박 사이트인 ‘벳페어’의 관계자들은 달랐다. 경기 초반부터 그들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갔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베팅 금액이 이상하게 한쪽으로 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승 후보였던 다비덴코가 아니라 아구엘로의 승리에 거는 금액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던 것.
베팅 금액도 어마어마했다. 그날 경기에 걸린 베팅액은 총 360만 달러(약 43억 5000만 원). 이는 그 정도 규모의 대회에 걸리는 일반적인 베팅액보다 무려 열 배가 넘는 것이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챘던 ‘벳페어’의 반부패팀장은 즉시 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소포트에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급기야 다비덴코가 기권을 선언하자 ‘벳페어’ 측은 즉각 모든 베팅 거래를 중단하고, 역사상 최초로 그날 경기에 걸렸던 베팅을 전면 취소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당시 테니스계는 물론이요, 세계적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다름이 아니라 승부 조작이 의심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승부 조작 의혹의 중심에 섰던 다비덴코는 즉시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다. 자신은 어떤 도박 조직과도 연관이 없으며, 그저 경기 전부터 발목 부상이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실제 의료 기록을 조사한 결과, 경기 3일 전에 이미 아킬레스건 염증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며, 이는 테니스 선수들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경기 주심 역시 다비덴코가 일부러 경기를 지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면서 “만일 그가 경기를 조작하려고 했다면 좀 더 프로페셔널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했을 것”이라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봤던 ATP 측 관계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다비덴코의 플레이는 매우 이상했으며, 모든 리턴 게임을 느슨하게 처리했고, 브레이크 포인트 근처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경기 내용이 형편없었다는 것이었다.
경기 도중 그의 발목 치료를 담당했던 물리치료사 역시 수상한 점을 지적했다. 다비덴코가 “이 정도면 기권할 수 있는 의학적 사유가 되나요?”라고 그에게 물어봤다는 것. 그가 그렇다고 말하자 다비덴코는 세 게임을 뛴 후 기권을 선언했다.
결국 논란이 거세지자 ATP 측은 조사에 착수했다. 당시 테니스협회에는 자체적인 부패감시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경마협회’의 노련한 수사팀을 고용했다. 수사팀은 1년 가까이 테니스 경기에 오간 수상한 베팅을 모두 면밀히 조사했다. 이렇게 작성된 기밀 보고서는 당시 대외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었다.
당시 수사팀에 속해 있던 마크 필립스는 다비덴코와 아구엘로의 경기를 분석한 후 “20년 가까이 도박 산업에 종사해왔지만 그렇게 비현실적인 베팅이 이뤄진 경기는 보지 못했다”라며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결론은 하나였다. 러시아 도박꾼들은 다비덴코가 경기에서 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라고 결론지었다. 더욱 수상한 점은 그날 ‘벳페어’에서 거래된 360만 파운드 가운데 5분의 1이 모스크바의 아홉 개 계좌에서 송금됐다는 것이었다.
다비덴코와 아구엘로에 대한 수사도 진행됐다. 당시 다비덴코는 아구엘로를 개인적으로 모른다고 말했으며, 휴대전화 및 통화 내역 기록을 제출해달라는 수사팀의 요청을 거부했다. 의심스런 정황은 아구엘로의 휴대전화에서 포착됐다. 삭제된 휴대전화 기록을 복원한 결과 휴대전화에서 ‘다비덴코’의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가 나왔던 것. 두 선수가 사전에 접촉을 했었던 것으로 의심됐지만 실제 통화 내역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노박 조코비치(왼쪽)는 20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오픈 당시 “1라운드에서 져주면 20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같은 해 오렌지 프로콤 오픈에서 우승 후보 니콜라이 다비덴코(가운데)가 바살로 아구엘로(오른쪽)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이유로 기권을 해 승부조작 의혹이 일었다. AP/연합뉴스
이 경기에서 시칠리아 도박사들은 아구엘로의 승리에 막대한 금액을 걸었고, 도박사들의 예상대로 아구엘로는 경기를 이겼다.
