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국내 복귀설이 나돈 이천수는 현실적으로 연봉 문제가 걸릴 뿐만 아니라 지금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이대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 ||
먼저 ‘요즘 어떻게 지내냐’면서 가벼운 인사부터 건넸다. 말 꺼내기가 무척 조심스러웠는데 이천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 요즘 잘 살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기분 꿀꿀할 것도 없고, 오히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힘들 거라고 지레 짐작으로 걱정하는 거 같아”라며 툴툴거렸다.
이천수는 한국 언론은 물론 스페인 언론과도 인터뷰를 안 한다고 한다. 한국에선 스페인에서 나온 기사를 참조하고 스페인에선 한국에 보도된 내용을 토대로 ‘소설 같은’ 기사를 써댄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에서 날 왜 이렇게 죽이려 드는지 알 수가 없어요. 2002년 월드컵 이후 언론의 심한 질타에도 잘 버텨왔는데 지금은 그 강도가 더 센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부상으로 경기 출전을 못하고 심하게 마음고생하고 있을 때, 한번이라도 날 더 띄워주고 내 입장에서 격려의 기사를 써준다면 정말 용기 백배해서 힘을 얻게 될 것 같은데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해요.”
이천수는 분명 지금의 상황이 최악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이대로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다시 이천수의 진가를 알리게 될 때, 그때 두고 보자는 감정 섞인 멘트도 서슴지 않는다.
내가 한심하다!
언론에 대한 불만이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이천수는 자기 자신을 ‘한심하다’고 표현했다. 지난 1년 반 동안 한 골도 터트리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골을 넣어야 인정받는 선수가 골을 못 넣었으니 이런저런 비판은 당연해요. 나도 이런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은 더 하겠죠. 한국을 대표해서 스페인에 첫 진출한 선수가 욕만 먹고 있으니. 그런데 어떡해요. 아무리 해도 골이 안 터지는 걸. 골문 앞에서 슛을 날려도 골대 맞고 나오는 걸 어떡하라구요. 그 심정 알기나 해요. 그 상황에 처할 때 난 심장이 잘려나가는 것만 같다구요!”
그래도 믿어주길 바랐다고 한다. 올 시즌 시작하기 전에 국내외 매스컴을 향해 한 시즌만 더 기다려 달라고 당부했고 자신의 스타일상 이렇게 마냥 ‘죽 쑤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란 자신감도 한몫했다. 이천수는 자기가 만약 박지성이나 이영표였다면 이런 식의 ‘매도’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자업자득이든, 선입견이든, 이천수라는 선수에 대한 이미지가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로 연결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 레알 소시에다드 이적 후 첫 출전 경기 당시. | ||
얼마전 2005피스컵코리아 조직위원회에선 최근 일었던 이천수의 이적설과 관련해서 레알 소시에다드측에 문의한 결과 오는 7월 한국에서 열리는 피스컵대회 이전까지 이천수의 이적은 없을 것이란 공식 입장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즉 6월30일까지 누만시아에 임대된 이천수의 이적은 피스컵이 끝난 뒤에야 가능하다는 것. 그 배경에는 이천수가 빠진 상태에서 피스컵에 참가할 경우 레알 소시에다드는 위약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대로라면 난 이미 한국으로 복귀했고 아마 지금쯤은 K-리그의 한 팀에서 뛰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확인조차 하지 않고 ‘이천수 스페인 진출부터 복귀까지’란 기사를 쓸 수 있는지, 정말 할 말이 없어요. 이적설이 알려진 다음 유럽의 에이전트들로부터 문의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물론 그들의 사탕발림 같은 말에 현혹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더라구요. 관심을 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천수는 국내 복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예상했다. 거액의 이적료(3백50만달러)에다 10억원대에 육박하는 연봉, 피스컵에 출전하지 못할 경우 물어야 할 위약금까지 합치면 모두 4백50만달러, 즉 약 50억원에 해당하는 돈이 오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시에다드측에서 이적료를 낮춘다고 해도 40억원 이상 되는 몸값은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한다.
“최근 K-리그의 프로팀 감독님들로부터 직접 영입 제의를 받기도 했어요. 물론 감사했죠. 날 필요로 하는 팀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의 나한테 최고의 선물이니까. 그러나 마음은 끌려도 현실적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선뜻 의사 표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1년에 얼마를 버는지 아세요? 수당까지 합쳐서 1년에 18억원씩 들어와요. 한국에서 내 연봉을 맞춰줄 만한 팀이 있겠어요?”
