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의 막말 녹취록 파문으로 시끄러웠던 9일 오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해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싸워서 쟁취하며 세를 불리는 스타일이 있고, 양보와 희생으로 실리를 챙기는 스타일이 있다면 무대(김무성 대표)는 후자다. 최고권력, 절대권력에게는 맞서지 않겠다는 고집도 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로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공천 과정의 수세 국면이 김 대표에게 유리하게 전환됐다. 청와대 정무특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사석에서 “누님”이라 부른다는 친박계 핵심 재선, 윤상현 의원의 막말이 누군가로부터 녹음돼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예전의 김 대표였다면 윤 의원의 사과를 즉각 받아줬을지도 모른다. 본인은 ‘통큰’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상대방에게는 부채를 지우는 일. 김 대표가 적군을 아군으로 만들거나, 상대의 적대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방법으로 주로 써왔던 전략이다. 김재원 의원 사건이 대표적이다.
김 대표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사전에 입수해 2012년 대선전 유세에 활용했다는 의혹이 일었던 2013년 6월, 김 대표가 본회의장에서 당직자로부터 받은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던 게 카메라에 포착된다. “대표님 발언을 유출한 사람은 김재원, 확인해준 사람은 서병수, 이혜훈이란 말이 돌고 있습니다.”
이후 김 의원은 김 대표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고, 지금까지 김 대표를 직접 겨냥한 발언은 무척 삼가고 있다. 김 의원은 당시 김 대표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저는 요즘 어떻게든 형님 잘 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 중이었는데 이런 소문을 들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그랬던 김 대표가 지금은 윤상현 의원을 쉽게 용서해줄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김재원 의원 사건 당시 김 대표는 잘나갔지만 지금 김 대표는 꼬라지가 우습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번 윤상현 파문을 자신의 기회로 만들어 세력화에 나서야 할 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간의 사정은 이랬다.
새누리당 현역 의원들은 김 대표가 ‘상향식 공천’을 통해 자기들을 지켜줄 줄 알았다. 당원 여론조사와 일반국민 여론조사를 섞은 경선은 현역에게 유리한 제도다. 당원 관리를 꾸준히 해왔던 현역으로선 인지도에서도 도전자를 앞설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번번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100% 여론조사 경선으로 가야 한다. 정치신인들에게 가산점을 줘야 한다”며 상향식 공천에 대항한다. 친박계가 이 위원장을 든든하게 받쳐주면서 ‘백업’에 나섰고, 이 위원장은 김 대표의 저격수를 자처했다.
“오늘까지만 참겠다” “두고 볼 수 없다” 등등 김 대표가 그동안 내놓은 많은 경고장이 공수표였던 까닭도 있지만, 자신들의 정치생명이 걸린 국면에서조차 결사항쟁에 나서지 않는 김 대표에게 현역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희생과 양보로 적을 내 편으로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자기에게 기대를 걸었던 아군을 잃어왔던 셈이다.
정가 한 인사는 “봐라. 윤상현 사태가 터지고 윤 의원을 저격하는 현역들이 없다. 고작 김영우 대변인이 구두논평을 내고 홍문표 제1사무부총장이 ‘정계은퇴하라’고 윽박지른 정도”라고 했다. 또 “자기 편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김 대표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이 9일 오전 김무성 대표실을 찾아 면담을 요청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며 취재진의 질문 세례를 받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김무성 죽여 버리게. 죽여 버려 이 XX. 다 죽여. 그래서 전화했어. 내가 당에서 가장 먼저 그런 XX부터 솎아내라고. 솎아내서 공천에서 떨어뜨려 버려. 응, 응, 응. 오케이. 형님.”
자신의 음성이 녹음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사적인 자리라고 감안해도 윤 의원의 발언 수위는 놀랍다. 그리고 이 발언으로 현재 여권의 권력질서는 재편됐다. 아무리 청와대 정무특보를 지낸 친박계 핵심이라지만 누군가에게 집권여당 대표를 “죽여버려”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윤 의원은 재선의 평의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발언으로 김 대표는 약자의 위치에 서게 됐다.
김 대표 측근들에 따르면, 윤 의원의 즉각적인 사과, 그리고 오전 일찍 김 대표 집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윤 의원의 사과까지 뿌리친 것은 그만큼 김 대표도 여당 내에서 위기이기 때문이다. 이 국면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김 대표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란 얘기다. 친박계는 윤 의원이 취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경제부총리를 지낸 최경환 의원은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취중에 사적인 대화에서 실수로 한 것 아니냐. 더 이상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본인이 충분히 사과했으니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대표가 그렇게 해주면(사과를 받아주면) 큰 지도자가 되지 않겠느냐.”
김 대표의 뜻인지 아닌지 확인할 순 없지만 기회를 잡기 위한 그의 공세는 공천관리위원회 내부에서 시작됐다. 공천관리위에 당연직으로 들어가 있는 황진하 사무총장과 홍문표 제1사무부총장의 공천심의 ‘보이콧’ 선언이다. 그리고 베일에 가려졌던 공관위 내부가 폭로된다.
황 사무총장은 지난 10일 저녁 새누리당사에 있는 기자들을 찾아와 “여러 차례 경고하고 개인적으로 조언하고 공관위원들과 함께 필요성을 강조했음에도 고쳐지지 않는 이한구 위원장의 회의 운영 체제와 방법을 더 이상 지켜보기 어렵다”고 했다. ‘독선적 운영’ ‘최고위 의견 묵살’ 등의 표현을 썼다. 당일 김 대표 지역구(부산 중·영도구)가 경선 확정 대상으로 발표될 예정이었는데 이 위원장이 해당 지역 발표를 임의로 쏙 뺐다고도 했다.
홍 부총장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 위원장 마음대로 회의 시간이 결정되고 회의 내용이 진행되며 번번이 회의가 중단된다는 얘기였다.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으면 회의가 스톱된다는 증언도 있었다. 결국 공천정국의 사령탑과 같았던 공천관리위 자체를 흔든 셈이다. 그리고 이 위원장의 사퇴를 종용하기까지 이른다.
때마침 윤 의원 사건이 터진 다음날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과 이한구 위원장이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극비리에 회동했다는 언론보도까지 나왔다. 만약 사실이라면 청와대가 이 위원장을 통해 공천 정국을 수렴청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안이다. 공세적이었던 이 위원장과 친박계가 수세에 몰리고 있다.
일각에선 친박계 내부에서의 다툼으로도 본다. 박 대통령과 얼마나 가까운지로 친박계의 서열이 매겨졌고 그 정점에 있었던 윤 의원을 흠집 내기 위한 작업이 자파 내부에서 진행돼 온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친박계 내부에서 윤 의원을 향한 불감청고소원(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원래부터 몹시 바란 바)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정가에서는 역대 이런 저질의 공천정국이 진행된 적이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얼마만큼 더 추락할지 지켜볼 일이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