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던 조진호였지만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진한 후회와 답답함을 토해냈다. “제가 할줄 아는 건 야구밖에 없어요.” 그 말 한마디가 바로 조진호의 갈길이 아닐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취중토크’를 해놓고 기사 쓰기 전 이번처럼 고민을 많이 한 적도 없는 것 같다. 처음엔 인터뷰를 정중히 사양했고 좀 더 좋은 모습이 됐을 때 나타나고 싶다는 그를 조르고 졸라서 어렵게 인터뷰는 했지만 이 기사를 쓰는 게 그한테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를 판단하지 못하겠다.
조진호 선수(30)를 만났다. 병역비리 문제로 8개월간의 실형을 살고 나온 그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고, 행동도 최대한 조심하려고 애썼다. 이전 구치소 복역 중일 때 잠깐 면회를 갔던 인연을 들먹이며 접근(?)하는 기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도 공식적인 인터뷰는 하고 싶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 ‘인터뷰 없이 밥이나 먹자’는 약속을 하고 조진호의 인천 집 부근으로 찾아갔다.
소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가 구치소 생활 부분은 빼고 조진호의 야구 인생을 듣는 걸로 합의(?)를 본 후 인터뷰답지 않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술에 취하고 사람에 취한 ‘취중토크’였다. 녹음기가 없었다면 ‘필름’이 끊겨서 기사화하기도 어려웠을 정도였다.
어느 술자리보다 이번엔 기자의 감정선이 폭발했다. 사연 많은 남자 앞에서 그 많은 사연들을 듣다가 그냥 ‘고꾸라졌다’. 얘기를 듣고 겉으로 웃고 속으로 울면서 취기가 마비된 듯 술병은 계속 쌓여만 갔다. 그런 가운데 조진호는 어린 시절 얘기부터 꺼냈다.
“제가 처음에 배드민턴을 했다는 거 아세요?”
몰랐다. 조진호가 배드민턴을 먼저 시작했는지는.
“전주 진북초등학교 3학년 때 배드민턴팀이 창단됐어요. 선수를 뽑는데 각 반에서 덩치 큰 애들을 한두 명씩 뽑아갔죠. 그때 제가 뽑혔고 다양한 체력 테스트를 거쳐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당장 내일부터 배드민턴 채를 갖고 오라고 하시더라구요. 난 집에 당연히 배드민턴 채가 있는 줄 알았어요. 없더라구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부모님께 배드민턴 채 사달라는 말을 못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결국 조진호는 배드민턴부 친구들의 강권에 못 이겨 배드민턴 채를 잡기 시작한다. 5학년에 올라가선 배드민턴 대표선수로 유명한 김동문, 하태권과 같은 반을 이뤄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늦게 시작했지만 실력은 월등했다. 후배들을 다 제치고 동기들과 맞대결을 펼치는데 거기서 조진호는 배드민턴의 한계를 느꼈다.
“우리 동기 중에 제일 잘 하는 애랑 붙었는데 1점도 못 올리고 영패를 했어요. 심하게 충격 먹었죠. 그래서 그만뒀어요. 저랑 안 맞는 거 같아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야구부 친구가 또 꼬시더라구요. 같이 야구하자면서. 야구부 감독님이 먼저 ‘콜’ 했어요. 그분 앞에서 캐치볼 몇 번 했더니 당장 들어오라고 하셨는데 전 좀 생각이 많았어요. 나중엔 감독님 전화 공세에 못 이겨 야구부에 들어갔죠. 그때 제가 감독님께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감독님 이거 시작하면 평생을 야구선수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평생을 야구선수로 살기 위해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뛰었는데 조진호의 현실은 지금 야구장 밖에 머물러 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주잔을 부딪혔다. 조진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또다시 그 ‘감정선’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거푸 ‘원샷’을 했다.
전라중학교에 입학 후 조진호는 타자에서 투수로 전업을 한다. 그런데 감독이 조진호에게 사이드 암 투수가 되길 원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감독의 지시대로 옆으로 던지는 투구폼을 연습했고 그러다 아리랑볼까지 던지게 됐다.
“전라북도 리그전에서 전주 동중이랑 붙었어요. 2학년 때였죠. 감독님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친구가 선발 등판했는데 이건 1회가 끝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계속 안타 맞고 포볼 내주고…. 팀에 투수가 걔랑 나랑 달랑 둘뿐이라 감독님으로선 절 부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가 투수로서 본게임 마운드에 선 데뷔전이었어요. 감격시대나 다름없었죠.”
학창시절의 조진호를 얘기하는 성인 조진호의 얼굴이 활짝 갠다. 지난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야구에 막 재미를 느껴가는 조진호가 있었고, 야구를 사랑하는 조진호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가 입학한 전주고는 군산상고의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군산상고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3학년 초 대통령배대회의 지역 예선에서 처음으로 군산상고를 이기고 본선 무대에 진출했다. 조진호로선 본선 진출보다도 군산상고를 이겼다는 사실에 마음이 달떴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질 않았다. 1차전 상대로 인천고를 만났는데 2-1로 이기고 있다가 9회에서 역전홈런을 맞았다.
