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다저스는 숫자 3과 7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정서를 반영해 류현진의 포스팅 금액을 정했다. 연합뉴스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 최희섭, 김선우 등은 KBO리그를 경험하지 않고 아마추어에서 곧장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케이스이다. KBO리그를 경험한 선수는 이상훈, 구대성 정도였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에서 KBO리그 출신 선수들은 편견과 제약으로 인해 미국 진출 자체가 어려웠다. 이승엽, 진필중, 임창용 등 KBO리그의 최고 스타플레이어들이 메이저리그 문을 노크했지만 그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이들은 국내 잔류 및 일본 진출로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56홈런이란 대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시즌을 마무리한 이승엽은 2003 시즌 이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다. 이승엽이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목표가 드디어 눈앞에 도래한 순간이었다. 이승엽은 자신의 꿈을 위해 일찌감치 에이전트 존 킴(현 보스턴 레드삭스 스카우트)과 계약을 맺었다. 1999년 한일슈퍼게임에서 서로 안면을 튼 두 사람은 2001년 가을 에이전트와 선수로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이후 ‘슈퍼 에이전트’ 보라스 코퍼레이션의 스캇 보라스가 2006 WBC대회 본선 무대였던 에인절스타디움을 직접 찾아가 이승엽에게 계약을 제안했다가 이승엽이 자신한테는 이미 존 킴이란 에이전트가 있다며 정중히 거절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이승엽은 2003년 11월 22일 아내 이송정 씨와 함께 LA 다저스타디움을 방문한다. 미국행을 추진하는 선수가 다저스타디움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언론은 이승엽과 LA 다저스의 계약 임박 소식을 접하지만 다저스가 ‘국민타자’ 이승엽에게 연봉으로 100만 달러를 제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이승엽은 모멸감만 안고 빈손으로 귀국한다.
“이승엽은 한 마디로 시대를 잘못 만난 선수이다. 지금 강정호, 박병호가 좋은 대우를 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걸 떠올리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당시 다저스의 재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고, 한국 선수, 특히 타자에 대해선 선입견이 존재한 터라 이승엽이 원하는 만큼의 베팅을 할 수 없었다. 이승엽도 다저스 입단을 진심으로 원했지만 ‘국민타자’라는 타이틀을 단 그가 100만 달러의 연봉에 사인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지금 ‘젊은’ 이승엽이 비슷한 기록을 갖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도모했다면 다저스로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승엽을 잡았을 것이다.”
12년이 흘러 박병호는 포스팅 절차를 밟아 미네소타 트윈스로부터 1285만 달러(약 147억 원)라는 거액을 받아냈고, 이후 연봉 협상을 통해 4년 1200만 달러, 옵션 포함 5년 최대 1800만 달러에 계약했다. 그만큼 KBO리그를 바라보는 메이저리그의 시선에 변화가 있다는 얘기다.
국내 최초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미국 프로야구 진출을 추진한 이는 이상훈 LG 트윈스 투수 코치다. 1994-1995년 다승왕 2연패, 1997년 세이브 신기록(37개)를 세우며 한국 무대를 평정했던 이상훈은 시즌 종료 뒤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2년 임대료로 250만 달러를 제시받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꾀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사무국 산하 법률소위원회가 이상훈의 보스턴행을 ‘규정 위반’으로 지적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에게 이상훈을 영입할 균등한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유권해석이 내려지자 이상훈은 계획에 없던 공개 테스트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이상훈을 포스팅 시스템으로 공시했고, 단독 교섭권을 따낸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흥미로운 부분은 보스턴이 최고 응찰액으로 적어낸 금액이 원래 LG에 제시했던 250만 달러가 아닌 60만 달러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LG는 이 포스팅을 철회했고, 이상훈은 미국이 아닌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게 된다. 1999년 12월, 주니치와의 계약을 마무리하고 한국행이 예상됐던 이상훈은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방향을 틀었고, 2000년 꿈에 그리던 보스턴 레드삭스 입단하게 된다. 그러나 빅리그 마운드에는 9차례 올랐고, 성적은 11⅔이닝 평균자책점 3.09를 기록했다. 이상훈은 세인트루이스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고 2002년 LG로 돌아왔다.
진필중은 2001년 51경기 9승 6패 23세이브 평균자책점 3.22를 기록한 뒤 포스팅 제도를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모색했지만 그에게 관심을 보인 구단이 단 한 팀도 없었다. 두산은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이후 진필중의 미국 진출을 선언하면서 이적료로 50억 원 선을 기대했다. 현대 정민태가 일본 요미우리 입단 때 받은 5억 엔을 기준으로 생각한 것이다. 두산은 이후 300만 달러, 200만 달러 등으로 기대치를 낮추긴 했지만 그 가격에도 진필중에게 관심을 보이는 팀은 없었다. 당시 진필중은 포스팅 시스템 무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훈련도 거른 채 숙소에서 두문불출했다는 후문이다.
2002년 12월, 진필중은 다시 한 번 포스팅을 신청했다. 당시 임창용도 비슷한 시기에 포스팅에 나섰다. 임창용은 2002년 17승 6패 평균자책점 3.08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임창용은 65만 달러, 진필중은 2만 5000달러를 제시받는 데 그쳤다. 당시 임창용은 에이전트와의 이중 계약 문제로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다. 임창용이 있는 삼성과 진필중의 두산은 포스팅 최고 응찰액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선수는 소속팀에 잔류했다.
