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에서 뛰고 있는 4총사 박지성, 차두리, 설기현, 이영표가 우즈벡과의 경기 후 마음 속 얘기를 쏟아냈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이영표(이): 그동안 우리 모두 고생 많았다. 힘들었을 텐데 잘 버텨줘서 고마워.
설기현(설): 형은 고생 안했나 뭐. 그나저나 형, 우즈벡전에서 선제골 터트린 거, 정말 축하해. 올해는 형이 골운이 있나봐. 이참에 공격수로 자리를 바꿔야 하는 거 아냐? 하하.
이: 아무나 공격수를 하냐? 난 지금 이 자리도 빼앗길까 겁난다. 우선 (박)지성이한테 고맙다. 열심히 뛰어줬고 내 골도 어시스트 해주고, 참 기특하다. 근데 어느 기사 보니까 네 심장이 두 개라면서?
박지성(박): 어휴 형 왜 그래? 내가 뭐 외계인인가. 기자분들께서 내가 지치지 않고 뛰니까 그런 표현을 한 것 같은데 나라고 왜 안 힘들겠수. 나도 사람이라구. 하여튼 우즈벡전 앞두고 다들 긴장했는데 다행히 결과가 좋아서 한숨 돌렸어.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말이야.
차두리(차): 참, 우즈벡전 MVP를 내가 차지해서 지성이한테 정말 미안했다. 그 상은 당연히 네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어느 포털사이트에서 우즈벡전 MVP 선수를 뽑아달라는 설문조사를 벌였는데 지성이가 90% 이상의 높은 지지를 받았더라구. 내가 상 받고 시침 뚝 떼고 가만있었으면 아마도 엄청 욕먹었을 거야. 하하.
박: 우즈벡 경기 끝나고 기자분들이 이런 질문을 가장 많이 하시더라고. 사우디전에선 왜 그렇게 헤맸냐고.
이: 사실 헤맸다기보단 예측을 못한 이유가 크지. 경기를 하다보면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이 종종 벌어지는데 그 부분을 놓친 것이 형편없는 결과를 낳은 거라고 생각해.
설: 전술적으로 실수한 부분들도 있었지. 변화에 적응을 못하고 수비와 미드필더 사이에 공간을 많이 벌렸고.
▲ 박지성선수와(위), 차두리선수가 지난 3월30일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뛰는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차: 난 사우디전을 비디오로 여러 차례 봤는데 우즈벡전은 확연히 달랐어. 선수들의 의지와 의욕이 차이가 있더라구. 볼을 뺏기면 끝까지 따라가서 볼을 다시 빼앗아오거나 상대의 플레이를 방해하는 수비를 하는 등 악착같은 근성과 집중력이 남달랐어. 수비수들도 절대 뚫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철통수비를 자랑하다가 나중에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만약 우리팀이 0-0 상황에서 먼저 골을 먹었다면 경기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거야.
이: 난 이번에 치른 두 경기를 통해 선수들의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꼈어. 선수 11명이 경기에 나가기 전 자기 스스로에 대한 준비를 충분히 해야만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 같아. 흔히 희생 정신이라고 말하는데 자기 자신만이 아닌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정신이 없인 조직적인 플레이가 나올 수도 없는 것이고.
박: 사우디전 끝나고 본프레레 감독님 경질 문제가 한창 대두됐었잖아. 정말 부담되더라구. 그래서 난 신경쓰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했어. 지금 상황에서 감독이 바뀌고 안 바뀌고의 문제보단 월드컵 본선에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로지 본선 진출만 목표로 두고 이기려고 덤벼드니까 한결 마음이 편하고 게임도 수월하게 풀렸어.
차: 감독 교체 부분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많지. 우리 아버님도 98프랑스월드컵 앞두고 다이너스티컵대회 한·일전에서 패했을 때 감독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의 성화가 대단했었거든.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감독을 교체한다는 건 안된다고 생각해. 같은 축구인들이 좀 더 냉정한 시각을 가졌으면 좋겠어.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비판을 해달라는 거야. 지금 이렇게 말하는 나도 굉장히 신중해야 된다는 걸 알아. 그만큼 축구인이라면 대표팀에 대해, 감독에 대해 책임을 갖고 말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
이: 만약 우리가 월드컵 본선에 못 나가게 됐다고 치자. 과연 누가 가장 손해를 볼까? 바로 선수들이야.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야.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경기에선 드러난 문제점들을 수정 보완해서 더욱 단단한 조직력을 완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우즈벡전이 끝난 뒤 이런 생각이 들더라. ‘사우디 쇼크’가 ‘독약’이 아니라 ‘보약’이었다고.
