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민주 내부는 술렁였다. 정치권의 시선은 곧장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비대위원인 박영선 의원에게로 쏠렸다. 김 대표는 이미 ‘인위적 물갈이’를 앞세워 문재인식 시스템 공천안을 사실상 무력화시킨 장본인이다. ‘비대위 실세’로 불리는 박 의원은 당내 신·구 세력교체의 표상으로 격상했다. 당내 갈등의 뇌관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김 대표의 비례대표 출마설과 박 의원의 수도권 공천권 관여다. 이에 따라 ‘신주류인 종·박의 공습이냐, 구주류인 친노(친노무현계)의 반격이냐’가 더민주 ‘3월 대란설’의 핵심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지난 24일 더불어민주당 홍창선 공천관리위원장이 국회 정론관에서 컷오프 브리핑을 마친 뒤 취재진들에 둘러 쌓여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더민주 ‘3월 대란설’의 신호탄이 감지되자, 당은 하루 종일 물갈이 공포에 시달렸다. 당일 오전부터 돌기 시작한 ‘살생부’는 반나절 만에 여의도 정가를 뒤덮었다. 한마디로 물갈이 공포, 그 자체였다. 5선의 문희상(경기 의정부갑) 의원을 시작으로, 4선의 신계륜(서울 성북을), 3선의 노영민(충북 청주흥덕을) 유인태(서울 도봉을), 초선의 송호창(경기 의왕·과천) 전정희(전북 익산을) 의원 6명과 비례대표 김현 백군기 임수경 홍의락 의원 4명이 낙천됐다. 여기에 불출마자인 문재인 김성곤 최재성 의원 등 3명을 포함하면, 총 13명이 컷오프 대상에 포함된 셈이다.
홍창선 공천관리위원장이 명단을 공개하지 않은 탓에 풍문으로 ‘이석현(경기 안양 동안갑) 은수미(비례대표) 박민수(전북 진안·무주·장수·임실) 의원 등도 떠돌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당으로부터 어떤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제1야당의 공천 발표 과정에서 통보 방식과 시기 등을 놓고 혼선을 빚으면서 ‘아마추어식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희상 신계륜 노영민 유인태 김현 임수경 의원 등은 범친노·주류 그룹으로 분류된다. 수치상으로 60%다. 특히 문 의원은 당내 대표적인 구원투수로, 2012년 대선 패배 직후와 2014년 세월호 특별법 파동 당시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재야 출신인 유인태 의원은 참여정부 때 정무수석을 지냈다. 신계륜 의원은 486(40대·80년대 학번·60년대 생)그룹의 형님 격이고, 노영민 의원은 친노계 좌장인 문재인 의원의 최측근으로 불린다. 김현 임수경 의원은 운동권 그룹이다.
이밖에 송호창 의원은 탈당한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의 측근이다. 백군기 의원은 계파색이 옅고, 홍의락 의원은 고 김근태 전 상임고문의 정파그룹인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출신이다. 백군기 의원이 범친노계와 가깝고 민평련이 그간 정치적 국면마다 구주류와 손을 잡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재인 체제 시절 만든 공천 룰이 자파 소속 의원들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컷오프 대상자 중 유인태 백군기 의원은 “당의 결정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반면, 김현 전정희 의원 등은 이의신청을 제기했고 홍의락 의원은 탈당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하위 20% 컷오프’를 총괄한 조은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장은 “컷오프 이의신청은 통과가 안 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컷오프 칼바람에 범친노계가 줄줄이 나가떨어졌지만, 당 내부에선 묘한 기류가 흘렀다. 당의 핵심인 광주·전남 의원 7명이 1차 물갈이인 컷오프 대상자에서 모두 빠진 것이다. 1차 컷오프 다음날인 25일 더민주는 광주 서을과 북갑에 전략 공천 방침을 정했다. 범친노인 3선의 강기정 의원에게 칼끝이 향한 것이다. 현저히 낮은 당 내부 여론조사가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정장선 총선기획단장은 두 지역을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서을은 더민주에서 경쟁력 있는 후보가 없기 때문”이라며 “북갑은 여러 가지 검토를 했는데 경쟁력이 많이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현재로썬 광주·전남 의원들이 2차 물갈이 대상에 대거 포함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더민주 광주 지역 의원은 강기정 박혜자 2명, 전남 지역은 김성곤 우윤근 신정훈 김영록 이윤석 이개호 의원 6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3선 이상 중진 50%와 초·재선 30%’ 경쟁력을 평가하는 2차 물갈이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중 최대 절반 이상이 교체될 수도 있다.
