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성은 위기에 몰렸을 때조차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상대의 기를 죽였다.연합뉴스
포커페이스는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을 말한다. 포커(카드 게임의 일종)를 할 때, 가진 패가 좋든 나쁘든 표정에 변화가 없어야 상대를 속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긴 단어다. 야구에서도 마찬가지다. ‘멘탈 게임’으로 통하는 야구에서 포커페이스는 강자의 또 다른 상징이다. 특히 투수들에게 그렇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들이 공통적으로 장착한 무기가 바로 포커페이스다. 선동열은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더 상대를 헷갈리게 했고, 류현진은 홈런을 내주기 전과 후의 표정이 똑같아서 데뷔 때부터 ‘애늙은이’로 불렸다. 오승환은 ‘돌부처’라는 별명이 이름만큼 유명했을 정도로 웃음 없는 무표정이 트레이드마크였고, 구대성은 위기에 몰렸을 때조차 입가에 이유 모를 미소를 지어 상대의 기를 죽였다.
물론 제아무리 대선수라 해도 경기 중에는 긴장을 한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느냐, 드러내지 않느냐의 차이가 성패를 가를 뿐이다.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있는 한 투수 출신 감독은 “야구는 원래 속고 속이는 게임이다. 어느 정도 연기가 필요하다”며 “상대가 나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면 없던 힘도 생긴다. 반대로 상대의 감정이 안 보이면 무슨 수를 준비하고 있을까 생각하다 내가 말려든다”고 했다. 투수와 야수를 가릴 것 없이, 경기 중에는 표정을 관리하고 역이용하는 것도 또 하나의 기술이 된다는 얘기다.
류현진(왼쪽), 오승환
#감독들의 표정관리, 선택 아닌 필수
‘국민 감독’으로 통하는 김인식 감독은 과거 한화 사령탑 시절에 이미 한 네티즌이 제작한 유머 사진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좀처럼 표정변화가 없는 김 감독의 얼굴을 여러 장 붙여 놓고, 그 아래 안타, 홈런, 도루, 삼진 등 다양한 상황을 나열해 놓은 것이다. 대부분 똑같은 무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당시 부진이 깊었던 선수의 이름 위에는 살짝 찡그린 표정, ‘우천취소’라는 단어와 에이스의 이름 위에는 슬쩍 미소 짓는 표정을 붙여놓은 것도 웃음을 자아냈다. 포커페이스인 김 감독의 특징을 잘 살린 작품이었다.
사실 이제는 감독들의 표정도 ‘전략’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TV 중계 카메라가 쉴 새 없이 감독들의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고, 사람들은 미세한 변화에도 관심을 집중한다. 감독의 표정에 가장 관심이 많은 건 당연히 선수들. 표정 하나로 선수들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도, 혹은 밀어낼 수도 있다. KIA 김기태 감독은 “감독이 눈 한번 잘못 찡긋 하면 선수단 전체가 긴장할 수도 있다. 요즘은 마음이 여린 선수들이 많아 감독 표정 하나에 용기를 얻고 상처를 받는다. 표정 관리도 전략적으로 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니 갈수록 감독들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도사’가 돼가고 있다.
김인식 전 감독(왼쪽), 김경문 감독
물론 천하의 포커페이스도 순간순간 무너질 때는 있다. 김 감독도 경기 상황이 안 좋아지면 입이 저절로 동그랗게 앞으로 모인다. 이 모습이 화제에 오르자 김 감독은 “사탕을 입에 넣고 화가 날 때 오물거리다보니 입이 모아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현미경 중계에 대처하는 법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라운드에 있을 때만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게 아니다. 케이블TV를 통해 전 경기가 생중계되는 시대다. 방송사마다 다양한 장소와 각도에 여러 대의 중계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경기 상황에 따른 더그아웃의 표정 변화와 주요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생하게 전한다. 팬들이 느끼는 희로애락은 두 배가 되지만, 선수들은 무심코 던지는 욕설조차 조심해야 한다. 팬들이 입모양만 봐도 다 알기 때문이다. 특히 승리 요건을 갖추고 내려간 당일 선발투수는 종종 클로즈업이 되는 요주의 인물.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반복적으로 카메라에 잡히는 단골손님이다. 더그아웃에서 쓰레기통을 걷어차거나 인상이라도 썼다가는 느린 화면으로 여러 차례 리플레이될 각오를 해야 한다.