이천수는 연봉 외에 1경기당 60분 이상을 뛰면 1천5백60만원을 받고, 45분 미만일 경우 1천2백만원 가량의 수당을 챙길 수 있다. 지금도 이천수의 연봉은 소시에다드와 누만시아에서 반반씩 공동으로 부담한다. 이러다보니 이천수 입에서 높은 출전 수당 때문에 자신을 출전시키지 않는다는 불만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인터뷰 거절 속사정
이천수는 지난 2월 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전을 앞두고 대표팀에 합류할 당시 모든 인터뷰를 거절한 채 훈련과 경기에만 집중했다. 지난 2월2일 귀국할 당시에는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을 따돌리고 다른 게이트로 빠져나가는 등 기자들과의 접촉을 일부러 피해갔다. 그 이유를 물었다.
“할 얘기가 없으니까요. 좋은 일이 있어야 인터뷰를 하죠. 참 우스워요. 말을 많이 할 때는 축구를 입으로 하냐면서 뭐라 하던 사람들이 이젠 말을 안 하니까 말 안한다고 또 뭐라 하더라구요. 그때 쿠웨이트전 앞두고 기자들이 집요하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다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대표팀 언론 담당하시는 분이 제가 곤란해질까봐 기자들에게 쿠웨이트전에서 골 넣고 인터뷰하겠다고 말을 만드셨더라구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관심 받고 시선 끌기 좋아하는 선수가 노출을 꺼리는 데에는 분명 깊은 사연이 숨어 있었다. 기자도 ‘기자’란 직업을 달고 취재를 하는 입장이라 이천수가 언론을 향해 ‘각’을 세우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도 기자 입장에선 취재원과는 또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천수에게 설명했다. 그래도 이천수는 응어리진 마음을 쉽게 풀지 못했다.
스페인에서의 향수병
지금 이천수가 최악의 상황에 빠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부상 외에 이천수를 자꾸 주저앉히는 ‘그것’은 뭘까.
“외로움이죠 뭐. 말 다르고 생김새 다른 나라에서 적응해 가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1년 반의 외국 생활 동안 누구나 겪는 거라고 위로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 과정에 놓여 있는 나로선 뚜렷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네요. 하루 빨리 부상에서 회복하고 경기를 뛰며 자신감을 되찾는 게 급선무겠죠.”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누만시아로 임대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만약 2년차인 지금도 소시에다드에서 계속 뛰고 있었다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피해갈 수는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누만시아가 2부리그에서 올라온 팀이라 아무래도 소시에다드와는 분위기가 달라요. 하지만 골은 못 넣어도 상반기에 누만시아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잖아요. 동료들로부터 인정도 받고 감독도 내 실력을 믿어주는 건 확실한데 부상 등의 이유로 경기를 뛸 수 없어 답답하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솔직히 여기선 나한테 골 얘기를 하지 않아요.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자꾸 골에 대해 조바심을 내니까 절로 나까지 조급해지는 것 같아요. 이거 알아요? 나도 미치도록 골을 넣고 싶다는 걸. 골, 골, 골, 아! 정말 골 넣고 싶어요.”
▲ 지난 2003년 8월31일 스페인에서 데뷔전을 치르는 이천수. 스포츠투데이 | ||
이천수는 최근 FC서울에 전격 입단한 박주영에 대한 부러움을 나타냈다. FC서울에서 박주영 외에도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 이런저런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주영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이 치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박주영에 대한 부러움을 넘어 박주영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과 축구협회, 구단 관계자들의 극진한 대우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정도다.
“(박)주영이가 청소년대표팀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나도 청소년대표팀 때 골 많이 넣었어요. 난 이미 K-리그에서 검증받은 선수예요. 1년 반 가량의 K-리그 생활 동안 30경기, 15골 15어시스트의 기록도 세웠구요. 그런 날 박주영 효과에 보탬을 줄 만한 선수로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소시에다드에서 날 이적시킬 계획이라면, 또 그곳이 K-리그라면 날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한 난 절대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소시에다드에서 꺼지라고 하지 않는 한 내 발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다는 거죠.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힐게요.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자존심 구겨가며 한국으로 복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천수는 명예도 중요하지만 돈을 더 벌고 싶다고 강조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가족들을 편하게 돌보고 싶다는 속마음을 내비쳤다.
“나한테 추락의 시기만 있는 건 아니에요. 언젠가는 다시 올라설 때가 있을 겁니다. 모든 국민들이 날 인정해줄 때, 이천수라는 축구선수를 인정해줄 때, 그때 보자구요. 지금, 나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잘못된 시각이었고 기사였는지를 꼭 보여줄 테니까요.”
한편 이천수는 에이전트로 알려진 IFA 대표 김민재씨가 스페인의 레알 소시에다드를 방문한 뒤 자신의 이적과 관련된 협상을 벌였다는 내용과 관련해서 김씨와 만났거나 통화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해 향후 파문이 예상된다. 그러나 김씨는 7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3월1일 이천수를 만났고, 두 사람의 만남을 극비에 부치기로 했기 때문에 이천수가 그렇게 얘기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적협상을 위해 스페인에 간 에이전트와 선수의 만남이 극비에 해당되는 사항일까. 그 진짜 사연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