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지난 3월27일 서울 장충동의 ‘서울클럽’에서 만난 올림픽대표팀 김호곤 감독은 26일 귀국한 뒤 집에서 수면으로 ‘잠수 타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사이에 유독 기자의 전화번호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찍혀 있어 신문사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며 활짝 웃었다. 마감 일정 때문에 말레이시아전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은 김 감독을 밖으로 불러내려고 전화통에 불을 지필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을 전하는데 김 감독을 보는 사람마다 축하 인사를 건네며 아는 체를 하는 바람에 인터뷰 진행 자체가 어려웠다. 특히 이전 부산 아이콘스 감독 시절 인연을 맺은 정몽규 구단주는 일부러 김 감독이 있는 자리로 찾아와 악수를 나누며 진심 어린 축하를 전했다.
중국전은 물론 올림픽 티켓 확보의 최대 분수령으로 꼽혔던 이란과 말레이시아 원정 경기를 승리로 이끌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올림픽대표팀과 김 감독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사이 김 감독은 생맥주를 시켜 목을 축인 후 본격적인(?) 취중토크에 나서기 시작했다.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이야기를 빼면 별로 쓸 말이 없는(?) ‘솔직함의 향연’을 즐길 수 있었다.
김 감독은 프로팀 감독을 맡을 당시, 같은 고향 선배인 김호 전 삼성 감독과 자주 비교 대상이 됐다. 김호 감독이 고졸 출신이면서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고 수원 감독으로 9년간 깊게 뿌리를 내린 ‘잡초 인생’이라면 김 감독은 연세대 졸업 후 여러 차례의 국가대표팀 코치와 연세대 감독, 그리고 부산 감독을 거쳐 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친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죠. 하지만 나도 알고 보면 힘들게 축구 했다고. 경제적인 여건이 안돼 도시로 축구 유학을 못 가고 통영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우체국장으로 일하셨는데 적은 월급으로 6남매의 학비를 대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계속 축구하겠다고 고집 피울 상황이 아니었죠. 그래서 초등학교 때 축구를 그만뒀다가 결국엔 5년 뒤 동래고등학교로 전학가면서 다시 시작하게 된 거예요.”
만약 김 감독이 공부를 못했더라면 부모님께서는 어렵더라도 아들을 축구선수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교 어린이회장에다 전 학년 반장을 맡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바람에 김 감독과 축구와는 큰 인연이 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김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특히 김 감독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프로팀 선수 차출 문제는 열변을 토할 만큼 격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부산 아이콘스 시절 히딩크 감독이 우리 팀에서 6명이나 빼 간 적이 있어요. 물론 당시에는 뭐라뭐라 욕도 하고 짜증도 냈지만 결국엔 다 보내줬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표팀 감독이 프로팀에 아무리 애원하고 읍소해도 끄덕도 하지 않아요. 물론 K-리그 활성화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떤 상황인가요? 올림픽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어요. 김호곤이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서 선수를 불러들이는 건 아니잖아요. 이럴 땐 차라리 쿠엘류 감독이 부럽습니다. 프로팀 감독들과 얽히고 설킨 사이가 아니니까 그냥 협회에다 명단만 제출해 놓고 기다리면 되잖아요. 난 감독과 단장을 쫓아다니며 선수 좀 보내달라고 통사정을 해야 하는 신세예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통사정을 해도 콧방귀도 안 뀐다는 사실이죠.”
김 감독이 이 부분과 관련해 가장 섭섭해 하는 사람이 바로 FC서울의 조광래 감독이다. 한때 막역한 연세대 선후배 사이로 친분이 두터웠던 두 사람은 올림픽 대표팀과 프로팀 감독으로 만나면서 아옹다옹 다투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예 대놓고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할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나라고 싫은 소리 들어가며, 자존심 구겨가며 LG 선수들을 쓰고 싶겠어요. 대표팀 전력에 꼭 필요한 선수가 그 팀에 몰려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정말로 열 받았던 건 지난 이란전을 앞두고 중국 쿤밍으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직전 LG에 요청했던 박동석과 이정열의 ‘버티기 작전’이었어요. 기자들한테는 비자 문제로 두 사람의 합류가 늦어진다고 얘기했지만 사실은 구단에서 보내주질 않았던 거죠. 특히 동석이는 골키퍼로 김영광 한 명밖에 안 데려간 상황이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수였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안 보내 주다 나중에서야 합류시켜주더라고요.”
