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쁜놈은 죽는다’ 스틸 컷. 국내 여배우 중 티켓파워가 가장 센 손예진이 출연했음에도 극장 관객수가 고작 1만 4934명에 그치며 흥행에 참패했다.
<나쁜놈은 죽는다>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쉬리> 등을 연출한 강제규 감독과 <집결호>, <야연> 등으로 유명한 펑샤오강 감독이 제작자로 나섰고, 펑샤오강 감독의 조감독 출신 손호 감독이 연출한 한중합작영화다. 제주도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해 한국 관객들에게 반가운 풍광이 가득 담겼다. 하지만 관객은 이 영화를 외면했다. 2월 4일 개봉한 뒤 불과 1주일 만에 IPTV와 케이블TV에서 VOD로 공급하며 사실상 극장 상영을 접었다.
한중합작영화의 ‘흑역사’는 이미 오랜 기간 이어져 오고 있다. 내로라하는 톱스타들이 중국 유명 배우와 함께 출연해도 국내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다. 최종 관객 100만 명 동원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국의 장동건, 중국의 장쯔이와 장바이쯔가 호흡을 맞췄던 영화 <위험한 관계>는 말 그대로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했다. 게다가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 등을 연출한 허진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기대감이 더욱 올라갔다. 그럼에도 2012년 개봉된 이 영화는 29만여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비상업영화를 제외하면 장동건이 출연한 영화 중 가장 저조한 스코어에 속한다.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며 일정 관객 동원을 보장하는 정우성과 소지섭 역시 한중합작영화에선 통 힘을 못 썼다. 정우성이 중국 배우 고원원과 남녀 주인공을 맡은 영화 <호우시절> 역시 29만여 명을 모으는 데 그쳤고, 소지섭과 장쯔이가 출연한 <소피의 연애매뉴얼>의 최종 스코어는 고작 12만여 명이었다.
장동건, 장쯔이, 장바이쯔 등 한중 최고의 스타들이 출연한 ‘위험한 관계’ 역시 한중합작 영화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흥행에 실패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장르가 멜로라는 점이다. 멜로 영화는 몇 해 전부터 한국 시장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몇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흥행에 성공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한중합작영화는 대부분 중국 자본이 투입되는 터라 한국보다는 중국 정서에 맞추는 경향이 짙다. 중국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기 때문에 국내 관객들도 ‘중국 영화’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요소들이 맞물리며 한중합작영화 잔혹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국내 상황과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한중합작영화의 성패를 단정 지을 순 없다. 그 안에는 다양한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한중합작영화들이 한국보다는 중국 시장 공략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다. 국내에서는 ‘한중합작영화’라 부르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국 시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중한합작영화’인 셈이다.
예를 들어 <나쁜놈은 죽는다>는 139개 상영관을 잡는 데 그쳤다. 국내 유력 투자배급사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출연 배우의 면면을 고려했을 때 상영관을 더 확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무리수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 유명 배우 진백림이 출연한 만큼 중국 시장에 좀 더 힘을 쏟겠다는 복안으로도 풀이된다.
한국에서 흥행 고배를 마신 영화들의 중국 내 개봉 성적을 살펴보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피의 연애매뉴얼>은 9199만 위안, 한화로 약 173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정우성의 경우 <호우시절>은 99만 위안(약 1억 9000만 원)에 머물렀지만, 그가 출연한 또 다른 한중합작영화 <검우강호>는 국내에서 31만여 명을 동원한 반면 중국에서는 6436만 위안(약121억 원)을 거둬들였다.
<위험한 관계> 역시 6271만 위안(약 118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오기환 감독이 연출한 한중합작영화 <이별계약>의 경우 1억 9284만 위안(약 364억 원)을 벌어 가장 성공한 합작 사례로 손꼽힌다.
오기환 감독이 연출한 한중합작영화 ‘이별계약’은 중국에서 무려 1억 9284만 위안의 수익을 올리며 가장 성공한 합작 사례로 손꼽힌다.
결국 한중합작영화의 주된 타깃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중국에서 인지도가 높은 한류스타들도 중국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방안으로 합작영화를 선택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중국 영화계도 한류스타들의 높은 인지도를 적극 활용하는 셈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한중합작영화는 국내 개봉돼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일부 한류스타들은 오히려 국내 개봉을 꺼리기도 한다”며 “한중합작영화의 주연을 맡았다는 ‘명분’으로 국내에서 홍보 효과를 거둔 뒤 ‘실리’는 중국에서 챙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도 다수 한중합작영화들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박시후와 윤은혜가 주연을 맡은 <사랑후애>를 비롯해 안병기 감독이 연출하고 한채영과 여명이 출연한 <불속지객>, 김하늘의 중국 진출작 <메이킹 패밀리>, 이정재와 이민호가 각각 출연하는 <역전의 날>과 <바운티 헌터스> 등이 줄줄이 관객과 만난다.
하지만 이 중 한국에서 대규모 개봉과 흥행을 노리는 작품은 많지 않다. 한중합작영화를 바라보는 한국 관객의 시선이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영화계 관계자는 “한국과 중국의 영화 문법이 다르기 때문에 양국을 모두 만족시키긴 어렵다”며 “배우들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을 분리해 각각의 시장을 공략할 작품을 따로 고른다”고 전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