경기 도중 절대 느슨해질 수 없는 효과도 있다. 한 선수는 이런 증언도 했다. “일요일에 오후 2시 경기를 하다 보면 평소 리듬과 달리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땡볕 아래서 경기해야 해서 몸이 무척 피로하다. 한번은 경기가 초반부터 10점 이상 차이가 나서 긴장감이 떨어진 데다, 7~8회쯤 되니 서서히 선선해지면서 시원한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조금씩 졸음이 몰려오고 지루해지는 시기였는데, 멍하니 있다가 순간 빨간 불이 켜진 (온에어) 카메라가 내 쪽으로 향한 걸 보고 화들짝 놀라 박수를 치며 파이팅을 외쳤다. 하마터면 팬들에게 매장당할 뻔했다.”
또 다른 선수도 “이제 선수들도 어떤 카메라가 방송을 타고 있는지 다 알기 때문에 내가 그라운드에 없을 때도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고 했다. 좀 더 팬 친화적이고 영리한 선수들은 아예 동료들과 재미있는 표정을 연출하면서 간접적인 ‘팬 서비스’를 하기도 한다.
물론 매 순간이 긴장상태인 감독들은 여전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한 감독은 “한번은 속에서 열불이 나는데 카메라가 내 얼굴을 계속 잡고 있는 게 거슬려서 일부러 수석코치를 카메라 각도에 맞춰서 내 앞에 세워놓은 적이 있다. 기둥이 있는 구장에서는 카메라의 사각지대를 찾아 기둥 뒤에 숨어보기도 했다”고 웃어 보였다. 또 다른 감독 역시 부임 첫 해를 다이내믹하게 보낸 뒤 “나는 감정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집에서 자꾸 ‘화 좀 내지 말라’고 연락이 온다. 다음 시즌에는 더그아웃에서 좀 더 표정 관리를 잘하고 싶다”는 자체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한때 경기 도중 팀이 위기 상황에 빠진 감독들의 굳은 얼굴을 클로즈업해 비난을 받은 금연보조제 광고. MBC 방송화면 캡처.
몇 년 전에는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감독들의 표정을 악용해 비난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한 중계 방송사의 금연보조제 광고가 화근이었다. 한 팀이 대량 실점을 하거나 어이없는 본헤드 플레이가 나오면, 일단 어쩔 수 없이 굳어져 버린 감독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어 그 아래 ‘담배 한 대 생각나시죠?’라는 자막과 함께 금연보조제 이름이 등장한다. 문제는 감독들의 속이 가장 타들어갈 만한 상황, 즉 경기 도중 팀이 위기에 빠지거나 중요한 기회를 날렸을 때만 이 광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위권 팀 감독의 얼굴이 상위권 팀 감독의 얼굴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것도 당연지사다. 당시 감독의 얼굴이 이 광고 화면으로 종종 사용(?)됐던 한 구단 관계자는 “광고주 입장에서는 이만큼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었겠지만, 구단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낙담한 상황에서 너무 조롱을 받는 기분이다. 감독의 권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지나친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며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당연히 언론을 비롯한 야구 관계자들의 반응도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감독들이 이 광고의 존재를 몰랐다. 경기 중에는 직접 중계를 볼 수 없어서다. 그러나 오히려 지인들이 “나까지 불쾌했다”고 연락해왔고, 뒤늦게 이 장면을 본 감독들은 “위기에 몰린 감독을 희화화한다”며 펄쩍 뛰었다. 초상권 침해에 대한 문제제기도 시작됐다. 결국 그 광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TV에서 사라졌다.
