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8일 청와대 비서실장격인 김창선 국방위원회 서기실장(동그라미)이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군선전일꾼회의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의전을 수행했다. 연합뉴스
북한의 당·군·정 최고 권력기관들의 조직 및 편성은 국내외에 어느 정도 파악된 상황이다. 하지만 김정일 시대 이후 사실상 ‘초월적 행정기관’으로 일컬어지는 국방위원회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독립된 헌법 기관임에도 말이다.
그 시작은 아주 미약했다. 북한의 국방위원회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2년 12월 27일 채택된 사회주의 헌법에 의해서다. 위원장에는 김일성 주석이, 제1부위원장에는 오진우 당시 인민무력부장이, 부위원장에는 김영주 부주석(김일성의 동생)이 각각 취임했다. 허나 출범 당시 국방위원회는 중앙인민위원회 산하의 상징적 기관에 불과했다. 그것도 상설기구가 아닌 비상설기구였다. 성격도 주변의 권력기관을 보조하는 단순한 군 행정기구 수준이었다.
그러던 국방위원회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김정일 시대인 1990년대에 들어서다. 국방위원회는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결정에 따라 기존의 중앙인민위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 독립된다. 2년 후인 1992년 4월엔 헌법 개정에 따라, 지금과 같은 헌법기관의 지위를 얻게 된다. 비슷한 시기(정확히 1991년 12월 24일), 김정일은 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되기도 했다. 사실상 김정일로의 권력이양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시기이다. 국방위원회의 지위 향상과 김정일의 지위 향상은 유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국방위원회는 1998년, 다시 한 번 격상된다. 현재의 국방위원회의 권한을 생각한다면 이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라 하겠다. 당시 헌법 개정에 따라 국방위원회는 인민무력부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국방 분야의 모든 기관들을 설치 혹은 폐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여기에 더불어 주요 군사 및 국방 분야의 간부들을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과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까지 지니게 된다.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이란 공식 직책을 들고 나온 시기가 바로 이때다. 국방위원회가 현재의 권력기관으로서의 토대와 위치를 이루게 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1998년 5월 2일 당시 김정일은 헌법수정문제와 관련해 “국방위원회는 국가기관 중에서도 기본이며 군대를 가지고 혁명을 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그해 8월 26일엔 “종전 국가주석(김일성)의 권능 중 국가주권에 대한 대표권, 북한 정권(특히 국방 및 안보 관련 부문)에 대한 전반적 지도권을 비롯해 중요한 내용들을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권한에 포함시키면 좋겠다”고 직접 발언한 바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이러한 국방위원회의 격상과 재편에 대해 김정일이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눈 이가 부인이었던 고영희란 사실이다. 정치적 감각은 물론 상당히 영리한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고영희는 이 국방위원회의 격상을 두고 아들 정은, 정철에 대한 후계 시스템을 염두에 둔 것 아닌가 싶다. 이미 이에 대한 얘기는 북한 내부에서도 많이 흘러나왔고 이후 어느 정도 확인된 사실이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방위원회는 국방사업의 전반을 지도하는 기관이었을 뿐 외교 분야에 대한 권한은 미미했다. 2009년 헌법 개정에 따라 국방위원회는 외교권까지 얻게 되며, 사실상 무소불위의 행정 권력을 누리게 된다. 당시 개정 헌법은 국방위원장의 권한에 있어서 국가 전반 사업을 지도하면서 외국과의 중요 조약을 비준 또는 폐기하는 이른바 ‘특사권’과 같은 외교 행정적 권한까지를 명시한다.
국방위원회의 현재 권한에 대해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예를 들어본다면 전략무기에 관한 사안이다. 현재 북한군 최고 전략무기라 할 수 있는 핵미사일 개발과 생산을 관장하는 기관은 딱 두 곳이다. 바로 당중앙군사위원회와 국방위원회다. 이 두 곳 외에 어떤 군부 조직이나 당 기관도 이 분야만큼은 손 댈 수 없다고 한다. 핵 전략무기가 사실상 북한 외교 전략의 5할 이상을 차지한다고 볼 때, 이는 유심히 지켜볼 대목이다.
김정일
참고로 장성택은 숙청 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국방위원회 경제정책국 국장을 겸직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주목할 직책은 제1부위원장이다. 당시 우리 언론 및 방송과 관련 학계에서는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직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만큼 장성택의 권한이 초기 김정은 정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참고로 장성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전임자는 유명한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이었다.
