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성은 양.
잠을 자는 것만 같았다. 언제든 눈을 뜨고 엄마와 아빠를 부를 것만 같았다. 인공호흡기에서 피가 역류하고, 검은색 소변이 나오는 장면을 보기 전까지 그랬다. 곁을 지키던 김황수 씨와 박연실 씨는 이날 딸을 떠나보내기로 정했다. 2011년 6월 4일, 뇌사상태에 빠져있던 12세 성은이가 눈을 감았다.
‘특발성 폐동맥고혈압’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던 성은이는 외출 중 호흡곤란으로 진주 경상대학교병원 응급실에 후송됐다. 이후 10시간 만에 준뇌사 판정을 받았고, 두 달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성은이 부모는 이 과정에서 병원 측과 의료진의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4년 동안 의학 서적을 뒤져가며 공부를 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지난 2월 17일, 성은이 부모가 병원과 의료진을 상대로 제기한 첫 민사 재판에서 법원은 병원 측의 손을 들어줬다.
# 판결
병원 측 주장은 이랬다. “아이를 데리고 장거리 이동을 하는 등 폐동맥고혈압 환자를 위험에 빠뜨린 부모 본인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의료진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있다. 환자는 응급실 도착 당시부터 사망에 가까운 상태였으며 이후 시행된 응급조치와 치료 과정에는 문제가 없다.” 성은이의 사망은 폐동맥고혈압이 원인이며, 사망과 병원의 진료행위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얘기다.
법원의 판결도 병원 측 주장과 다르지 않았다.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제1민사부는 “원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재판부는 “환자는 말기 폐동맥고혈압을 앓고 있었다. 병원 의료진의 의료 과실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성은이의 부모는 “법원의 판결이 이상하다”고 주장한다. 성은이 아버지 김황수 씨는 “법원에 증거로 제출된 자료와 의사들의 주장이 맞지 않은 부분이 많다”며 “판결과 일치하는 건 병원 측이 재판에 앞서 제출한, 의사들의 주장이 기재돼 있는 준비서면뿐이다. 판결과 증거 자료를 비교해 보면, 날짜와 시간, 응급조치 과정 등 사실 관계가 다르다”고 말했다.
여기서 김 씨가 근거로 제시한 자료는 과거 성은이의 진료 기록과 성은이가 응급실에 내원 시점부터 사망 시점까지 기록한 경상대학교병원의 의무기록, 민사 재판에 앞서 의료진이 검찰에 출석해 진술한 내용 등이다. 이 자료는 모두 병원 측이 직접 작성했고, 의료진의 진술을 통해 작성됐다.
2011년 4월 4일 응급실 후송 전 외출 당시 성은이와 아버지 김황수 씨.
# 확진
성은이는 2007년 2월 28일(당시 8세)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 ‘특발성 폐동맥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폐동맥고혈압은 인구 100만 명당 30~50명 정도가 걸리는 희귀 난치 질환이다. 폐에서 혈액으로 산소 공급이 원활치 않아 쉽게 숨이 차 호흡곤란을 겪게 된다.
폐동맥고혈압 판정 이후 4년이 지나면서 성은이와 김 씨는 지병 관리에 익숙해졌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하며 검사와 약물 치료를 받았고, 외출을 할 때면 김 씨는 늘 가정용 산소공급기를 준비했다. 성은이도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통해 스스로 몸 상태를 확인할 정도였다.
2011년 4월 4일, 나들이 길에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났을 때도 김 씨와 성은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과거 산소포화도가 26%(2008년)와 70%(2010년)로 떨어졌을 때도 각각 응급실을 찾아가 고농도 산소 공급만으로 회복해 당일 퇴원하는 등, 이런 상황마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이날도 김 씨는 지체 없이 119구급대를 호출했다.
실제로 당시 구급대원이 작성한 구급일지를 보면, 성은이가 구급차로 진주 경상대학교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산소 공급을 받아 76%였던 성은이의 산소포화도가 점차 회복돼 92%를 기록했다. 성인 산소포화도의 정상 범위는 95~100%다.
성은이는 구급차 안에서 책에서 봤던 철학 이야기를 할 정도로 김 씨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눴고, 구급대원은 진주 경상대학병원 응급실 도착 20분 전부터 이 상황들을 전달했다. 이는 앞서 “사망 환자와 다름없는 상태로 응급실에 내원했다”는 의사 측 주장과 상반된 기록이다. 법원도 최초 76%였던 산소 포화도에 대한 기록만 반영했을 뿐, 이동 중 회복된 기록은 없었다.