수사팀은 다비덴코와 아구엘로 경기 외에도 다른 경기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실시했으며, 이와 관련된 광범위한 증거가 담긴 보고서를 2008년 신설된 부패감시기구인 ‘테니스진실성위원회(TIU)’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불법 도박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28명의 선수 명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필립스는 “수십 건의 경마 사건을 조사했던 내 경험을 토대로 했을 때 그 증거들은 매우 명백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8명의 선수들이 연루된 72개의 경기에서 조직적으로 승부 조작이 일어났으며, 불법 도박을 일삼았던 조직은 러시아, 북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등 세 곳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사팀의 보고를 받는 ATP 측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ATP 관계자들의 얼굴에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보고가 끝난 후에도 TIU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8명의 선수들에 대한 추가 조사는 물론이요, 대외 발표 역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TIU는 새로운 선수 행동 규정(△모든 종류의 승부 조작 금지 △수사팀의 요청이 있을시 휴대전화 및 계좌 내역 제출 의무 등)을 발표함과 동시에 다비덴코와 아구엘로에게 혐의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두 선수가 규정을 위반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면서 ATP 측은 테니스계는 ‘건강하다’ ‘어떤 부패도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에 따라 결국 두 선수 역시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으며, 그렇게 수사는 종결됐다.
처벌을 받지 않았던 다비덴코와 아구엘로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경기에 출전했다. 다비덴코는 2014년 은퇴하기 전까지 메이저 대회 준결승 4회 진출을 비롯해 상위권에서 꾸준히 활약했으며, 아구엘로는 2009년 세계 랭킹 47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수사팀은 해체됐지만 그 후에도 부패 수사관들, 마권업자들, 외국 경찰, 도박 단속원, 유럽스포츠안전협회 등 여러 단체에서 몇몇 의심스런 선수들에 대한 경고를 보냈다. 지난 10년간 의심스런 정황이 포착된 70명의 명단이 TIU에 아홉 차례 보고됐으며, 이 가운데 상위 랭커 16명의 이름도 반복적으로 명단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놀라웠다. TIU는 별다른 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관심이 없다는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 필립스는 “모든 게 명확해졌다. 그들은 우리의 충고를 비롯한 그밖에 관련된 것들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저 쉬쉬하며 덮어두길 원했다는 것이다.
이에 참다못한 몇몇 ‘내부자들’이 결국 모든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승부 조작이 의심되는 선수들의 명단이 적힌 기밀문서를 BBC와 <버즈피드>에 넘겨버린 것이다. 2만 6000건의 경기에 대한 도박 내용 분석, 도박 전문가 및 테니스 관계자, 선수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 이 기밀문서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승부 조작에 가담한 세계 랭킹 50위 이내의 선수들은 16명이었으며, 여기에는 메이저 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한 선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승부 조작 의혹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테니스계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었다. 승부 조작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자수(?)한 선수들도 속속 나타났다. 세계 랭킹 1위인 노박 조코비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200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오픈 당시 떠오르는 스타였던 조코비치는 지인을 통해 1라운드에서 져주면 20만 달러(약 2억 4000만 원)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조코비치는 당시 이 제안을 거절했고, 대회에도 출전하지 않았다. 조코비치는 “그 후 지난 6~7년 동안 승부 조작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도 직접적인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세계 랭킹 71위인 호주의 타나시 코키나키스 역시 소셜미디어를 통해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승부 조작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말했으며, 2001년 호주 오픈 준우승을 했던 전 프로 테니스 선수인 프랑스의 아르노 클레망은 “선수 시절 러시아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했을 때 경기에 져주는 대가로 막대한 금액을 제안 받았었다”라고 폭로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승부 조작 의혹으로 영구 제명당한 최초의 선수는 오스트리아의 다니엘 쾰레러다. 쾰레러는 지난 2011년 승부 조작 사건에 휘말려 벌금 10만 달러(약 1억 2000만 원)와 함께 영구 출전 금지 명령을 받았다. 당시 그는 모스크바, 인도 체나이, 파리 조직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으로 의심 받았다. 하지만 그는 결백을 주장했으며, 제안이 올 때마다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승부 조작은 테니스계에 만연하다. 승부 조작을 일삼는 다른 선수들을 알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도 했다.
