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일단 시장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밥캣 상장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시장은 기대에 찬 시선을 보냈다. 특히 증권가에서는 밥캣 상장이 성공한다면 8000억 원가량의 자금을 마련해 재무구조 개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두산그룹의 다양한 노력에도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던 두산,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엔진 등의 주가도 밥캣 상장 계획이 발표되자 일제히 반등했다.
당초 밥캣을 미국 증시에 상장하려던 계획을 접고 국내 증시에 먼저 상장시키겠다는 것은 두산그룹으로서 특단의 조치다. 그만큼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통로가 몇 개 없는 데다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증거다. 재계 관계자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밥캣 상장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두산그룹이 급하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두산그룹은 두산인프라코어를 비롯해 그룹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 지금까지 뚜렷한 성과로 이어진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짜인 공작기계사업부 매각이 계속 지연되고 있다. 두산DST 매각은 예비입찰에 참여한 업체들이 실사를 진행하고 있는 초기 단계다. 두산건설의 HRSG(배열회수보일러) 사업부와 두산생물자원 매각은 진행 중이라는 얘기만 흘러나오고 있다.
지난해 성사시킨 일이라면 인적 구조조정과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지분 전량 매각이다. 하지만 인적 구조조정은 큰 반발과 비난을 샀으며 KAI 지분은 앞서 한화테크윈이 보유 지분 일부를 매각해 주가가 하락하면서 두산은 기대했던 가격에 매각하지 못했다.
두산의 구조조정이 늦어지자 신용평가사들은 두산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 조정했다. 지난 19일 한국기업평가는 “그룹 전반의 수익성 및 재무안전성이 지속적으로 저하되고 일부 계열사에서 유동성 대응 능력 약화 및 추가 자산건전성 저하 가능성이 내재돼 있다”며 (주)두산을 비롯해 두산그룹 유동성 위기를 초래한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두산건설의 신용등급을 강등시켰다. 앞서 지난 5일에는 나이스신용평가가 “두산 계열의 회복 여부가 불투명하다”며 두산그룹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을 (하향)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 큰 문제는 신용등급이 하향되고 위기가 부각될수록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데 있다. 만기 도래한 회사채를 상환하기 위해서 보통 기업들은 다시 회사채를 발행하는데, 신용등급이 내려가면 그만큼 금리를 올려줘야 하므로 금융 비용이 훨씬 더 필요하다. 금리를 올려준다 해도 동양그룹 사태 이후 신용등급이 좋지 않은 기업 회사채의 흥행을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채권시장 일부에서 “두산의 하향 조정된 신용등급으로 회사채를 발행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회사채를 발행하기 쉽지 않다면 현금으로 상환해야 하는데 현재 두산그룹 처지에서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를 현금으로 상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두산인프라코어의 올해 만기도래하는 회사채는 8500억 원 규모다.
두산그룹을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이 싸늘해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공작기계사업부 매각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스탠다드차타드(SC) 프라이빗에쿼티(PE)와 가격 협상 과정에서 결렬된 공작기계사업부 매각은 현재 MBK파트너스와도 가격 문제로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급한 쪽은 두산이다.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공작기계사업부 매각이 필요한데 턱없이 낮은 가격에 매각하는 것은 싫고, 매각을 철회하자니 대규모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된다. 여러모로 궁지에 몰린 두산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이다. 협상 파트너가 사모펀드인 점도 두산으로서는 껄끄럽다. 대기업 관계자는 “사모펀드 속성상 ‘급매’라는 단점을 파고들어 어떻게든 낮은 가격에 인수하려 할 것”이라며 “다른 길이 없다면 눈물을 머금고 싼값에 매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밥캣 상장은 두산그룹이 처한 좋지 않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한 방편이 되는 셈이다. 즉 공작기계사업부를 협상의 주도권을 뺏겨가며 급매로 처분하지 않아도 되고, 대규모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시장의 우려도 잠시 불식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밥캣 상장은 오래전부터 계획해왔던 일로 공기(공작기계사업부) 매각과 밥캣 상장은 관련 없다”며 “다만 미국 증시에 상장하면 ‘원오브뎀’이지만 국내 증시에 상장하면 ‘업종대표주’가 될 것이라는 장점이 있어 계획을 수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밥캣 상장이 올해 안에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두산그룹은 “기업가치 평가 측면에서 지금이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글로벌 경기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다. 건설기계업계에서는 전통적으로 1분기를 성수기로 보고 있다. 윤관철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으로 밥캣 상장 역시 지연 가능성이 있는 만큼 추이를 지켜보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