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자극적 스토리로 화제가 된 <압구정 백야>, <내 딸 금사월>, <천상의 약속>의 방송 화면 캡처.
최근 방송하는 지상파 TV 드라마 대부분이 자극적인 소재로 버무린 막장 드라마로 채워지고 있다. MBC 주말드라마 <내 딸 금사월>을 비롯해 월화드라마 <화려한 유혹>, SBS 아침드라마 <내 사위의 여자> 등이 대표적이다. 한때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쓰인 출생의 비밀은 이제 ‘애교’ 수준일 뿐이다. 교통사고 화재로 죽은 주인공이 몇 회 만에 아무런 설명 없이 부활하는가 하면(내 딸 금사월) 죽은 의붓딸의 남편을 친딸의 남편으로 맞이하는 이야기(내 사위의 여자)가 버젓이 방송되고 있다. 보다 보면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KBS, SBS와 비교해 최근 2~3년 동안 드라마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MBC로서는 더욱 막장 소재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특히 주말 밤 10시에 방송하는 드라마는 제목만 바뀔 뿐 몇 년째 ‘막장 논란’에 휘말리고 있다. 이런 흐름은 2014년 <왔다 장보리>로 시작해 2015년 <전설의 마녀>, 현재 방송 중인 <내 딸 금사월>까지 이어진다. 어릴 때 자식을 버리거나, 성공을 위해서라면 살인교사까지 서슴지 않은 주인공의 등장은 공통점이다. 상황과 이야기가 자극적일 수록 시청률은 상승해, 방송가에서 ‘성공 지표’로 삼은 시청률 30%를 돌파했다.
# 경쟁하듯 자극성 더해…법원 제재까지
높은 시청률이 작품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송사 입장에서 막장 드라마는 놓치기 어려운 장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시청률이 오를수록 광고 판매율이 증가하고, 이는 곧 방송사 매출로 직결되기 때문. MBC를 포함해 방송사들이 매번 반복해 겪는 막장 논란에도 갈수록 자극적인 소재를 찾는 이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제는 누가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쓰는지 마치 경쟁하는 분위기다. 소위 ‘막장 대모’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진도 생겨났다. 일찍이 <인어 아가씨>와 <하늘이시여>로 이런 장르를 개척한 임성한 작가를 중심으로 <왔다 장보리>와 <내 딸 금사월>의 김순옥 작가, <조강지처클럽> 등의 문영남 작가가 그들이다. 이들은 회당 수천만 원에 달하는 집필료를 받으면서도 시청자를 위로하거나 공감을 얻는 이야기 대신 ‘혈압 상승’을 이끄는 막장 소재에만 몰두하는 모양새다. 때로는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임성한 작가가 대표적이다. 주인공들을 이유 없이 죽이는 ‘돌연사 설정’, 배우보다 개의 출연 비중이 높은 엉뚱한 전개로 줄곧 논란과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지난해 <압구정 백야>를 끝내고 ‘작가 은퇴’를 선언했다.
막장의 범람은 전체 드라마의 수준을 하향평준화로 이끈다는 비난에도 직면해 있다. 배우 이유리가 주연을 맡아 최근 시작한 KBS 2TV 일일드라마 <천상의 약속>은 시작부터 쌍둥이 여주인공이 당하는 교통사고, 친자를 찾으려는 유전자검사 등의 소재가 나온다. 입양한 자녀와 친자의 갈등 예고 등 아직 방송 초반이지만 지금까지 나온 에피소드만 보면 ‘막장 공식’ 그대로다.
상황이 심각하다보니 이제 법원도 막장 드라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방송통신위원회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 1월25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는 <압구정 백야>를 방송한 MBC가 ‘드라마 관계자 징계 처분 등 방송통신위원회가 부과한 제재를 취소해 달라’고 제기한 소송에서 방송통신위원회의 손을 들어줬다.
해당 분쟁은 방송통신위원회가 <압구정 백야>를 두고 ‘청소년 보호 시청 시간대에 부적합한 프로그램’이라고 지적하면서 ‘드라마 관계자 징계 처분’을 내리자, 이에 불복한 MBC가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MBC는 “청소년 보호 시간대라고 해도 스마트폰 등 다른 매체를 통해 시간의 규제 없이 드라마를 보는 환경을 감안하면 <압구정 백야>는 방송심의 규정을 위반했다고 볼 기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설령 처분 사유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는 상당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으므로 방송통신위원회의 엄한 제재는 시청자의 평가를 등한시 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친딸이 가족을 버린 친어머니에게 복수하려고 어머니의 의붓아들을 유혹해 며느리가 되는 설정, 극 중 모녀가 ‘버러지 같은 것’이라고 욕하는 장면, 서로 뺨을 때리며 싸우는 내용 등 패륜적인 이야기가 문제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청소년 보호 시간대에 방영된 극 중 대사 및 극의 내용이 사회적 윤리의식, 가족의 가치를 해치고 가족구성원 간의 정서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며 “징계 처분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 막장의 범람, 자성의 목소리
이제는 방송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환경 개선을 위해 ‘건강한 가족극’을 표방한 드라마도 등장하고 있다. 김수현 작가가 새로 집필하는 SBS <그래, 그런거야>가 대표적이다. 3대가 함께 사는 가정을 배경으로 서로 어우러져 삶을 꾸려가는 대가족의 이야기다.
건강한 가족극을 표방한 SBS <그래, 그런거야> 포스터.
방송을 앞두고 김수현 작가는 한 인터뷰를 통해 “막장 드라마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지면 시청자도 망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극적인 이야기로 치닫는 드라마를 향한 일침이자, 시청자의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다.
60년 가까이 배우로 살아온 80대 이순재도 같은 생각이다. <그래, 그런거야>를 통해 김수현 작가와 호흡을 맞추는 이순재는 “시청률을 올려야 하는 방송국의 비즈니스, 시대의 변화 때문에 막장 드라마가 생겨났다”며 “과거엔 막장 드라마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돌연변이, 미친놈들의 향연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드라마는 안방극장을 통해 나가는 만큼 이에 대한 방송국의 공적 기능이 발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청률에만 집중해 사실상 뒷짐 지고 막장 드라마를 생산해내는 방송사를 향해 꺼낸 쓴소리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