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길 국민의당 상임 공동선거대책위원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통합파와 독자파가 맞붙은 국민의당 내부 권력 축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애초 안철수계와 일부 계파를 뺀 나머지 제 세력은 ‘호남 경쟁-수도권 연대’ 쪽에 섰다. ‘명분론’의 독자세력화보다는 ‘현실론’의 제한적 연대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국민의당이 공천권을 둘러싼 내부 알력설에 휩싸인 사이,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허를 찔렀다. 지난 3일 국민의당에 야권통합을 승부수로 던진 것이다.
그러자 김한길 위원장은 “뜨거운 토론이 필요한 때”라며 야권연대론의 불씨를 댕겼다. 내부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종인 대표의 통합론이 ‘안철수 배제·선별 복당론’을 골자로 하는 안으로 받아들여지자, 국민의당 내부 기류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허를 찔린 국민의당 내분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분수령은 지난 4일 국민의당 의원총회. 개인적 일정으로 불참한 박지원·황주홍 의원을 제외한 16명의 의원들이 2시간 동안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안 대표를 중심으로 한 안철수계와 호남 의원들, 김영환·문병호 등 수도권 의원들은 ‘독자노선’을 고리로 김 위원장 등을 압박했다.
안 대표는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다”며 ‘강철수(강한 안철수)’ 면모를 드러냈다. 더 이상의 ‘철수’는 없다는 점을 못 박은 것이다. 호남파도 “더민주와 묻지마 식 연대는 없다”고 가세했다. 당 내부에선 ‘안철수계의 여집합’인 김종인 발 통합 구상에 끌려갈 수 없다는 기류가 강했다. 일각에선 ‘김종인 칼춤’에 국민의당이 녹다운됐다는 비관론까지 나왔다.
김한길 위원장과 천정배 상임대표는 고립됐다. 더구나 통합파인 이들은 이 과정에서 엇박자를 내면서 안철수계를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앞서 천 의원이 ‘호남 경쟁-수도권 연대’ 구상을 피력했을 당시에는 김 위원장이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고, 김종인 대표가 야권통합을 제안했을 초기에는 천 대표가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천 대표는 지난 7일 선대위 회의 직후엔 ‘중대 결심’ 운운하면서 강경한 의지를 측근들에게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정배계 일부 원외 예비후보들은 탈당까지 검토하는 등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파 두 축인 김 위원장과 천 대표의 ‘동상이몽’으로 통합파는 시너지 효과는커녕 스스로 힘을 빼는 하수 전략을 선보였다. 초반 판세는 안철수계의 판정승. 안 대표는 의총 직후 “더 이상 통합에 대한 논의는 불가하다고 모두 결론을 내렸다”며 김 위원장 등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고개 숙인 김 위원장은 “이 토론은 오늘로 끝”이라며 수습 가능성을 내비쳤다.
불과 사흘 뒤인 7일 김 위원장은 선거대책회의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당이 개헌선을 넘어설 때 이 나라와 국민이 감당해야 할 끔찍한 상황”이라며 안 대표에 반기를 들었다. 천 대표도 “개헌 저지선을 내주면 우리 당이 설령 80~90석을 가져도 나라의 재앙”이라고 동조했다. 그래도 안 대표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때 공동 창업주였던 안 대표와 김 위원장이 공개 석상에서 충돌, 사실상 결별의 복선을 깐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파장이 일자 김 위원장은 다음날인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김종인 발 통합 제의에 대해 “패권주의 청산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일이 선행돼야 야권의 개헌선 저지를 위한 뜨거운 토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며 속도조절론을 폈다. 다만 여전히 야권연대의 불씨는 남겨 놨다. ‘김한길 발 총선 플랜’의 제2라운드 판을 깐 셈이다.
문제는 동력이다. 현재 김 위원장은 고립된 상태다. 그를 둘러싸던 더민주 탈당파들은 현재 독자파 포지션에 있다. 특히 내전 과정에서 호남파 의원들이 독자파에 가세하면서 통합파는 힘을 잃었다. ‘반 새누리-비 더민주’의 안철수계와 ‘호남 기반’의 더민주 탈당파로 분화됐던 계파 구도가 안철수계 쪽으로 쏠린 것이다. 김한길계 내부에서도 비판이 극에 달한 상태다.
국민의당 핵심 관계자는 “야권연대를 주장하는 김 위원장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은 소수”라며 답답해했다. 수도권 의원 측 한 관계자도 “김 위원장이 내전 과정에서 누더기로 전락했다”고 잘라 말했다. 양측 간 갈등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애초부터 뿌리가 달랐다. 독자파는 차기 대권 선점을 위해 호남 기반이 절실했고, 차기 대선후보가 없는 통합파는 인물구도에서 밀렸다. 양측의 결합은 권력탈환에 공통분모를 갖는 이해관계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들이 내전 과정에서 물리적 결합의 한계를 드러낸 결정적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국민의당 안철수(왼쪽), 천정배 공동대표가 지난 2일 박지원 의원(가운데 뒷모습) 사무실을 방문해 박 의원의 말을 듣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국민의당으로선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핵심 지지기반인 호남 유권자들에게는 실망감과 불안감을 안겨줬다. 새정치를 기반으로 한 중도 무당파에게는 낡은 정치의 퇴행적 모습을 보여줬다. ‘반 새누리-비 더민주’ 세력 모두에게 비토당할 위기에 처했다. 통합파의 명분인 ‘통합적 국민저항체제’는 안 대표의 거부로 무력화됐다. 새누리당을 비판적 지지하는 중도 무당파에게 불신을 안겨준 것이다.
통합파의 창당 명분인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 청산도 사실상 빛이 바랬다. 비 더민주를 느슨하게 지지하는 유권자들에 대한 갈라치기 전략도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스텝이 꼬인 국민의당 ‘트로이카 체제’의 아마추어식 리더십이 당 내전을 자초했다는 뼈아픈 지적도 나온다.
그 결과, 김한길식 통합도 안철수식 독자노선도 감동 없는 정치로 전락했다. 호남 지지율 하락으로 궁지에 몰린 국민의당은 지난 9일 마무리한 20대 공천 심사에서 현역 물갈이 비율의 바로미터인 컷오프에서 임내현 의원 단 한 명만을 걸러냈다. 새누리당과 더민주보다 늦은 공천 심사 일정으로, 개혁 공천의 주도권도 실기한 셈이다.
당 내부에선 숙의배심원제를 둘러싸고 각 계파 진영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전정희 의원의 입당 발표를 놓고는 천 대표와 김영환 위원장이 책상까지 내려치면서 설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총체적 난국에 빠진 국민의당의 민낯에 김한길 발 총선 전략이 한몫한 셈이다.
오히려 김 위원장은 자신의 지분을 위해 계파정치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김 위원장의 지지율이 당선권에서 멀어지자, 수도권 연대를 통해 광진갑 수성 전략에 나섰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모욕적인 말”이라며 잘라 말했지만 당 안팎에선 김 위원장이 현실 정치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배수진을 쳤다는 분석에 힘을 싣는다.
김 위원장이 이 과정에서 안철수계에 의해 KO패를 당할 경우 ‘탈당→더민주 복당’ 내지 ‘탈당→제3의 길’ 등을 감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종인 대표는 김 위원장의 복당과 관련해 “온다면 받아야지 어떡하느냐”라고 말했다. 더민주가 향후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의당 갈라치기’ 전략을 꺼낼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한길 발 총선 전략은 잘해야 ‘반쪽 승리’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