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8일 어버이의 날을 맞아 이낙연 전남지사(오른쪽)가 장성군 진원면 소재 한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재식 전 전남지사를 만났을 당시 모습.
김 전 지사가 가족들마저 서울에 남겨두고 혈혈단신 고향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으로 낙향한 시점은 지난 1992년 4월. UR(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국내 쌀 산업이 벼랑 끝에 내몰리던 때였다.
그는 2007년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30년 이상 공직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을 그냥 썩히기가 아까웠지. 볼런티어(자원봉사자)의 자세로 농민들에게 그동안 체득한 지식과 정보를 아낌없이 나눠주고 싶었다”며 귀향 배경을 밝혔다. 지역민들 성원 덕분에 공직생활을 무사히 마쳤으니 여생은 봉사를 하며 빚을 갚겠다는 각오였다.
70세 고령에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온 김 전 지사는 귀향 직후 위기에 처한 쌀 산업을 살리기 위해 교육을 통한 ‘농맹(農盲)퇴치’에 힘썼다. 그는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의 호를 딴 ‘노농(老農) 공부방’을 열어 농민들에게 품질 좋은 쌀 생산을 강조했다.
또한 장성군을 비롯해 전남지역 7000여 명의 농민들에게 선진 쌀 농사기법을 전수하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쌀 전업농 50여 명이 참여하는 ‘쌀농사공부회’도 이끌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쌀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벼 품종개량과 신품종 쌀 개발에 힘썼다. 일본에서 국가와 지방정부가 장려품종으로 정한 품질 좋은 쌀의 ‘씨나락’을 구해오기 시작한 것도 한 방편이었다. 1944년 일본 척식대학을 졸업한 학연을 통해 일본 종자를 들여와 전남의 기후와 풍토에 맞게 개량했다.
하지만 볍씨를 구해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엔 일본 학교에 다닐 때 사귀었던 지인들에게 부탁해 사오거나 직접 가서 몰래 낱알을 몇 개 훑어놓는 식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현대판 문익점’이었던 셈이다. 김 전 지사는 지난 2002년 들여온 ‘희망’ 종자 때문에 벌금을 물기까지 했다.
사실 식량문제는 전남지사 시절부터 고민해온 그의 평생 과제였다. 1969년 10월 지사로 부임하면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남의 곡식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만큼 식량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라”는 특명을 받기도 했다. 전남도정 최고 목표도 ‘식량증산의 극대화’였다. 전남은 당시 전국 식량의 26%인 1000만여 섬을 생산했다.
하지만 쌀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대신 보리에 주목했다. 김 전 지사는 ‘보리 100만 섬 더 내기 운동’을 추진했다. 식용호박과 사료용 호박씨를 일본에서 가져와 공한지에 심도록 하고 밤나무로 소득을 올려보자는 ‘곡수촌 조성’도 함께 시도했다.
1971년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계기가 됐던 다수확 품종 ‘통일벼’가 개발됐을 당시 에피소드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전국 도지사 회의에서 다른 지역 지사들이 “알이 쉽게 떨어지고 기온이 높아지면 고사한다는 풍문 때문에 농민들이 심기를 주저한다”고 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김 전 지사에게 의견을 구했다. 이에 그는 다른 지역 지사들을 벼알이 주렁주렁 열린 함평 학다리평야로 데려가 성공에 대한 확신을 심어줬다.
이런 인연으로 김 전 지사는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수차례 인사에도 교체되지 않아 관선 최장수 도백의 기록을 갖고 있다. 육군 대령 예편 출신답게 ‘지사는 야전군 사령관’이라는 신조 아래 시도 때도 없이 헬기를 타고 공중시찰을 하거나 지프로 비포장 먼지 길을 달리는 ‘현장 행정’을 펼쳤다. 또한 매일 새벽 5시께면 어김없이 KBS라디오에 출연해 해박한 지식으로 농사정보를 전해주고 직접 농민들과의 상담에도 응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발탁돼 40대에 수산청장, 전남지사 등을 지내며 관료로 승승장구한 삶을 살다가 고향인 장성·함평에서 제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6년 수산청 차장에서 2년 만인 1968년 수산청장, 다시 1년여 만인 1969년 10월 46세의 나이에 전남지사에 부임한 뒤 1973년 9월 26일까지 관선 지사로는 최장수인 4년을 재직했다.
그는 말년을 신품종 벼를 개발하고 농협 공동재배를 통해 일반 쌀보다 절반 이상 높은 가격에 출하하는 등 쌀농사의 첨병으로 보냈다. 2000년대부터 친환경 벼농사를 주창하기도 했다. 전국 최우수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해남의 ‘한눈에 반한 쌀’과 장성의 ‘자운영쌀’, 함평의 ‘나비쌀’ 등이 모두 김 전 지사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2001년에는 장성에 쌀농사의 공부방으로 알려진 ‘쌀의 집’을 열기도 했다.
김 전 지사가 자신의 집 옆에 직접 지은 ‘쌀의 집’은 거처이자 ‘쌀농사 공부방’이었다. 그동안 개발한 슈퍼쌀 ‘천명’ ‘희망’ ‘수복’ 등 32종의 벼와 종자를 비롯해 일본과 국내 쌀농사 관련서적 200여 권이 전시돼 있다. 각 종자의 계통도와 재배기법, 특성, 밥맛 등을 자세히 기록한 안내판도 설치돼 있다.
김 전 지사는 2010년부터 몸이 많이 불편해지자 요양원에서 머물러왔다. 이에 2013년에는 40년간 농협인생을 마감하고 퇴직한 김수공 전 농협경제 대표이사에게 ‘쌀의 집’ 운영을 맡겼다. 지난해 5월에는 ‘도민과의 대화’ 행사를 위해 장성을 방문한 이낙연 전남지사와 요양원에서 만나 친환경농업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슬레이트를 얹은 집 지붕이 오래돼 비가 샐 정도로 청렴하게 살아온 김 전 지사는 30여 년 전인 1994년에 시신 기증을 서약했다. 장기기증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던 때에 장성군민과 농민들을 위해 써달라는 당부와 함께 시신을 기증한 것이다.
“1987년이던가. 신문을 보는데 대학병원에서 시신 기증자가 없어 학생들이 해부학 실습을 못한다는 거야. 가슴이 아팠지. 그래서 결심을 한거야. 내 몸을 내놓기로.” (광주일보 인터뷰)
김 전 지사는 신문을 덮고 곧바로 전남대 총장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답변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전남대병원엔 그 같은 시설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7년 뒤인 1994년 또 다시 똑같은 뉴스를 접했다. 김 전 지사는 총장에게 다시 전화했다. 총장은 강정채(전 전남대 총장) 박사를 보냈고 그에게 시신기증을 약속했다.
그의 소원은 ‘농사 짓다가 논에서 죽는 것’이었다. 장성군민과 농민들을 위해 써달라는 당부와 함께. 뒷산에는 이미 묏자리를 마련해 놓았고 묘비에는 이렇게 새겼다. “농민의 행복을 찾아서 말년을 헤매다가 아쉬움만 남기고 이 자리에 누워서도 농민의 행복과 풍년을 기원하노라.”
정성환 기자 ilyo6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