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주 계장의 르포 소설 <잔재>.
금융조합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한 조합장이 검찰에 송치된다. 사건은 조합장이 세관 직원과 공모했는지, 횡령금을 나눴는지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채 송치됐다. 경찰 조사에서는 조합장이 횡령한 돈을 인출해 전액 도박으로 탕진했을 뿐 세관 직원과 공모한 사실도, 돈을 나눈 사실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검찰 수사관이 보기엔 이상했다. 범행을 저지른 후 조합장과 세관 직원의 동선이 상당 부분 일치했다. 수사관은 대질신문을 결심한다. 그런데 대질신문 하루 전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가 검사실에 들어온다. 평소 변호인 선임계를 내지 않고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검사실에 출입하는 전관 변호사다.
변호사는 수사관에게 다가와 마치 현직에 있는 양 하대하며 말한다. “그 사람들 신문하면서 한 쪽 사람이 자백했다고 속이고 다른 한 쪽 사람한테 자백 받으면 안 되네!” 의미심장한 전관 변호사의 청탁성 언급에 수사관은 두 사람이 사건을 공모했음을 확신한다. 이를 검사에게 보고하지만 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말한다. “김 서기 나도 그 진실 밝히고 싶은데 말이야….” 결국 대질신문은 이뤄지지 않았고 검사는 사건을 서둘러 종결, 조합장만 단순 횡령죄로 기소됐다.
저자는 이처럼 여러 사례를 묘사하며 전관예우를 폭로한다. 특히 저자가 지적하는 건 전관 변호사들의 부당한 청탁과 ‘변호인 선임계’ 미제출이다. 실제로 변호인 선임계 미제출의 경우 최근까지도 전관 변호사들이 암암리에 행하는 관행이다. ‘몰래 변론’이 가능하고 은밀하게 검사실을 찾아오거나 전화 청탁을 해도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변호사 보수에 대한 탈세도 가능하다. 대한변협은 지난해 9월, 선임계 미제출 변론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잔재>에서는 전관 변호사들의 더욱 노골적인 수사 개입도 묘사하고 있다. 범인은 저축은행의 한 과장과 짜고 노숙자 명의를 빌려 대출을 받은 후 잠적했다가 검거됐다. 공모 혐의가 사건의 핵심이었다. 우선 범인은 대출 대가로 과장에게 뇌물을 줬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과장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또 다시 대질신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관 변호사가 검사실을 방문해 검사를 만나고 간 후, 검사가 수사관에게 “내일 범인만 먼저 소환해”라며 석연치 않은 지시를 내린다. 대질신문을 해야 한다는 수사관의 의견은 그대로 묵살됐다.
그리고 다음 날, 범인의 소환을 앞두고 전관 변호사가 대뜸 검사실로 불쑥 찾아와 “범인이 과장에게 준 돈 액수를 진술하거든 더 이상 캐지 말고 조서에 받아 적어 달라”고 요청한다. 이미 전관 변호사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범인과 과장을 동시에 접견해 서로 말을 맞춘 후 대놓고 청탁을 한 것이다. 범인은 이후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고 뇌물 액수를 턱없이 낮춰 얘기했다. 사건 진행은 그대로 유야무야됐고 과장은 조기에 석방됐다. 한 달 후 명절을 코앞에 두고 전관 변호사는 옆 검사실을 통해 돈 봉투를 전달한다.
전관 변호사의 개입으로 사건이 ‘재배당’ 되는 경우도 있다. 한 지역 재력가가 경매로 나온 부동산을 낙찰받은 후 권리를 행사하려는 과정에서 입주 상인들과 분쟁이 생겼다. 재력가는 상인들을 강제로 내보내려 건달들을 동원했다가 충돌이 거세졌고 결국 양측간 고소고발로 번졌다.