설: 큰 대회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 수비수들의 실력이 뒤쳐진다고 생각하진 않아. 아직 본선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남은 경기를 통해 경험을 쌓다보면 이전 (홍)명보 형이나 (최)진철이 형, (김)태형이 형이 장막을 두르고 서 있을 때처럼 절로 든든한 마음이 생길 거야.
차: 맞아. 한 번에 모든 걸 이룰 수는 없잖아.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사우디전보단 우즈벡전에선 수비가 훨씬 안정됐거든.
박: 자꾸 사우디전 얘기를 꺼내게 되는데 물론 경기 결과는 대단히 아쉽고 실망스럽지만 앞으로 홈에서 펼쳐지는 사우디전에서 멋지게 복수를 해준다면 ‘쇼크’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지 않을까? 난 선수들을 믿고 싶고 네티즌들도 우리들을 믿어줬음 좋겠어. 근데 두리 형의 폭발적인 스피드는 정말 환상적이야. 형이 앞으로 치고 나가면 관중들이 엄청난 환호성을 보낸다는 거 알고 있어?
차: 고맙지 뭐. 부족한 게 너무 많은 사람인데 사랑으로 봐줘서 정말 고마워. 난 호나우두나 지단처럼 그렇게 대단한 선수는 아니지만 그라운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투지를 불태워 싸운다는 각오로 뛰고 있어. 그런 모습을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
이: 요즘 두리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독일에서 혼자 생활하며 부쩍 성장한 것 같고. 믹스트 존에서 보니까 이젠 인터뷰도 곧잘 하던데?
차: 어휴 말 말아, 형. (인터뷰를 안 하니까 기자들이) 날 많이 미워하시더라구. 서로 미워하면 안 되잖아.
▲ 이영표선수와(위), 설기현선수가 지난 3월30일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뛰는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 지금까지 대표팀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들을 토로했는데 난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분명 한국 선수들은 2002년 월드컵 이후 개인 능력이 월등히 성장했어. 그러나 월드컵 이후 선수들도 바뀌고 감독도 두 차례나 바뀌면서 조직력을 다질 만한 기회가 없었지. 따라서 2002년 월드컵 때처럼 두드려도 두드려도 무너지지 않는 조직력을 갖추려면 대표팀에 ‘특별한 시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한국은 이상하게도 대표팀이 잘 돼야 프로리그가 인기를 끄는 기형적인 형태로 이뤄져 있어. 따라서 프로가 활성화되려면 대표팀이 잘 돼야 하고 대표팀이 잘 되려면 프로팀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뒷받침돼야 해. 그래서 제시한 게 장기 합숙인데, 본선 진출이 확정되면 국내 선수들만이라도 장기 합숙을 통해 조직력을 극대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이야.
차: 나도 할 말이 있어. 언론에서 주전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당연한 거야. 경쟁이 없인 결코 발전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오른쪽 공격수 자리는 절대 밀리고 싶지 않아. 내가 밀릴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밀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 자리는 차두리 자리라는 걸 못 박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하고, 더 좋은 경기를 펼쳐야겠지. 2002년 월드컵 때는 조커로서 만족했는데 독일월드컵에선 당당히 주전으로 베스트 11에 포함될 거야.
박: 와, 다들 각오가 대단하시네.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김)두현이가 벤치 신세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김)남일이 형이나 내 자리를 위협할 만한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하거든. 그런 부분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고 해. 지금 내가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과분한 칭찬을 받고 있어 어쩔 줄 모르겠어. 자만하지 않는 게 가장 큰 과제야. 나한테는.
차: 오늘 나, 정말 말 많이 하네. 한 마디만 더 할게. 벼르고 별러서 출전한 우즈벡전이 끝난 뒤 잠시 허탈감이 들었어. 막상 경기가 끝나니까 난 빈 손으로 서 있더라고. 공격수는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골로 말하는 건데 난 아무 것도 쥔 게 없더라구. 이젠 골도 잘 넣는 공격수가 되고 싶어.
설: 2002년 월드컵 때도 히딩크 감독님이 날 빼지 않고 계속 기용하는 데 대해 말들이 엄청 많았어. 비판도 많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영국으로 옮겨간 이후 축구를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지긴 했는데 아직 보완해야할 부분이 많다는 거 잘 알고 있거든. 팬들이 지금의 플레이가 설기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줬으면 해. 다음 게임에선 지금보단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선보일 테니까.
이: 그래. 지금의 이런 각오로 축구 사랑에 빠진 국민들에게 더 큰 기쁨을 선사하도록 노력하자. 참, 그런데 지성아! 네가 체력의 화신이라면서? 그 비결이 뭐냐?
박: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개구리랑 장어를 많이 먹이셨어. 그땐 키 크라고 먹이신 건데 키보단 체력쪽으로 옮겨갔나봐. 왜? 형도 장어가 필요하슈? 하하.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