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년 간의 뉴욕 메츠 생활을 끝내고 최근 LA 다저스로 트레이드된 서재응은 새로운 생활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다만 다저스에서 치러야 할 치열한 선발 경쟁은 걱정이라고.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19일 저녁 미국으로 출국한 서재응(29·LA다저스)을 그날 오후 인천의 처갓집에서 만나 단독 인터뷰를 했다. WBC(세계야구선수권대회) 참가 결정과 LA다저스로의 트레이드 발표 후 매스컴과의 접촉을 정중히 거절했던 서재응은 귀국 후 외부행사를 줄이고 친구들과의 만남조차 줄여가며 훈련에 열중했다고 밝혔다. 그만큼 올 시즌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2004년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출국 전 ‘나이스 가이’ 서재응과의 솔직 담백한 리얼토크를 소개한다.
7개월된 딸 혜린이를 안고 있던 서재응이 딸을 소파에 앉히려고 애쓴다. 가까스로 혜린이를 앉혀두면서 하는 말이 “넘어져도 혼자 일어나야 해. 넌 할 수 있어. 아빠가 안 일으켜 준다!”이다. 아니, 7개월된 아기가 어떻게 혼자 일어날 수 있겠나. 기자가 “아빠 맞냐?”고 묻자, 서재응 왈, “애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혜린이의 불안정한 상태를 짐짓 모른 체하며 지켜본다. 혜린이가 조금(?) 우량아인 데 대해 서재응은 전혀 걱정 없음이다. ‘장군처럼 씩씩하게 커야 한다’는 신념 때문. 서재응의 육아 방식은 ‘딸의 아들화’인 것 같다.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절해 왔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특별한 이유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이번 귀국 때는 모든 걸 자제하고 운동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나한테 올시즌은 정말 중요한 시기다. 그래서 최대한 야구 외의 활동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인터뷰도 그렇다. 말을 백 번 하면 뭐 하나. 행동으로, 성적으로 보여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인터뷰하기가 어려웠다.
―LA 다저스로 트레이드된 것을 언제 알았나. 처음엔 탬파베이행이 거의 확실했는데.
▲에이전트 빅터 리를 통해 올시즌에 트레이드될 것이란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90%는 탬파베이로 간다고 알았다. 그러나 에이전트가 미나야 메츠 단장 말을 빌려 ‘10%는 서부 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더라. 10%라는 수치가 얼마나 가능성 없는 수치인가. 그래서 탬파베이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사실 LA다저스보단 탬파베이가 더 나쁜 조건 아닌가. 팀 성적도 그렇고 타선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부분도 힘들 수 있었다.
▲오히려 내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꾸준히 선발 자리가 보장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나. 특히 뉴욕 양키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그들과 맞장을 뜨며 피칭을 향상시킬 수 있을 거란 자신도 있었다.
―다저스행은 언제 알았나.
▲미나야 단장이 10%의 가능성을 두며 서부지구라고 했을 때는 애리조나인 줄 알았다. 물론 다저스를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애리조나가 더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다저스는 투수진이 두터워 내가 낄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쪽으로 가게 됐다. 탬파베이로 트레이드됐다는 기사가 국내 언론을 통해 쏟아졌을 때(한국시각 1월4일 오후) 다저스로 간다는 걸 알았다.
―트레이드를 통보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LA는 한국 교민들이 많이 있고 한국 선수들과 인연이 있는 팀이라 큰 부담은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또 선발 경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걱정되더라. 스프링캠프부터 힘든 시간이 될 것이다.
―메츠에 대한 서운함은 없었나. 98년 입단 후 7년 만에 트레이드됐는데 그동안 메츠에 있으면서 줄곧 트레이드설에 휘말렸던 장본인 아닌가.
▲그래도 끼워 팔리는 선수가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트레이드가 이뤄졌다는 부분이 기분 좋았다. 몸값이 엄청난 선수와 함께 끼워 팔리는 존재였다면 조금 속상했을 것이다. 난 메츠에서 싱글A부터 시작, 더블A 트리플A를 두루 거쳐 메이저리그에 올랐다. 뉴욕이란 대도시에서 메이저리그로 활동했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메츠는 워낙 트레이드를 통해 선수 장사를 하는 팀이라 나처럼 오래 남아있기가 힘들다. 그런데 내가 7년을 버틴 거 아닌가. 영원히 메츠를 잊지 못할 것이다.
―WBC 참가 여부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처음엔 불참을 발표했다가 결국 참가하는 걸로 번복했는데 그 이유를 직접 듣고 싶다.