김종인 대표가 지난 1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김 대표 왼쪽이 박영선 의원.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특히 당 안팎에선 이 지점부터 종·박의 파워 시프트가 본격적으로 가동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대구에 도전장을 낸 홍의락 의원의 탈락에 반발한 김부겸 전 의원(대구 수성갑)은 ‘중대 결심’ 운운하며 사실상 탈당을 시사했다. 종·박 파워 시프트의 여진이 당 내부를 강타한 셈이다.이른바 ‘종·박 발 물갈이 쓰나미’다. 1차 물갈이인 컷오프 때는 김종인 대표가 깊숙이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문 의원이 대표 시절 공천 혁신안에 의해 나온 결과물인 데다, 김 대표가 실권을 쥐기 전 어느 정도 채점을 마쳤기 때문이다.
비주류 한 관계자는 “컷오프는 김 대표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고 전했다. 역으로 ‘김종인 작품’이 나올 타이밍이 됐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민주 청년위 관계자는 “당 내부에서 종·박 칼바람에 친노 대학살이 현실화될 것이란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범주류 한 관계자는 “김종인 공포정치가 시작될 것”이라고까지 예상했다.
더민주의 공천 과정이 ‘20% 컷오프→경쟁력평가→윤리심사’로 이어지는 3단계 심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컷오프는 공천 물갈이의 서막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더민주는 현역 의원 108명 중 문 의원 등 8명을 제외한 100명이 공천을 신청했다. 1차 컷오프에서 탈락한 10명을 제외하면 3선 중진은 23명, 초·재선은 67명이다.
최대 3선 이상에서 11명, 초·재선에서 20명이 공천 배제 대상자다. 86그룹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당 공천 혁신은 호남 물갈이에서 판가름 난다”며 “그중에서 광주·전남이 핵심이다. 우리 당의 호남 지지율이 낮은 상황에서 대폭 물갈이는 불가피한 지점으로, 물갈이가 북상한다면, 어느 지역도 장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경우 신·구 세력의 대치전선이 당을 뒤덮는다는 점이다. 종·박 라인에다가 홍창선 공천관리위원장이 가세한 ‘트리플 콤비’가 공천 칼자루에 강한 드라이브를 건다면, 양측 간 정면충돌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김종인 대표는 공천과 관련, “홍창선 공천관리위원장한테 위임했다”며 선을 긋지만, 당 내부에선 지역구와 비례대표 공천심사를 통합한 것을 놓고 ‘김심(김종인 대표 의중)이 작용했다’는 의구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
공천관리위가 중진급 인사의 본선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여론조사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흉흉한 말까지 돌고 있다. 국민의당 한 관계자는 “종·박의 세력교체 승부수가 시작될 것”이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기도 했다. 김종인 비대위가 문 의원의 시스템 공천이 아닌 대폭 물갈이를 골자로 하는 인위적 공천을 천명한 상황에서 구주류인 범친노와 86그룹이 대거 낙천될 수 있다는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지점이다.
이미 컷오프 풍문 당시 오영식(서울 강북갑) 정청래 의원(서울 마포을) 등의 실명이 떠돈 바 있다. 더구나 ‘3선 이상 중진 50%와 초·재선 30%’ 상대로 경쟁력은 ‘가부 투표’, 즉 사실상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찬반 투표다. 2차 물갈이를 통과하더라도, 단수 공천이 아닌 지역의 경우 경선(과반 득표 실패 시 결선투표 실시)까지 해야 한다. 중진급 범친노계가 그야말로 ‘풍찬노숙’ 신세로 전락한 모양새다.
운동권 그룹 한 관계자는 “공천에 대해 공개된 정보가 없다”며 “완전히 깜깜이 공천”이라고 비판했다. ‘김종인 비례대표-박영선 수도권 연합 공천권’을 고리로 한 신주류의 3월 벼랑 끝 승부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다. 박 의원은 지난 22일 서울 양천을에 출마한 김낙순 예비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해 “2012년 민주통합당의 공천은 공정하지 못했다”며 “민주통합당 오만했다. 이번 총선은 공정 룰로 이뤄져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박 의원은 ‘한명숙 체제’ 당시 민주통합당의 최고위원을 맡았다. 당시 박 의원은 자신이 물밑에서 밀었던 유재만 변호사와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 등이 배제되자, 최고위원직을 전격 사퇴한 바 있다. 당 안팎에선 박 의원의 이 같은 발언을 놓고 포스트 문재인을 향한 야욕을 드러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종·박 라인의 공천 역시 ‘사천’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향후 구주류와 신주류의 명분과 실리를 둘러싼 지략 대결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승자독식’ 게임인 살생부 3월 대란의 판도라 상자는 곧 터진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