임창용, 진필중보다 더 적은 포스팅비를 받은 선수도 있다. 바로 최향남이다. 최향남은 2009년 롯데에서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하면서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세인트루이스에 입단했다. 당시 입찰금은 101달러. 굴욕적인 입찰금이었지만 최향남은 이 금액을 받아들였고, 롯데도 최향남을 붙잡지 않았다. 최향남은 101달러를 받고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미국에 진출한 최초의 KBO리그 선수가 됐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와의 인연은 바람 같았다. 시범 경기가 끝날 무렵 방출돼 LA 다저스 산하 트리플A 앨버커키에 입단했다. 결국엔 그의 소원이었던 메이저리그 마운드에는 오르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최향남. 이후 롯데 KIA를 거쳐 독립리그 소속의 고양 원더스에서 뛰다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자 오스트리아 세미프로리그 다이빙 덕스에서 활약했다.
우여곡절 끝에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은 이상훈(왼쪽)과 볼티모어 입단이 좌절된 정대현.
정대현의 입단 추진 당시 통역을 도왔던 최은철 전 볼티모어 스카우트(현 CEBA 베이스볼 아카데미 대표)는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볼티모어 구단은 정대현에게 병원은 물론 간염 치료에 좋은 약을 소개하면서 정대현을 붙잡으려 했다. 완치가 돼야만 입단이 가능했는데, 정대현으로선 치료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완치되기만을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대현도, 또 볼티모어 구단도 그런 일이 발생된 데 대해 굉장히 안타까워했고 서로 최선을 다했지만 손을 잡을 수 없는 인연이었다.”
이런 KBO리그 출신의 메이저리그행 흑역사에 제대로 자존심을 세워준 이는 LA 다저스 류현진이었다. 2012년 말에 역대 메이저리그 포스팅 금액 4위에 해당하는 2573만 7737달러 33센트를 제시한 다저스와 협상을 벌여 결국 6년간 총액 3600만 달러짜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KBO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첫 번째 선수가 됐다.
LA 다저스 안병환 스카우트는 다저스가 류현진의 포스팅 비용으로 그냥 2500만 달러도 아니고 굳이 2573만 7737달러 33센트라는 숫자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류현진을 데려가기 위해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 사이에서 눈치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저스의 구단주 그룹이 바뀌면서 재정이 넉넉해진 부분도 큰 도움을 줬다. 만약 7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돈이 없어 그 정도의 베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구단 고위 관계자들은 미팅을 통해 이왕 류현진을 데려올 거라면 다른 팀에서 넘보지 못할 정도로 화끈하게 지르자는데 합의를 봤고, 2500만 달러 이상의 포스팅 비용이 산출됐다고 한다.”
류현진 포스팅 액수에 유독 7과 3이란 숫자가 많이 들어간 배경에는 네드 콜레티 전 다저스 단장이 존재한다. 콜레티 전 단장이 사는 지역에는 한국 교민들이 많이 거주한 곳이었다. 류현진의 포스팅 입찰을 앞둔 콜레티 전 단장이 친한 이웃인 한국인에게 “한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7’이란 대답이 나오자, 그 다음 숫자를 물었더니 ‘3’을 꼽았다고 한다. 한국에선 ‘3’이란 숫자에 대해 인간관계를 좋게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숫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얘기에 2573만 7737달러만이 아닌 그 끝에 ‘33센트’를 붙였다는 것.
류현진의 초대형 계약으로 끊길 줄 알았던 한국인 포스팅 잔혹사는 SK 김광현, KIA 양현종으로 인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광현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부터 최고 응찰액 200만 달러를 제시받았지만 연봉 협상 과정에서 이견을 보여 계약을 맺지 못하고 SK에 잔류했다. KIA 양현종은 기대에 못 미치는 포스팅 금액을 제시받고, KIA의 수용 불가 방침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소속팀과 계약하게 된다.
이후 KBO리그 야수로는 처음으로 포스팅에 참가한 강정호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부터 최대 1650만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이뤘고, 박병호는 포스팅으로, 김현수는 FA 신분으로 메이저리그행에 성공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김인식 감독 쓴소리 투수들 진출 저조한 이유 왜? “원석을 보석으로…조련사들 공부 필요해” “일본대표팀 투수들만 해도 오타니 쇼헤이 외에는 키가 큰 선수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속구 투수가 눈에 띄었던 데에는 체중을 실어 던지는 투구폼이 한국과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 선수들은 온 몸의 힘을 다 써서 투구를 한다. 그렇다보니 신장이 크지 않아도 묵직한 공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KBO리그에서 류현진을 이을만한 선수가 누가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향후 10여 년 동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4게임을 소화하고 있는 KBO리그에서 외국인 선수가 1, 2선발을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 선수들은 시즌 개막 후 한 달 정도 지나면 선발 투수들이 휘청거리고 이후 5개팀 이상은 선발진이 붕괴되고 만다. 타고난 소질도 중요하지만, 소질 있는 선수를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더 중요하다. 안 되면 선수 탓만 하지 말고 지도자들이 더 연구하고 고민해야한다. 시간이 갈수록 투수 코치들의 중요성이 강조될 것이다. 그만큼 공부하는 지도자들이 많아야 한다는 소리다.” 김인식 감독은 몇 년 전 일본 프로팀의 가을 마무리훈련을 참관했을 때 두 가지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엄청난 훈련량과 선수들이 체력 단련에 쏟는 정성과 노력을 목격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야구 인프라를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일본은 잠재 능력이 무궁무진한 야구 유망주들을 키우며 지도자들도 함께 공부했고 성장했다. 그게 프로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적은 연봉을 받으며 고생하는 KBO리그 코치들, 정말 많다. 그래도 공부해야 한다. 진심으로 한국 야구를 위한다면 말이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