▲지난해 시즌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내 입장을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능하다면 대표팀 합류를 사양하고 싶다고 밝힌 것이다. 특히 98방콕아시안게임 참가 이후 99년 팔꿈치 수술을 받았던 과거도 한몫했다. 당시 급하게 몸을 만들려다가 결국 수술이라는 힘든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처음으로 200이닝 이상을 던져봤다. 처음엔 몰랐는데 시즌이 끝나고 나니까 팔이 올라가지 않을 정도로 피로가 쌓여 있더라. 그래서 (대표팀 합류가)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참가하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적어도 16강 이상의 성적을 내려면 개인적인 목표도 중요하지만 국가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일찍 몸을 만든다면, 또 노력한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 아내 이주현씨, 딸 혜린이와 함께 다정한 서재응. | ||
▲그거야말로 ‘소설’이다. 스프링캠프 합류는 감독의 주장이었고 WBC 참가를 허락한 것은 미나야 단장의 결정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LA다저스가 바보도 아니고 WBC 참가를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트레이드와는 관계없이 WBC 문제가 결정됐다. 어떤 네티즌은 내가 메츠 감독한테 전화를 걸어 WBC 참가를 반대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글을 올려놨더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내 미래도 중요하지만 국가를 위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참가를 결정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얼마 전 광주에서 기아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는데 국내 프로야구장에는 처음 가본 거 아닌가. 같이 운동한 소감이 궁금하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과는 처음으로 같이 훈련한 것이라 내심 기대와 호기심이 있었다. 그런데 훈련 전에 동그랗게 모여서 ‘파이팅!’하고 흩어지는데 적응이 안 되더라. 미국에선 각자 나와서 훈련을 하기 때문에 ‘파이팅’이란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래도 서로 잘 알고 말이 통하고 같은 피부색을 갖고 있는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아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덧 한국 나이로 서른살이다.
▲나이 들어가는 걸 실감은 못 하지만 몸 상태는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잔 고장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 먹으니까 조금씩 잔 고장이 생긴다.
―뉴욕 메츠 시절의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을 꼽는다면.
▲처음 메츠 입단 후 마이너리그에서 개막전 선발로 나섰는데 그 해 마이너리그 챔피언시리즈 때 마지막 이닝을 소화하며 우승 반지를 챙겼던 일이 가장 짜릿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 같다. 물론 메이저리그 우승 반지는 아니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이다.
―LA다저스에는 광주일고 후배 최희섭이 있다.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건 잘 모르는 일이다. (최)희섭이가 그 팀에서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서로 상의할 시간은 많아질 것 같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큰 힘이 된다.
―만약 트레이드된다면 옮겨가길 희망했던 팀이 있었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팀이 욕심났다. 처음 메이저리그 무대를 노크하려 했을 때 샌프란시스코팀 경기를 보면서 큰 자극을 받았다. 베리 본즈 때문이다. 그 선수와 한 팀에서 운동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좀 빠른 얘기지만 은퇴 이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봤나.
▲35세 정도 되면 은퇴할 생각이다. (미국 나이로) 서른셋, 넷 정도에 마이너스 옵션으로 1년씩 계약을 맺어 35세 후엔 은퇴하고 싶다. (기자가 이유를 묻자) 난 동양인이고 미국 선수들과 실력과 체력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걸 메이저리그에서 경험했다. 몸 관리 잘해서 오래 오래 선수 생활을 하겠다는 욕심은 버렸다. 내 몸 상태를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
―기회가 되면 미국 활동을 접고 기아에서 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런가.
▲잘 던질 때, 몸 상태 좋을 때 복귀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뭐라고 하는 분들이 계시더라. 한국에서 야구를 잘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후배들에게 그동안 미국에서 배운 걸 온전히 다 가르쳐 주고 싶다. 그렇다고 코치를 원하는 게 절대 아니다. 선수로 뛰면서 팀을 위해 날 죽이고 후배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고려하고 있나.
▲그동안 야구만 하고 살면서 힘들게 보냈는데 야구를 그만두고서 또 다시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평범한 가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야구와는 관계 없는 가장 말이다.
서재응은 은퇴 이후엔 야구공을 만질 생각이 전혀 없음을 거듭 강조했다. 앞으로 남은 5년 정도 야구에 미쳐 살다가 그 이후엔 아들로, 남편으로 그리고 아빠로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밝혔다. 정말 의외였다.
출국 전 어렵게 만든 인터뷰 자리에서 서재응은 진심으로 자신을 내보였다. 혜린이를 가운데 앉히고 아내 이주현씨와 함께 가족 사진을 찍는데 ‘행복’이란 단어가 주위를 맴도는 듯했다. LA다저스 마운드에서 환상의 컨트롤로 상대 타자를 무너뜨리는 서재응의 모습을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