하지만 검찰로 송치된 사건 내용을 보니 재력가가 고소한 내용이 애매모호했다. 재력가를 소환조사하자 그가 검사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검사님, 잠시 후 제가 잘 아는 분이 오실 겁니다.” 검사는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지금 조사 중인데 누가 온다는 말이오?”라고 되물으니 전관 변호사 이름을 댄다. 잠시 후 방문한 변호사를 검사는 정중히 맞이했고, 변호사는 “억울함이 없게 해 달라”며 사건 청탁성 발언을 한다.
그렇지만 검사는 그대로 조사를 진행했고 재력가의 문제점을 캔다. 사건은 이렇게 최종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결국 사건은 다른 검사실로 재배당돼 검찰과 수사관 모두 허망함을 감추지 못한다.
특이한 케이스도 묘사된다. 기업을 운영하는 지역 유지가 선거철 후보 청탁을 위해 회사 돈으로 자금을 마련, 고위 공직자에게 전달했다가 회사 내부자의 투서로 수사망에 오른다. 지역 유지는 곧바로 고위 전관 출신 변호사를 대거 선임해 전방위 청탁에 들어간다. 수사관은 이 과정에서 다른 선배 수사관에게 “총애하는 분이 무척 마음을 쓰고 있으니 앞으로 진행상황을 나에게 자세히 알려주도록 하게나”라는 부탁도 받는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검사는 우직하게 수사를 진행한다. 자금출처를 파악해 횡령 혐의를 입증해 지역 유지는 구속되고 재판에까지 선다. 하지만 법원에서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한 달 반 만에 석방된다. 알고 보니 지역 유지의 변호사 중 한 명은 재판장과 대학 선후배, 사법고시 동기였으며 수년 전 같은 법원에서 함께 판사생활을 한 사이였다.
1심 재판 이후에도 이례적인 상황이 전개됐다. 수사관은 검사로부터 지역 유지가 선임한 변호인 12명의 명단을 받고 ‘뒷조사’를 하도록 지시 받는다. 알고 보니 지역 유지와 검찰 측이 서로 상소하지 않기로 했는데, 지역 유지 측 변호사 한 명이 약속을 어기고 막판에 상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검찰 윗선에서는 “괘씸하다”는 이유로 지역 유지의 변호사 뒷조사를 지시한 셈이다. 결국 뒷조사 끝에 변호사 상당수가 선임계를 내지 않았고 선임료가 전액 회사자금인 사실을 밝혀내 지역 유지에게 조사를 예고하니 상소는 취하됐다. 수사관은 “조사를 진행하면서 전관 변호사들이 지역 유지에게 달려든 형국이 먹잇감을 보고 서성이는 하이에나 또는 까마귀 떼와 같이 불길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전했다.
물론 책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등은 모두 가명이다. 하지만 갖가지 등장 사건들은 저자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저자는 “수사관들에게 접촉한 이들은 발품을 많이 파는 부장검사급 이하 전관들이었다”며 “이보다 높은 검사장급 이상의 전관은 결재라인에 전화 한 번 하는 것만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수사관이 직접 접촉하지는 못하지만 (개입을) 감지할 때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저자는 2012년 요양병원 관련 비리를 수사하던 중 전관 청탁 의혹을 제기하다 인사조치를 당한 바 있다. 르포 <잔재>는 그때부터 구상됐다. 저자가 책을 냈다는 얘기를 검찰 내부 게시판에 올리자 내부 직원들은 댓글 달기도 무서워했다고 한다.
한편 전관예우는 현재까지도 법조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000년 이후 퇴임한 대법관 38명 가운데 24명이 1년 안에 개업해 전관예우를 부추기거나, 지난해 말에는 변호사 수임계를 내지 않은 전관 변호사들이 대거 적발돼 과태료를 물기도 했다.
저자 최 계장은 “국민을 위한 검찰로 변화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며 “미관말직으로서 작은 발걸음이지만 관심을 주신다면 더 나은 검찰이 되리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