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폭스바겐 스캔들이 터진 후 폭스바겐의 본사와 공장이 위치한 독일의 볼프스부르크에도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상태다. AP/연합뉴스
23년 동안 폭스바겐에 몸 담아온 옌스 바르크만(40)은 그 누구보다도 애사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의 우람한 오른팔 전체에는 문신이 가득한데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문신이라고 하면 단연 폭스바겐 공장 모양의 문신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연기를 내뿜고 있는 네 개의 굴뚝 아래에는 ‘1053817’이라는 일련의 번호가 뽐내듯이 크게 새겨져 있다. 이 번호는 다름 아닌 그의 사원 번호다.
이 문신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폭스바겐은 지금껏 바르크만의 자부심이자 자랑이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폭스바겐의 근로자였으며, 아버지를 쫓아 그도 16세 때 처음 폭스바겐에 인턴으로 입사했고, 이듬해 정식 사원이 됐다. 그렇게 20년 넘게 폭스바겐에서 일했던 그는 몇 년 전 팔에 문신을 새길 때만 해도 ‘이 회사에서 50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폭스바겐과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면 볼프스부르크에서는 거의 공무원이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다는 의미였다.
실제 폭스바겐 덕분에 볼프스부르크 주민들의 삶은 지금껏 풍요로웠다. 각종 조사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볼프스부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꼽혀왔으며, 볼프스부르크 외곽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많은 청년들이 꿈을 안고 볼프스부르크로 몰려왔으며, 이곳에서 안정된 직장과 함께 집, 자동차, 그리고 근심 없는 인생을 꿈꿨다.
폭스바겐 동호회 회원들이 옛날을 회상하고 있다. 사진출처=슈테른
‘폭스바겐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후 그가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높은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 믿지 못했던 그는 은행 직원에게 혹시 통장이 바뀐 것 아니냐고 재차 물어야 했다. 매년 연말이면 두둑한 보너스도 지급됐다. 2014년의 경우 그는 5900유로(약 780만 원)의 보너스를 챙겼다. 이는 한 달 치 급여를 넘는 액수였다. 이렇게 보너스를 받으면 대부분의 직원들은 대출금을 상환하거나 여행을 가곤 했다.
바르크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70년대 지어진 노후된 집을 증축하고 개조하는 데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자했던 그는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다이닝 공간과 부엌을 소유하게 됐다. 바르크만은 근사하게 꾸며진 실내를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이 폭스바겐 덕분이다.”
이런 자부심을 갖고 그는 지난해 9월 18일 금요일 저녁에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퇴근했다. 하지만 주말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에 출근했을 때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자랑스러운 회사가 아니었다. 회사가 고객을, 거래업체를, 그리고 주주들을 속여왔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디젤 차량 수백만 대가 배출가스 수치를 조작해왔다는 소문과 함께 주가는 30% 포인트까지 폭락했다.
회장인 마르틴 빈터코프는 즉각 사임했고, 언론에서는 미국에서 사상 최대 금액의 벌금이 부과될 것이라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일각에서는 폭스바겐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만큼 심각한 위기라고 부채질하기도 했다.
이 날벼락 같은 소식에 바르크만과 그의 동료들은 모든 것이 단 하루 만에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당장 일자리가 걱정됐고, 또 회사의 미래도 걱정됐다. 바르크만은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얼떨떨하다”면서 “내 인생에 닥친 이 위기가 마치 지구에 떨어진 운석 같았다”고 말했다.
스캔들이 터진 후 클라우스 모어스 볼프스부르크 시장 역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긴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회민주당(SPD) 소속인 모어스 시장은 다른 동료들 사이에서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도시 재정 보유액은 2억 5000만 유로(약 3333억 원)에 달했으며, 2014년에는 영업세로 거둬들인 세금만 무려 3억 유로(약 4000억 원)였다. 유치원, 학교, 병원, 공원 등 공공시설에 투자할 수 있는 보조금도 두둑했다.