배영은 스포츠 자유기고가
감독들 때론 오버액션 왜? 한대화 ‘예끼 사건’ 신선한 파장 프로야구 감독들에게는 ‘포커페이스’가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감독도 사람이다. 팽팽한 승부가 계속되는 야구 경기에서 매 순간 감정을 감추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더그아웃에서 자기도 모르게 환희나 분노를 표출하는 감독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TV 중계 화면을 통해 노출되기도 한다. 두산 김태형 감독은 부임 첫 해였던 지난해 전반기를 마친 뒤 농담 삼아 “후반기에는 더그아웃에서 좀 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을 자체 목표로 삼았을 정도다. 한대화 전 한화 감독은 오심 항의 ‘예끼 사건’으로 되레 인기를 얻었다. 연합뉴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심판과의 몸싸움이다. 경기가 잘 안 풀리거나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흐름이 불리해졌을 때 꺼낼 수 있는 카드다. 특히 메이저리그에서는 감독과 심판의 다소 과격한 몸싸움이 자주 벌어진다. 뒷짐을 지고 배를 부딪치는 동작은 점잖아 보일 정도. 모자를 벗어 내동댕이치거나 의자를 들어 던져 버리는 것은 물론, 그라운드로 달려 나가 베이스를 뽑아 버리기도 한다. 2013년 타계한 얼 위버 전 볼티모어 감독이 판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더그아웃에서 담배를 피우고 야구규칙집을 찢어 그라운드에 뿌렸던 일화는 유명하다. 위버 전 감독은 볼티모어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통산 97회 퇴장을 당했던 ‘용장’으로도 유명한데, 한번은 시범경기에서도 항의를 하기에 심판이 “대체 왜 이러느냐”고 묻자 “이것도 시즌을 위한 준비”라고 대응했다고 한다. “심판과 언쟁하는 것 역시 감독의 소임”이라는 얘기였다. 또 2007년에는 애틀랜타 산하 마이너리그팀 미시시피 브레이브스의 필립 웰먼 감독이 창의적인(?) 항의를 선보여 유명세를 탔다. 미시시피 투수가 이물질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퇴장 명령을 받자 갑자기 홈플레이트 부근의 흙으로 홈플레이트를 덮어버린 채 주심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것이다. 또 3루에 멀쩡하게 박혀 있던 베이스를 뽑아 외야로 걸어간 뒤 힘차게 던져 버렸고, 곧바로 몸을 낮춘 채 마운드로 기어가 투수가 쓰는 로진백을 집어 들더니 주심에게 수류탄처럼 투척했다. 이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동영상은 UCC 사이트를 통해 공개돼 큰 화제를 모았다. 실제로 이렇게 유난스러운 퇴장이 효과를 본 경우도 있다. 최근 신시내티 수석 고문으로 부임한 루 피넬라 전 시카고 커브스 감독은 2007년 6월 팀이 22승30패로 침체에 빠지자 경기 도중 모자를 발로 차는 격한 제스처를 취했다. 즉각 퇴장이 선언됐다. 그때의 자극 덕분인지 커브스는 그날 이후 63승47패를 기록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한국은 메이저리그에 비해 감독의 돌출 행동에 대한 여론이 엄격하다. ‘코끼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응용 전 한화 감독이 물러난 뒤에는 감독들의 과격한 항의를 찾아보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2011년 한대화 전 한화 감독의 ‘예끼 사건’은 오히려 팬들에게 신선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한화는 9회말 투아웃에 심판의 결정적인 오심으로 승부를 뒤집을 기회를 놓쳤는데, 이때 한 전 감독이 득달같이 달려 나와 심판과 몸싸움을 펼치는 과정에서 ‘예끼 XX XX’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TV 화면에 상세하게 잡혔다. 오심 때문에 분노하던 한화 선수들과 팬들에게는 속이 시원해질 만한 장면. 이후 한화팬들은 상대팀 투수가 1루 견제구를 던질 때마다 입을 모아 ‘예끼’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한 감독이 지휘봉을 놓을 때까지 ‘예끼’는 사직구장의 ‘마!’처럼 대전구장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통했다. 한화 역시 그 이후 성적이 반등했고, 한 감독은 그해 말 한 시상식에서 인기 감독상까지 수상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