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우 대한변협 회장. 일요신문DB
대한변호사협회가 김정훈 새누리당 의원 앞으로 보낸 테러방지법 관련 검토 의견서에 담긴 내용이다. 대한변협은 법안 주요 내용에 대해 ‘전부 찬성’ 의견을 내놨다. 특히 대한변협은 필리버스터의 가장 주된 배경이기도 한, 국가정보원장에게 테러위험인물 등의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법안 제9조에 대해서 “국가정보원이 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테러 위협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과 정보 취합의 필요성 등을 고려할 때 국정원장에게 부여한 권한들이 과도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고 찬성 의견을 분명히 했다.
대한변협은 보통의 이익단체와 다르다. 모든 변호사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정식으로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은 법정단체다. 자체적으로 변호사에 대한 징계를 내릴 수 있는, 막강한 힘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성급하게 여권의 손을 들어줬다. 전부 찬성 의견으로 가득 찬 의견서는 7장에 불과했다. 당연히 대한변협의 의견서가 부실하다는 반발이 거셌다.
하창우 대한변협 회장이 당선된 뒤 이처럼 거센 반발은 처음이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한국법조인협회 등 변호사단체들은 “대한변협이 어설프게 찬성 의견서를 급조했다”며 규탄 성명을 냈다.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변호사 사명’을 위해 일하는 공익인권변호사 52명 역시 공동성명을 냈다. 각기 다른 변호사 단체였지만 요구하는 내용은 비슷했다. 대한변협 ‘명의’ 의견서가 대한변협 공식 입장이 아님을 확인해 줄 것, 의견서가 특정 정당에 전달된 경위를 소상히 밝힐 것, 그리고 하창우 회장 등 집행부의 공개 사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논란이 불거지자 대한변협 측은 “법률안에 대해서는 상시 모니터링을 하고 있으며, 필요한 경우 의견을 제시한다. 이번 의견서도 2월 23일 대한변협이 내부 협의를 거쳐 의견을 도출한 후 24일 국회의장에게 전달하게 된 것”이라며 “지난 25일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이 자신에게도 보내달라고 해 대한변협이 별도로 전달해 준 것일 뿐, 새누리당의 요청을 받고 의견서를 작성하게 된 것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대한변협 내부 관계자는 “사실 하창우 회장이 그런 의견을, 대한변협의 이름으로 낼 줄 아무도 몰랐다”고 말했다. 의견수렴이 미흡했다는 얘기다.
평소 대법관, 헌법 재판관 등 고위직의 전관예우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하창우 대한변협 회장이었지만 회원들의 비판에는 고개를 숙였다. 하 회장은 지난 29일 ‘2016년 대한변호사협회 정기총회’에 참석해 “전부 찬성 의견을 낸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공식 사과했다. 재발 방지도 약속했다. 그는 “대한변협 회칙과 규정을 떠나 회원들의 중지를 모으지 못한 점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 앞으로 절차와 방식에 신중을 기울여 심려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며 “인권옹호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변호사 정신을 되새겨 국민 앞에 겸허히 고개 숙이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그를 바라보는 법조계 시각은 여전히 곱지 않다. 하 회장은 평소 자신의 소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며 논란을 몰고 다녔기 때문. 법조계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번 일뿐만이 아니다. 특히 사시 존치를 앞세워 당선된 하 회장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불쾌해 할 만한 정책과 발언을 일삼았다. ‘정치적 행보’ 역시 구설에 올랐다. 하 회장은 최근 총선 출마를 선언한 법조인들에 대해 “법조인들의 입법기관인 국회에 가는 것을 지지한다”는 보도자료를 냈고, 몇몇 후보 사무실엔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던 한 중견 법조인은 “하 회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른 것 아니겠느냐”며 이렇게 말했다.
필리버스터를 직접 보려는 시민들의 방청 열기가 대단했다. 3월 1일 안민석 의원의 필리버스터 현장 모습으로 텅 빈 국회의원 자리와 꽉 찬 방청석이 대조적이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사실 하 회장의 움직임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죠. 검사 평가제를 도입하지 않나, 국회의원 평가제를 도입하지 않나, 대한변협이 왜 그런 것까지 해야 하느냐는 생각을 하는 법조인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동안에는 그냥 내키지 않았던 정도였기 때문에 신중한 법조인들이 잠자코 있었지만 이렇게 문제가 표면화 됐으니 다들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 회장이 정치를 할 역량이 있는지는, 이번 논란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면 알겠죠.”
하 회장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층 변호사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인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 하 회장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 전관 출신 변호사는 “대한변협 회장 선거 당시 막판까지 당선이 불확실했던 하 회장이 몇몇 오피니언리더급 젊은 변호사들과 손을 잡으면서 당선될 수 있었다”며 “그런데 그들이 과연 또 하 회장을 밀어주겠나. 앞으로 하 회장이 하기에 달렸지만 전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한편 하창우 회장은 지난 29일 테러방지법 찬성 의견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도 자신이 원한 것은 확실하게 받아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한동안 대한변협 회장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한 회칙 개정안을 60%가 넘는 지지 속에 통과시킨 것.
이번 개정안에는 ‘선거일을 기준으로 5년 이상 변호사의 직에 있던 사람으로서 통산 15년 이상 법조경력이 없으면 협회장이 될 수 없다’는 회칙이 신설돼, 법무부 장관의 인가를 남겨두고 있다. 대한변협 측은 개정안에 대해 “경험과 연륜이 많은 사람이 이끌어 가는 게 필요하고, 선거 과열을 막겠다는 뜻에서 회칙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사실상 개정안이 로스쿨 출신의 대한변협 회장 선거 출마를 막기 때문. 현행 회칙 상으로는 협회장 선거 후보자에 대한 법조경력 제한이 없었는데 개정안이 통과되면 사실상 10년 동안 로스쿨 출신 변호사는 회장 선거에 나설 수 없다.
일각에서는 재선을 염두에 둔 하창우 회장의 사전작업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사시 존치를 지지하며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을 적으로 돌린 하창우 회장이 자신의 대항마로 로스쿨 출신 변호사가 나올 것을 사전에 제한하기 위한 안이라는 게 그 주장이다. 만일 피선거권이 유지됐다면 로스쿨 변호사가 출마한 뒤 선거과정에서 후보단일화 등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이 가능하다.
법무부의 한 관계자는 “연수원과 로스쿨로 양분돼 있는 법조계 구도에서 향후 2~3년 내에 로스쿨 출신 변호사가 더 많아지지 않느냐”며 “10년 이상 변호사 업계 내 주도권을 로스쿨 출신들이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대한변협이 추진한 것 같다”며 기득권 싸움의 맥락으로 상황을 풀이했다.
남윤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