# 방치
“오후 8시 31분,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한 이후 산소포화도는 67%를 기록했고 청색증이 나타났다. 의료진은 채혈을 하고 수액을 주입하며 산소를 15ℓ까지 공급했다.” 성은이가 응급실 내원 직후 의사 주장과 판결문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구급일지를 보면, 성은이는 이날 응급실에 오후 8시 21분에 도착했다. 병원 의무 기록보다 10분 일찍 도착한 것이다. 아버지 김 씨는 “당시 ‘산소 주세요, 산소 주세요’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정용 산소 발생기를 응급실에 설치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검찰 대질심문 기록을 보면 당시 성은이를 담당했던 의료진들은 각각 “8시 31분 처음 환자를 봤다” “환자가 가정용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응급 환자가 응급실에서 의료진의 조치 없이 약 10분 동안 방치됐다는 성은이 부모의 주장에 부합되는 진술 기록이다. 과거 성은이가 호흡곤란을 느껴 응급실에 찾았던 기록을 보면, 응급실 도착 직후 10~15분 동안 고농도 산소 공급을 받고 회복됐다.
또한 의무기록에는 청색증 기록은 없었으며, 수액 주입은 오후 9시부터 시작됐다. 산소포화도 67%와 산소 15ℓ 공급지시 또한 의사 주장과 판결문을 보면 응급실 상황으로 나와있지만, 중환자실 간호 기록에 오후 9시 35분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성은이가 쓰던 휴대용 응급 폐혈관 확장제와 가정용 산소 공급기.
“환자에 대한 의무기록이 오후 8시 31분 최초 작성된 사실은 인정되나, 의료진이 10여 분간 응급실에 방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고, 증거가 없다.” 법원은 의료진의 검찰 진술에도 ‘방치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의료진이 산소를 계속 공급한 것으로 보이므로, 환자 부모의 주장은 이유 없다”고 판시했다.
의무 기록과 검찰 진술 기록을 보면, 의료진은 성은이를 보고 즉시 산소를 공급했다. 그러나 이번엔 산소를 공급하는 절차가 기존 호흡곤란 환자와 비교해 크게 달랐다. 성은이 부모는 이 과정에서 성은이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고 주장해 왔다.
당시 성은이를 발견한 담당 의료진은 곧바로 앰부백(Ambu-Bag)을 통해 산소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앰부백은 자발적으로 호흡이 불가능한 위급환자에게 수동으로 산소를 강제 공급하는 장비다. 자가 호흡이 가능한 환자에게 시도할 때는 들숨과 날숨에 있어 환자의 호응을 받으며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의료진은 의식이 있고 자가 호흡을 하고 있던 성은이에게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다. 앞서의 성은이 아버지 김 씨는 “이날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도 응급실에서 앰부배깅을 시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입을 벌리고 있으면 숨이 턱 막히지 않나. 당시 성은이가 그런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산소 공급을 하는 대신, 오히려 호흡을 불가능하게 막았다는 얘기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산소 포화도가 오르지 않자, 의료진은 입으로 관을 넣어 폐로 공기를 공급하는 ‘기관삽관’을 시도했다. 의식이 있는 환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처치다. 성은이는 “혼자 숨을 쉴 수 있다”며 강하게 거부했고, 이 과정에서 의료진은 진정제를 두 번 주입해가며 기관삽관을 강행해, 총 세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 호흡정지
의료진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 “환자가 강하게 거부했지만, 폐혈관 확장을 위한 질소 인공호흡기(NO Ventilator) 치료를 하려면 불가피한 조치였다. 기관삽관 없이 불가능한 치료다”라고 말했다. 법원도 “질소 가스 공급을 위해서였기 때문에 앞서의 과정은 적절했다”는 취지로 판시했다.
한편 ‘동맥혈 가스 검사 결과’를 통해 산소포화도가 2%로, 성은이의 폐에 이산화탄소만 가득 차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앞서 의료진이 “사망 환자와 다름없다”고 주장한 근거도 이 동맥혈 가스 검사 결과 기록이다. 그런데 의무기록에는 오후 8시 43분에 동맥혈 가스 검사를 의뢰했다고 나와 있다. 이 시점은 기관삽관이 이뤄진 뒤다. 반면 재판 과정에서 병원 측은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채혈을 통해 동맥혈 가스 검사를 의뢰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성은이의 부모는 의무기록을 바탕으로 동맥혈 가스 검사 결과가 의료진의 응급조치로 산소가 전혀 공급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질소 인공호흡기 치료도 즉시 이뤄지지 않았다. 의무기록을 보면 기관삽관을 마친 이후부터 약 42분 동안 질소 인공호흡기 치료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 내용은 이후 병원 측이 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에 “당시 42분간 앰부배깅을 했다”고 나와 있다. 질소 가스는 상태가 악화돼 심폐소생술까지 한 끝에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나서야 공급됐다.
