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애틀 지역지인 <시애틀타임즈>는 “아담 린드가 좌투수에게 약하고 시애틀 25인 로스터에 좌타자가 많기 때문에 백업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현재 이대호와 헤수스 몬테로, 스테판 로메로, 가비 산체스가 1루수 백업 자리를 두고 경쟁하지만 이대호와 몬테로가 가장 가능성이 있는 후보 선수”라고 기사화한 적이 있다.
아담 린드는 지난 시즌을 마치고 오프시즌 중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시애틀로 트레이드 된 1루수. 그는 2015 시즌 타율 0.277에 20홈런 87타점으로 활약했지만 좌완투수를 상대로는 단 한 개의 홈런도 때려내지 못했다. 시애틀 구단 입장에선 좌투수에게 약한 린드를 대신해 오른손 1루수 백업 멤버를 찾을 수밖에 없는 실정.
이대호는 시범경기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로 스캇 서비스 감독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이대호가 경기에 계속 출전하면서 말끔히 해소되고 있다. 1루수 수비로 선발 출전이든, 교체 출전이든 이대호는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로 시애틀 스캇 서비스 감독의 눈을 사로잡았다. 감독은 현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대호 수비는 괜찮아 보인다. 3-6-3(1루수-유격수-1루수) 병살 플레이가 가능하고 번트 수비도 된다. 수비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이대호의 별명은 ‘날쌘돌이’ ‘수비요정’이다. 이전의 이대호한테선 찾아볼 수 없는 수식어들이 뒤따른다.
이대호가 처음 스프링캠프에 합류할 때만 해도 스캇 서비스 감독은 이대호한테 수비에 대해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대호의 설명이다.
“감독님이 처음 면담할 때 내게 바라는 건 도루도, 수비도 아닌 방망이라고 말씀하셨다. 번트 사인 같은 거 내지 않을 테니까 방망이에만 집중해달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왠지 오기가 생기더라. 나에 대해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하시니 오히려 ‘잘됐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수비나 발에 문제가 없다는 걸 경기 중에 보여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비에 나갔을 때 굉장히 집중했다. 너무 집중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말이다.”
이대호는 지난 9일 클리블랜드와의 원정 시범경기에선 수비를 하다 다이빙 캐치를 해서 공을 잡은 적이 있었다. 프로 선수가 된 후 시범경기 중 다이빙 캐치를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가 부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에서 몸을 날리는 이유는 딱 한 가지. 25인 로스터에 들기 위함이다.
“어렸을 때 슬라이딩을 잘못하다가 어깨 탈골이 온 후론 몸을 날려서 공을 잡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공 한 번 잡아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내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프로 신인 때 감독님 눈에 들고 싶어서 아침 일찍 출근해 웨이트트레이닝하고 감독님 보시는 데서 방망이 휘두르며 스윙 연습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내가 16년 전 신인으로 돌아간 상황이다. ‘감독님, 저 좀 봐주세요, 저 이렇게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보여주려는 듯 말이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KBO리그 타격 7관왕에다 일본 퍼시픽리그 타점왕, 일본시리즈 MVP였던 그가 모든 걸 내려 놓고 초청 선수 신분이 돼 1루수 백업 멤버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대호는 그래도 즐겁게 야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힘든 건 당연하다. 힘든 길을 택했고, 그 과정을 이행 중인데 힘들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그동안 난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충족시켜주려는 야구를 했다. 이대호니까, 이대호라면 이 정도의 성적을 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기대가 날 짓눌러왔었다. 지금은 그런 기대, 부담이 전혀 없다. 내가 내려놓으니까 팬들도 내려놓은 모양이다. 마치 프로 처음 경험하는 신인처럼,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메이저리그 정글에 뛰어 들어가서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내가 가진 게 없고, 이룬 커리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습 자체가 서글프고 참담할 수 있지만, 난 많은 걸 이뤘고 다양한 기록을 쌓으며 야구했다. 그래서 지금의 도전이 전혀 창피하거나 굴욕적이지 않다. 10년 후 내 야구인생을 돌아봤을 때 그래도 참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이대호는 후배들에 대한 걱정과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지난 시즌을 마치고 포스팅시스템에 나섰다가 쓰라림만 맛본 롯데 자이언츠 손아섭, 황재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했다.
“지난 번 프리미어12 대회 때 아섭이랑 재균이를 만나서 이런 말을 했었다. 정말 메이저리그에 가고 싶으면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그리고 에이전트도 능력 있고, 유명한, 파워가 있는 에이전트를 구하라고. 한국이란 작은 땅에서 메이저리그 도전을 외쳐봤자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도전을 원한다면 같은 실수 반복하지 말고 준비 잘해서 가라는 내용이었다. 직접 경험해보니 우리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절감했다. 후배들은 그런 실수는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길 바란다.”
이대호는 롯데 자이언트 시절 FA가 됐을 때 해외 진출은 꿈도 꾼 적이 없었다고 한다. 무조건 롯데 잔류를 생각하고 구단과 협상하다가 협상이 결렬되면서 일본 오릭스 측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이 오릭스라는 생각에 롯데를 떠난 것이다.
“한국에는 에이전트 제도가 없다 보니 구단과 FA 협상할 때도 한계가 있었다. 평생 직장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떠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시애틀에 온 것보다 당시 롯데에서 오릭스로 방향을 틀었을 때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내 야구인생의 터닝포인트로 작용했다. 오릭스에서 2년 생활한 뒤, 또다시 나를 더 필요로 하는 소프트뱅크로 옮길 수 있었고, 정규시즌 우승, 시리즈 우승 등을 다 경험해본 뒤에 미국 진출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그아웃에서 팀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이대호(왼쪽 두 번째).
이대호는 자신이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플릿계약(마이너리그일 때와 메이저리그일 때의 계약 내용이 다르다) 조건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로 신분 문제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에이전트는 좀 더 좋은 조건을 기다렸지만 비자 문제가 걸려 있다 보니 계속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계약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비자 발급이 늦어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시범경기 출전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계약 조건이 다소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 계약에 사인해야만 했다. 이런 아쉬움은 직접 경기력으로 보여주면서 전환점으로 삼으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대호는 굉장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내보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을 견디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는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하고 날 데려갈 팀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조금씩 삐걱거렸던 부분이 있다. 그런데 너무 탄탄대로만 달리면 인생이 재미없는 것 아닌가. 계약도 막바지에 했고, 비자도 늦게 받았고, 모든 게 힘들게 맞아갔지만 현재 몸 아픈 데 없고, 건강하고, 재미있게 야구하고 있기 때문에 난 정말 행복하다. 딱 한 번 경험할 수 있는,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거면 되는 거 아닌가(웃음)?”
이대호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하면서 옵트아웃 조항을 삽입했다. 즉 25인 로스터에 자신을 올리지 않으면 마이너리그로 내려 보내지 못하고, FA로 풀어줘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이대호는 한국, 일본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메이저리그의 다른 팀과의 계약을 알아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 집을 사두고, 곧 태어날 둘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