“당시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그러더라구요. 당시 인천고 역전홈런의 주인공이 박진만(삼성)이었다고. 묘한 인연이죠. 하하.”
이번엔 ‘원샷’ 후 술잔을 털기로 했다. 조진호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여자친구, 그리고 사진기자, 취재기자 넷이서 소주잔이 비어 있는 걸 견디질 못했다. 밖에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건배하는 소주잔으로 장단을 맞추며 한 야구선수의 압축된 라이프 스토리를 듣는 맛은 변함없는 삼겹살의 맛, 그 이상의 매력을 안겨 주었다.
▲ SK 와이번즈 시절의 조진호. | ||
“(김)선우와 (서)재응이가 미국 메이저리그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많이 힘들었어요. 솔직히 배도 아팠구요. ‘그 친구들은 되고 내가 안 되는 이유가 뭘까’를 고민했죠. 그래서 미국으로 테스트 받으러 갔어요. 뉴욕 양키스였죠. 그런데 계약하는 과정에서 에이전트와 저랑 손발이 안 맞아 양키스행이 흐지부지되고 말았어요. 보스턴은 그 다음에 나선 팀인데 아주 적극적이었고 성의를 보였죠. 서울로 직접 절 보러 나왔어요. 보스턴 관계자들 앞에서 한 30개 정도 볼을 던지니까 그만하라고 하더라구요.”
조진호는 그날 밤 돼지꿈을 꿨다고 한다. 방에서 자신이 돼지 한 마리를 안고 나오는 꿈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아침 보스턴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계약하자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셨어요. 돈도 필요했고.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검토하고, 밀고 당기고 할 만한 여유가 없었죠. 당장 야구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바로 사인을 했어요. 근데 이거 많이 취하네. 혀가 막 꼬이는데요. 오늘 완전히 당하는 기분이 들어요. 하하.”
조진호만 당한 게 아니다. 기자도 조진호랑 보조 맞추다 기절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진짜 기절하기 전에 조진호의 보스턴 생활을 더 들어야 했다.
“죽기살기로 야구를 했어요. 야구 외엔 아는 것도 없었고. 지금은 은퇴한 (이)상훈이 형이랑 방을 같이 썼는데 그 형은 야구에 대한 열정이 있었어요. 저도 물론 열정은 있었지만 상훈이 형과는 색깔이 좀 달랐죠. 한번은 LA에서 (박)찬호형과 선우랑 같이 만난 적이 있었어요. 저녁을 먹고 선우랑 전 술 한 잔이 자연스러웠는데 찬호형은 노래방을 가자고 하더라구요. 그날이 찬호형 게임에서 진 날이었거든요. 우린 게임에서 지면 대부분 술부터 찾아요. 그런데 찬호형은 노래방에서 그 스트레스를 풀더라구요. 찬호형은 자신만의 스트레스 푸는 노하우를 갖고 있었고 전 그걸 몰랐던 거죠.”
조진호는 이렇게 되뇌인다. ‘난 그때 군대도 안 되지, 야구도 안 되지, 말도 안 되지. 그러니까 자꾸 술에 손이 가더라구.’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냐고 물었다. 조진호는 98년 보스턴 입단할 당시라고 회상했다. 다시 시작한다면 모든 거 다 잊고 야구에만 전념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2002년 SK와 계약하며 한국으로 U턴한 조진호는 결코 평탄치 않은 한국 프로야구 생활을 시작했다. 국내 복귀 첫 해부터 코칭스태프와의 갈등으로 2군에 내려가는 수모를 겪는 등 차마 말로 다 표현 못할 가슴앓이를 겪어야 했다. 미국에서 프로 생활을 먼저 시작한 조진호가 겪는 한·미야구의 문화적인 차이가 조진호를 자꾸 작게 만들었다.
“그때 얘긴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할 말도 없고. 결국은 군대 얘기가 또 나와야 하니까.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정말,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요.”
충분히 이해했다. 조진호의 입을 통해 병역 비리와 관련된 해명이라든가, 8개월간의 감옥살이 등의 구구절절함 등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힘든 곳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나왔지만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조진호는 술을 마시면서도 인터뷰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얼마전 병무청에서 재검을 받은 조진호는 공익근무요원으로 판정을 받아 다시 사회와 동떨어진 생활을 해야 한다.
“요즘 참 그래요.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하는데 자꾸 나약해져요. 최근 소식 중 절 가장 기쁘게 했던 게 조성민이 해설을 그만두고 야구선수로 다시 복귀했다는 내용이었어요. 갈 길을 가야죠. 자기 갈 길을. 저도 제 길을 가야하고.”
조진호는 반드시 재기해서 마운드에 다시 서고 싶다는 의지를 다졌다. 한국에서 좋은 투구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냥 주저앉기가 너무 억울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조진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여자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야구 중계를 안 보려고 해요. 어쩌다 보게 되면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힘들어 해요. 그러면서 ‘아, 나도 야구하고 싶다’라고 말해요.”
이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갑자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조진호 선수가 이 말을 잊지 않았음 좋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