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비박 간 대립이 가열되다 결국 지난 8일 윤상현 의원의 ‘막말 녹취록’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터진 전쟁을 본 한 새누리당 관계자의 말이다. 녹취록 공개 이후 새누리당은 초비상이 걸렸다. 김무성 대표를 윤 의원이 직접 “죽여버려”라고 했기 때문이다. 윤 의원의 발언은 김 대표조차 공천에서 탈락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읽혀 비박계의 분노를 샀다. 최근 정두언 의원이 던진 ‘40인 살생부 파문’의 기억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핵탄두가 떨어진 셈이다.
부산에서 올라온 김사모, 한국근우회 영도지회 등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지지자들이 지난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막말 논란을 일으킨 윤상현 의원의 퇴출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그동안 비박계는 친박계가 공천에서 자신들을 학살할 것이라 끊임없이 의심해왔다. 윤상현 의원 사건은 비박계에게 일종의 확신을 던져줬다. 윤 의원이 직접 김무성 대표를 ‘죽인다’고 했고,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내비쳤기 때문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윤 의원이 그런 전화를 한두 번 한 게 아닌 것 같다”며 “중요하고 위험한 이야기가 술 취한 상태로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면 이미 누구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수시로 했다는 것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사태가 터지자마자 윤 의원 전화 상대방이 누구인지 정치권 관계자들의 추적이 시작됐다. 밝혀진다면 상대방의 정치생명도 위험하다. 곧바로 윤 의원의 전화 상대방이 박종희 새누리당 제2사무부총장이라는 ‘찌라시’가 SNS를 타고 퍼져나갔다. 내용은 윤 의원이 ‘인천 맹주’를 노리고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부총장은 “사무실에서 박종희와 통화하는 것을 A 의원 쪽에서 녹음해서 넘김이라고 (찌라시에) 돼 있는데 통화한 사람이 박종희라는 건 어떻게 아나. 이건 의도가 있는 거다”라며 강력 반발했다.
윤 의원이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과 통화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 10일 채널A는 새누리당 이한구 공직자후보추천관리위원회 위원장과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이 극비 회동했다고 보도했다. 윤 의원이 전화한 상대가 현 수석이기 때문에 갑작스런 회동이 성사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국회 주변에서는 윤 의원이 김 대표를 공천 배제시키자고 말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고,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현 수석을 의심하는 시선도 나왔다. 앞서의 회동도 이런 의심을 뒷받침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11일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과 만나 “현 수석에게 물어봤지만 만난 적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당사자인 윤 의원조차 ‘(전화한 상대방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어 상대방 추적은 미궁에 빠졌다.
사실 새누리당은 ‘신호탄’이 필요했을 뿐 갈등과 대립이 무섭게 치닫고 있었다. 지난 2월 말 정두언 의원이 ‘친박 핵심 인사가 김무성 대표에게 40인 물갈이 명단을 전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공천을 앞두고 한층 민감해진 친박, 비박의 1차전이 시작됐다. 발칵 뒤집힌 새누리당은 김 대표가 사과하고 친박도 한발 물러서는 선에서 화해하기로 한다.
이렇게 ‘간’을 봤지만, 내부에서의 압력은 더욱 커져갔다. 친박계는 40인 살생부로 비박계가 학살을 막는 ‘알리바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도권 비박계 의원실 관계자는 “사실 비박계는 40인 명단처럼 서울시당 위원장인 김용태 의원도 낙천 가능성을 생각할 정도로 위기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며 비박계 내부의 고민을 전했다.
서로간의 입장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계파는 총선이 다가오면서 점점 긴장의 수위는 높아져 갔다. 40인 명단에서 윤 의원 막말 전화까지 고작 며칠간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서로간의 견제구는 계속됐다. 공천에 반영될 것으로 알려진 여의도연구원 여론조사 자료가 유출돼 돌아다녔다. 특정 후보 몇을 공천배제시켜야 한다며 명단에 의원 이름과 이유를 상세히 기술한 괴문서도 돌아다녔다. 그러다 윤 의원 막말 전화 사건이 터졌다.
비박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총공세로 태세전환했다. 최소한 윤 의원 한 명은 이번 기회에 날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윤 의원이 갖는 특별한 위치가 있다. 윤 의원은 사실 여느 의원과는 다르다. 그는 사석에서는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과 특별한 친분이 있다.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 최근 윤 의원의 위치를 설명하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지난 2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해 국정연설을 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박 대통령과 악수하기 위해 새누리당 의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들을 외면한 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때 윤 의원이 큰 소리로 “대통령님, 저 여기 있어요”라고 외쳤다. 박 대통령은 윤 의원을 돌아봤고 그때서야 웃었다. 윤 의원이 이례적으로 의원직을 유지하면서 논란 끝에 청와대 정무특보를 맡았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는 관측이 나온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의 특별한 위치뿐만 아니라 역할도 친박계의 ‘전위부대’를 도맡았다. 비박계로부터 욕을 먹을지라도 앞장서 이슈를 던져왔다. 지난해 9월 윤 의원은 “지금 여권의 대선 주자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별로 없다”며 사실상 ‘김무성 불가론’을 언급해 당을 발칵 뒤집어놨다. 지난 11월에는 유승민 의원 부친상 빈소에서 ‘대구 물갈이론’을 주장해 천붕을 겪은 사람에게 할 소리냐는 비판도 받았다. 비박계가 보기에는 ‘눈엣가시’인 셈이다.
친박계 내부에서도 윤 의원을 ‘가지치기’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이 너무 중대해 윤 의원을 살려 가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윤상현을 잘라내자는 의견이 친박계 의원 사이에도 나오고 있다. 말하자면 불출마 선언을 하게 만들자는 것”이라며 “친박계 안에서도 윤 의원이 너무 ‘설쳤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 아니냐는 기류가 보인다”고 전했다. 친박으로 꼽히는 이성헌 의원도 지난 11일 YTN 라디오에 출연해 “윤 의원이 과거 (불출마한) 최연희 의원 사례를 보고 배워야”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의원이 공천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힘이 워낙 강한 데다 윤 의원의 위치가 그만큼 특별하기 때문이다. 더민주 핵심 당직자는 “윤 의원에게 공천을 준다는 것은 전체 선거판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사건이다. 하지만 여당 상황을 봤을 때 윤 의원이 공천을 못 받는 것도 상상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