한편 승부 조작에 대해 미온하게 대처한다는 비난에 대해 TIU 측은 “어떤 식으로든 도박과 연루된 부패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면서 “이미 자체 조사 후 열세 명의 남자 선수들을 승부 조작 혐의로 징계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 선수들은 모두 랭킹이 낮은 선수들로, 이 가운데 다섯 명에게는 영구 출전 금지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크리스 커모드 ATP 회장 역시 “테니스 협회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우습다”면서 “협회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승부조작 어떻게 이뤄지나 세 가지 ‘조작 패턴’ 있다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주로 체류하는 호텔방에서 불법 도박 조직의 표적이 되며, 경기 당 대개 5만 달러(약 6000만 원) 이상을 제안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경마협회’의 부패 수사팀 소속인 마크 필립스가 분석한 가장 흔한 승부 조작 패턴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누가 봐도 경기에서 우세한 선수를 매수해 경기에서 져줄 것을 제안한다. 그럼 해당 선수는 1세트를 이긴 후 2세트부터는 여러 차례 실책을 범하면서 상대 선수에게 세트를 내준다. 그 후 내리 게임을 지면서 결국 경기에서 지고 만다. 한편 <버즈피드>가 승부 조작 전문가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소개한 승부 조작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1세트와 2세트를 내리 져서 패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보다 좀 더 복잡하다. 매수당한 선수가 1세트를 이긴 후 2세트는 근소한 차이로 앞서 나간다. 이때 불법 도박꾼들은 막대한 금액을 상대 선수에게 걸고, 매수당한 선수는 나머지 두 세트를 전부 져버린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방법은 가장 복잡하다. 선수들이 경기에 이기면서 동시에 승부 조작에 가담하는 방법이다. 이런 경우 보다 정교한 조작이 이뤄진다. 가령 해당 선수가 2세트만 지도록 짜거나 특정 게임에서 특정 스코어(예: 1세트 세 번째 게임에서 40-40의 스코어를 만드는 식)를 만들어 조작하는 식이다. [주] |
테니스 선수 왜 유혹에 넘어가나 랭킹 낮은 선수 돈에 쪼들린다 테니스 전문가들은 테니스가 다른 스포츠 종목보다 특히 승부 조작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전 ATP 부회장인 리처드 잉스는 “만일 승부 조작을 위한 맞춤식 스포츠 종목을 개발한다면 아마 그 종목은 테니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첫째, 선수 한 명만 포섭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랭킹이 낮은 선수들은 대회 경비도 제대로 댈 수 없을 만큼 금전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 테니스와 관련된 도박 시장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연간 치러지는 경기가 1만 건이 넘는 까닭에 도박사들이 매년 테니스 경기에 거는 베팅액은 70억 달러(약 8조 4000억 원)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잉스는 “선수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상대 선수나 대회 관계자들, 팬들, 심지어 언론도 눈치 채지 못하게 쉽게 경기에 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니 승부 조작에 관여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랭킹이 낮은 경우가 많다. BBC의 테니스 통신원인 러셀 풀러는 “200위 아래의 선수들이 매년 거두는 상금 액수는 연 4만 파운드(약 6800만 원)가 채 안 된다. 여기에 코치 월급, 대회 경비, 호텔 숙박비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대회 규모가 작을수록 우승 상금 역시 쥐꼬리만 하다. 반면 1년 동안 전 세계에서 열리는 테니스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소요되는 경비는 10만 파운드(약 1억 7000만 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