# 뇌사
성은이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이던 성은이에게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인공호흡기로 산소를 공급하던 관이 성은이의 입에서 빠진 것이다. 의무기록을 보면 “환자의 기침으로 인해 이탈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 재삽관까지 13분이 소요됐다. 앞서 투약한 진정제로 의식이 없었던 데다, 기도삽관으로 호흡기 없이는 자가 호흡이 불가능했던 성은이에게 13분간의 기관튜브 이탈은 치명적이었다. 기관튜브 이탈로 시작된 심정지가 30분간 지속됐고, 의료진은 사망 선고를 내리자고 보호자에게 말했다. 30분 뒤 심폐소생술을 통해 심박동이 돌아왔지만 이후 성은이는 ‘준뇌사’ 상태에 빠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사고는 이후에도 계속 됐다. 성은이의 산소 공급을 돕고 있던 질소발생기에서 지난 2011년 4월 9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똑같은 기계고장이 발생했다. 특히 두 번째 고장 때는 심폐소생술까지 가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순간에 생사가 갈릴 수 있는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이탈과 고장이 잇따라 발생한 것이다.
의무기록에 해당 기록이 남아있는 데도 법원은 “인공호흡기의 기관튜브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유로 이탈’했다”고 판시했다. 여기에 “13분 뒤 재삽관했으나 뇌손상 현상을 보였고, 이후 약 2개월간 중환자실에 있던 중 결국 ‘말기 폐동맥고혈압을 원인’으로 심인성 쇼크와 이로 인한 패혈증,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며 성은이의 사망 원인에 대해 ‘말기 폐동맥고혈압’이라고 못 박았다.
중환자실에서도 기관튜브 이탈, 기계고장 등 치명적인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 주장과 판단
국내에서 폐동맥고혈압 환자를 가장 많이 치료하고 있는 전문가는 법원 판단과 다소 다른 의견을 내놨다. 장혁재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폐동맥고혈압은 아직까지 예방과 완치가 불가능하다. 원인을 모르는 특발성 폐동맥고혈압의 경우, 평균 수명은 약 3년 정도다”라며 “다만 초기에 발견해 약물로 치료하면 조절하며 3년 이상도 충분히 살아갈 수도 있다. 내가 담당하는 환자 가운데에는 10년 이상 살아 있는 경우도 있고 임신해서 출산을 한 환자도 있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기관삽관의 경우 중증으로 병원에 찾아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하게 된다. 폐동맥고혈압이라도 약을 제외한 다른 치료는 일반 폐렴 등과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보통 의식이 있고 자가 호흡이 가능한 환자에게 즉시 앰부배깅, 기관삽관을 시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법원이 사인을 ‘말기 폐동맥고혈압’이라고 밝힌 데 대해 “폐동맥고혈압은 폐 고혈압 수치를 기준으로 경증, 중증 등으로 나눈다. 암과 같이 ‘말기’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사는 “폐동맥고혈압 환자에 대한 응급조치의 핵심은 ‘고농도 산소 공급’과 ‘폐혈관 확장제 투여’”라며 “호흡 곤란 환자를 응급실에 10분 가까운 시간 동안 방치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산소 처치는 보통 코줄, 마스크, 앰부배깅, 기관삽관의 순서로 시도할 수 있는데, 자가 호흡을 하는 환자에게 앰부배깅을 한 것은 적절한 조치로 보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이탈 후 재 삽관까지 13분이 소요된 것은 쉽게 말해 그동안 호흡을 못 했다는 얘기”라며 “뇌사의 결정적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경상대학교병원 관계자는 “제출한 증거 자료를 법원이 충분히 검토한 뒤 판단을 내려준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판결에 대해 특별한 이견도, 입장도 없다”고 말했다.
성은이 부모는 의사와 법원이 성은이 사망 원인을 앓고 있던 질환 탓으로 돌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머니 박연실 씨는 “재판 첫날부터 재판부는 ‘피해자가 난치 질환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며 못박았다”며 “재판 과정에서 검찰 진술과 민사 소송에서의 의사 주장이 상반된 데다가 의무기록과 다른 점이 많아 그 부분을 지적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의사들의 말이 일관되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의무기록을 모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수사기관과 재판부는 의료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아니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분쟁을 해소하려면 전문가의 감정, 의견 등이 필요하다”면서 “그런데 의료 전문가는 의사뿐이다. 수사기관, 재판부는 대한의사협회 또는 의료인에게 감정·자문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의료진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의료 사고 피해자들이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을 자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민사 재판에 앞서 성은이 부모는 2012년 8월 진주 경상대학교 병원 의료진 7명을 고소했다. 해당 형사 사건을 맡은 진주경찰서는 최초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했지만 검찰은 “기록감정 필요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재수사를 지시했다.
재수사 명령을 받은 진주경찰서는 대한의사협회에 감정을 의뢰했고, 감정 결과를 토대로 2013년 11월 18일 ‘불기소 의견’으로 재송치했지만 검찰에선 기소 중지 결정을 내린 뒤 민사 소송 판결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민사 1심 선고가 내려진 후 진주경찰서는 다시 해당 사건을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아버지 김황수 씨는 아직도 성은이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일, 참고서를 사달라고 하고는 하루 종일 책상 앞을 떠나지 않았던 일 등이 마치 어제 일 같다고 말한다.
“오히려 아빠를 안심시키고 걱정하지 말라고 더 활발하게, 씩씩하게 지냈어요. 내 작은 패랭이 꽃 성은이가.”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