하지만 지난해 폭스바겐 스캔들이 터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지난해 11월 전 세계적으로 폭스바겐 자동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2.4% 감소했다. 미국에서는 무려 24.7% 감소했다. 독일 내수 시장에서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1800대가 더 팔리긴 했지만 분명 예년만 못한 수치인 건 확실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지난해 볼프스부르크가 거둬들인 영업세는 1억 3600만 유로(약 1810억 원)로 급감했다.
지난 2000년 새천년을 맞아 새롭게 지어진 볼프스부르크의 폭스바겐 본사 건물.
모어스 시장
또한 독일의 다른 도시의 경우에는 시 중심에 성당이 있다면 볼프스부르크에는 높이 125m의 굴뚝이 하늘로 뻗어 있는 폭스바겐 공장이 있다. 1938년 히틀러의 지휘 하에 계획된 ‘자동차 도시’였던 볼프스부르크는 때문에 널찍한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그때부터 미 서부 금광을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처럼 수많은 노동 인구들이 볼프스부르크로 이주했었다. 1955년 들어서 볼프스부르크는 폭스바겐의 급성장과 더불어 최고의 호황기를 맞았다. 공장에서는 일명 딱정벌레차로 불리는 ‘비틀’이 끊임없이 생산됐으며, 그때만 해도 생소했던 호칭인 ‘경제 발전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현재 볼프스부르크는 폭스바겐의 ‘쇼룸’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매년 200만 명의 관광객들이 폭스바겐 공장을 견학하거나 각종 관련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볼프스부르크를 찾고 있어 그에 따른 부가가치 창출도 어마어마하다. 또한 폭스바겐은 고용인과 피고용인 간에 소득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 마치 사회주의 시장경제 교과서의 표본과도 같이 여겨져 왔었다. 세계화가 가속되면서 자동차 산업이 점차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폭스바겐과 볼프스부르크는 협력해 왔었다. 사정이 이러니 “폭스바겐이 기침을 하면 볼프스부르크는 독감에 걸린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 또한 “만일 폭스바겐이 파산한다면 볼프스부르크 전체가 주저앉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는 가운데 올해 초 폭스바겐 공장은 예년보다 일주일 더 늦게 재가동됐다. 이번 겨울에만 24일 동안 문을 닫았으며, 1월 11일에야 생산 라인이 다시 가동됐다. 그 이유는 스캔들 후 주문 취소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었다. 두둑했던 직원들 보너스도 지난해에는 큰 폭으로 삭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불안감은 가중되고 있지만 폭스바겐 직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실 걱정하는 일이 전부다. 하지만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미국에서 물게 되는 벌금도, 주가 하락도, 경영진 교체도 아니다. 이들이 무엇보다 우려하는 것은 앞으로 ‘바깥세상’의 사람들이 폭스바겐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지금까지 폭스바겐의 긍정적 이미지는 볼프스부르크의 자부심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거짓말 기업으로 전락한 회사를 소비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소비자들은 폭스바겐이 아직도 좋은 자동차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폭스바겐의 미래를 염려하는 것은 비단 볼프스부르크 시민들뿐만이 아니다. 독일 국민들 역시 폭스바겐의 재기를 바라면서 폭스바겐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생애 첫 자동차로 폭스바겐 폴로를 구입하기 위해 남부 뫼팅엔에서 멀리 북부 볼프스부르크까지 직접 찾아온 미하엘 페리이라(18)는 “폭스바겐은 분명 잘못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폭스바겐이 품질 나쁜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며 구매 이유를 밝혔다.
한편에서는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이 차례로 몰락하면서 함께 쇠퇴한 미국의 디트로이트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모어스 시장은 이번 위기가 12년 전 불경기가 닥쳤을 때만큼 심각하진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폭스바겐은 언젠가 다시 부활할 것이다. 90년대 중반에는 실업률이 18%였다. 독일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5% 미만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어떤 위기도 모두 극복해왔다”라면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새해를 다소 암울하게 시작한 바르크만은 “우리는 잘못을 했다. 하지만 다른 제조업체들도 더 나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마 앞으로 1년 동안은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로 지낼 것이다. 그런 다음 곧 앞으로 다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