김 감독의 흥분이 점점 수위를 높여갔다. 선수 차출 문제가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논쟁의 핵심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인지 김 감독은 연신 ‘오프 더 레코드’를 깔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김호곤호’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스트라이커 정조국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많았다. 주전으로 뛰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조국을 계속 불러들이는 이유도 의문이었고 결국 엔트리에서 제외되거나 벤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속사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선수 개인에 대해 평을 한다는 게 좀 그러네. 이렇게 얘기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 젊은 선수들 중에는 ‘거품’이 든 선수가 너무 많다는 거죠. 물론 조국이의 장점은 분명 있어요. 많이 안 움직이는 대신 문전 앞에서 상당히 날카로운 플레이를 펼치거든. 하지만 (공격수 중에) 조재진을 제외하면 김동현이 남는데 동현이는 상대와의 경합에 강하고 헤딩력이나 활동폭이 굉장히 넓어요. 그동안 상대한 팀을 떠올리면 내가 왜 조국이를 엔트리에 집어넣지 않았는지를 납득하실 거예요.”
김 감독은 인터뷰라고 해서 말을 가리지 않았다. 그만큼 기자에 대한 신뢰와 믿음(알아서 잘 써 줄 거라는)이 크다고 해석할 수 있었지만 성격 자체가 숨기거나 거짓말을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뱉은 말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올림픽팀을 이끌고 네덜란드 전지훈련을 갔다가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문전박대’당했다며 귀국 후 인천공항에서 거친 말을 꺼냈다가 곤욕을 치렀던 것도 남다른 솔직함 때문이었다.
▲ 지난 3월3일 열린 중국과의 올림픽 아시아축구 최종 예선전. 김호곤 감독은 이 경기를 앞두고 가장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그냥 믿고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 ||
김 감독은 올림픽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될 당시 맡았던 프로팀 성적으로 인해 자질 논란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즉 프로팀에서 꼴찌를 했던 감독한테 어떻게 대표팀을 맡길 수 있느냐는 문제로 축구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던 것.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만약 그런 논리대로 대표팀 감독을 뽑는다면 성남 일화의 차경복 감독이 돼야 하는 거네. 당시 부산의 팀 사정과 환경이 어떠하다는 걸 굳이 변명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난 손톱만큼도 내가 부자격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내친 김에 김 감독이 싫어할 만한 질문을 하나 더 했다. 바로 김 감독 뒤에는 협회의 든든한 지원과 협조가 뒷받침되는데 그 중 핵심 인물이 다름 아닌 협회의 고위층 인사라는 의문이었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2000년 올림픽대표팀 경선 때 허정무 감독보다는 내가 더 적임자 아니었어요? 그 분의 배경 때문이라면 허 감독이 아닌 내가 돼야 하는 거죠. 솔직히 그때는 나도 내가 될 줄 알았으니까. 브리핑도 잘했고 자료도 일목요연하게 준비해서 돌렸고 정말 준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이 자리에선 밝히지 못하는 이유들로 인해 물을 먹었어요. 이번 올림픽팀은 누구의 후원이 아닌 정정당당한 경선을 통해 발탁된 것이고 이 부분은 정말 떳떳합니다. ‘취중토크’니까 이런 질문 받고도 얼굴 붉히지 않고 얘기하는 거지 만약 다른 자리였다면 아마도 흥분 좀 했을 거야. 하하.”
두 자녀가 모두 미국 유학중인 김 감독은 딸보다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여론을 예민하게 체크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즉 경기가 끝나고 이런저런 평가들을 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독 감독에 대해 비난과 막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경우 아들이 이를 가만 두고 보질 못한다고. 한번은 아주 심하게 욕을 해댄 네티즌에게 답글을 올린 아들이 ‘내가 김호곤 감독 아들이다. 우리 아버지가 대표팀 운영하며 얼마나 고민이 많은지 아느냐’라고 써서 보내자 상대방이 ‘장난치지 마라. 네가 김호곤 아들이면 난 차범근 아들이다’라며 바로 댓글을 올리더라고.
김 감독은 그동안 치른 최종 예선 세 경기 중 첫 번째 경기였던 중국전을 앞두고 가장 고민을 많이 했고 말레이시아전은 이길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경기 종료 직전까지 가슴을 졸였으며 최대 고비로 꼽혔던 이란전은 오히려 쿤밍에서의 전지훈련 후 자신감이 가득했었다며 지난 경기를 회상했다.
앞으로 세 경기를 남겨두고 있는 김 감독은 3연승으로 조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고 토로한다. 물론 김 감독과 인터뷰를 한 다음날 중국이 어렵게 이란을 이겨줘서 한 고비를 넘겼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김 감독은 득점력 빈곤으로 인해 마지막 경기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일찌감치 올림픽 티켓을 거머쥔 일본이 부러운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
“김호곤을 좀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인기는 바라지 않아. 그냥 믿고 지켜봐 준다면 정말 신바람 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올림픽 4강 진출이 목표인데 지금 상태로는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자신이 있거든요.”
김 감독의 멘트가 결코 ‘뻥’이 아니라는 건 붉어진 눈빛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 후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 감독, 기자한테 “나중에 소주나 한잔 합시다”라며 악수를 건넨다. 어? 그럼 오늘 마신 술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