또한 ‘경제정책국’이란 직책에서 알 수 있듯 국방위원회에는 국가경제 전반을 다루는 각 분야 상설 조직체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필자가 파악한 국방위원회 내부 조직으로는 2015년 10월 현재 (숙청 전 장성택이 국장을 겸직했던) 경제정책국을 비롯해 정치국, 국방위원회 서기실, 상무국, 정책국, 대외경제국(3국이라 부르기도 함), 행정국, 의전국, 설계국 등이 포진해 있다. 이러한 국방위원회 조직들은 기존 중앙당 군수공업부 청사(2012년 개보수) 혹은 군 총참모부 건물 지하에 나뉘어 위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지난 연재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지만, 김정은 시대 국방위원회에는 의미 있는 변화가 목격되기도 한다. 이 변화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바로 국방위원회 안에 김정은의 업무를 보좌하는 별도의 ‘서기실’이 설치됐다는 점이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 이미 북한 당국은 ‘국방위원회 서기실’이란 명의의 통전을 남측에 보낸 바 있다.
필자가 2014년 6월~10월 사이 세 차례에 걸쳐 북한 내부 고위급 소식통들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국방위 서기실은 지난 2012년 6월경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의 당 서기실(기존의 김정일 서기실이자 현재는 김정은 서기실로 지칭)과 분리된 것이다. 앞서의 당 서기실이 김정은의 사생활과 당 관련 업무(인사 및 검열 등 포함)를 보좌한다면, 신설된 국방위 서기실은 김정은의 국방위 행정업무와 같은 국정운영을 별도로 보좌하는 조직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한국의 청와대 (인사업무를 제외한) 비서실의 업무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하겠다.
물론 김정일 시대의 당 서기실은 중요한 기관이었다. 개인 및 당 관련 통치자금 관리와 대남 및 대미 등 외교부문의 공작사업에도 어느 정도 관여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부분보다 당 서기실은 김정일의 건강, 호위, 가계 관련 사업 등 단순한 보좌기관의 성격이 짙었다. 황장엽 선생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평소 서기실에 대한 의존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 그 나마 당 서기실의 입지가 올라갔던 것은 김정일이 쓰러진 2008년 8월 이후다. 정상적 업무가 힘들었던 김정일은 이 시기 서기실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정은은 선친과는 반대로 여기에 국방위 산하 서기실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는 김정은이 결국 국정을 이끌 카리스마와 리더십에 다소 문제와 한계가 있음을 반증한다. 보좌기구가 복잡하고 두터워지는 것은 결국 지도자의 통치적 한계와 미흡한 부분을 벌충하기 위한 것 아니겠는가.
필자와 소통한 북한 내 고위급 소식통은 이와 관련해 “김정은이 북한 국정을 아버지(김정일)처럼 이끌기 위해선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라며 “국방위 서기실 설치는 그 시간을 벌기 위함”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서기실 책임자 김창선은? 김정은 ‘3대 세습’ 직접 관여 지난 2012년 6월경 신설된 국방위원회 서기실의 책임자는 누구일까. 바로 지난 2013년 5월, 국내에도 존재가 파악된 김창선이란 인물이다. 김창선은 이에 앞서 지난 2012년 7월 방북한 후지모토 겐지(김정일의 요리사)에 의해 언급된 바도 있다. 김창선은 1944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출생했다. 김일성종합대학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그는 당에 입당한 후 행정부 부부장, 서기실 부부장 등을 역임했다. 김창선은 로열패밀리와 인연이 깊다. 사별한 전 부인 류춘옥은 김경희의 가장 가까운 단짝 친구로 전해진다. 장인인 류경수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전우로 6·25전쟁 초 당시 105탱크여단 여단장을 역임했다. 하여 그는 장성택과도 가까이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실장에 임명되기 전 김창선은 약 10년간 어떤 이유에서인지 평안남도 안주시당 조직비서로 좌천생활을 겪기도 했다. 허나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창선은 중앙 무대로 복귀 후 (국방위 서기실장 임명에 앞서) 당 서기실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시기 그는 김정일이 사망 전까지 지근거리에서 김정은의 3대 세습에 직접 관여했다. 실세 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다. 한편, 김창선은 이미 지난 2000년 방한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2000년 9월 14일, 북한은 김정일의 특사 자격으로 김용순 당 비서를 남한으로 파견한 바 있다. 이 당시 김창선은 박성천이란 가명과 당 중앙위 과장의 직책으로 김용순을 수행했다. 이 당시 김창선은 청와대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접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걸] |
필자 이윤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