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동안 이형종 외에도 타자 전향을 시도한 투수들이 종종 나왔다. 특급 성공 사례들도 많다. 삼성 이승엽, 텍사스 추신수, 세인트루이스 이대호 등 내로라하는 한국 야구의 대표 타자들도 모두 프로 스카우트에게 투수로 뽑혔다가 입단 이후 타자로 전공을 바꿨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천재’ 소리를 들으며 야구하던 선수들이다. 모두가 이렇게 성공만 하는 건 아니다. 변화에 실패해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닌 성적표를 받아드는 선수들도 많다. 새 역할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성공하려면 타고난 감각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까닭이다.
지난 2월 18일 요미우리와의 연습경기에서 타자로 전향한 LG 이형종이 활약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LG 트윈스
투수와 타자는 일단 경기 도중 주로 사용하는 근육부터 다르다. 투수는 수직 회전력을 사용해 공을 던지고, 타자는 수평 회전력에 의해 타격을 한다. 기본적인 워밍업 프로그램 외에는 몸 관리와 훈련 방식부터 모두 다르다. 이미 성인이 된 프로선수들은 기본적인 골격과 근육이 이미 자리잡힌 상태라서 더 바꾸기가 어렵다. 한 트레이닝 코치는 “사실 타자 전향도 기본적으로 몸이 타고난 선수가 더 쉽게 할 수 있다. 근육이 잘 잡히고 타고난 유연성과 스피드가 좋은 선수가 바뀐 훈련 방식에 좀 더 빠르게 적응한다”고 했다.
투수는 타격을 위해 손의 악력부터 키우는 게 필수다. 투구 때 공을 잡아채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악력이다. 배트를 쥐고 공을 때리면서 팔로스로까지 힘을 유지해 이어가려면 팔의 윗부분과 아랫부분 근육을 고루 강화시켜야 한다. 회전력을 높이기 위한 허리와 하체 근육도 집중적으로 단련한다. 무엇보다 타격 훈련 때 부상을 조심하는 게 필수다. 배트로 공을 강하게 칠 때 손목과 손가락에 큰 충격이 온다. 투수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통증이다. 타석에서의 심리적 압박감 역시 투수 출신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다.
무엇보다 근육을 만드는 것보다 유지하는 과정이 더 어렵다. 성인 선수들은 신체 적응력이 학창 시절보다 확실히 떨어진다. 필요한 근육을 만들어 놓아도 그 움직임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1~2년 안에는 완벽한 변신을 하기가 힘든 이유다. 실제로 특급 선수들조차 타자 전향 3년째 되는 시즌에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전력이 있다. 이승엽은 타자 전향 첫 해인 1995년 타율 0.285, 13홈런을 기록한 뒤 이듬해에도 타율 0.303, 9홈런을 치며 적응기를 거쳤다. 그러다 3년째인 1997년에 타율 0.329, 32홈런으로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이대호도 롯데 시절인 2002년부터 타자로 활약했지만 3년째인 2004년에 처음으로 20홈런을 넘기면서 거포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연세대 에이스에서 NC의 간판타자로 탈바꿈한 나성범도 다르지 않다. 2012년 퓨처스리그에서 타자로 워밍업한 뒤 NC가 1군에 첫 진입한 2013년에는 타율 0.243에 홈런 14개로 잠잠했다. 그러나 3년째인 2014년에는 3할-30홈런-100타점 고지를 동시에 밟으면서 골든글러브까지 손에 넣었다.
# 타자 전향보다 투수 전향이 어려운 이유
다행히 투수가 타자로 전향하는 쪽이 그 반대의 케이스보다는 수월하다고 알려져 있다. 투수 전향에 필수적인 어깨 근육 강화가 다른 어떤 부위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또 근육을 만드는 것 이외에 변화구를 장착하고 제구를 다듬는 시간도 추가로 필요하다. 명 투수코치 출신인 김시진 전 롯데 감독은 “투수는 어깨와 팔꿈치를 비롯해 부분적으로 단련해야 하는 부위가 많다. 야수가 투수로 전향하면 상대적으로 잔근육이 부족하고 어깨 근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기가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투수 출신의 한 야구인도 “아무래도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하는 건 어깨와 팔꿈치 쪽 부상을 비롯해 위험 요소가 많다. 투수 전향을 시도하는 선수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벽이 바로 어깨 통증”이라며 “투수는 자신의 몸에 맞는 최적의 투구폼을 찾아서 그 밸런스로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가 무척 중요하다. 아무리 공이 빠르고 어깨가 강하다 해도 계속 투수로 버틸 수 있는 내구성은 장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근력의 차이가 곧 지구력의 차이도 만든다는 얘기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학창시절 야구 좀 했다 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에이스 겸 4번 타자’ 출신이다. 고3 때까지 타자를 겸업하는 투수들이 대부분이다. 입단 직후 타자로 전향한다면 적응기간을 한결 단축할 수 있다. 그러나 타자들이 마운드에 서는 일은 거의 없다. 그만큼 투수가 특수한 포지션이다. 타자로 전향해 일가를 이룬 선수는 종종 있지만, 타자로 입단했다가 투수로 전향해 성공한 선수는 한화에서 은퇴한 권준헌과 넥센 출신의 황두성 정도가 꼽힐 정도다.
# 그들은 왜 전향을 결심했을까
투수의 타자 전향과 타자의 투수 전향은 선수의 야구인생이 걸린 문제다. 권유하는 지도자도, 고민하는 선수도 무척 신중해진다. 부상이나 팀 사정 등의 피치 못할 이유로 원래 포지션에서 한계에 부딪쳤을 때 고려하게 되는 마지막 대안이다. 물론 반대쪽 분야에서도 눈에 띄는 재능을 보이는 선수에게만 가능한 옵션이기도 하다.
타자 전향의 초창기 성공 사례로 꼽히는 한화 김응국 코치는 1988년 롯데에 투수로 입단한 뒤 주로 2군에 머물렀다. 그런데 투수들끼리 벌인 홈런레이스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선수가 모자란 2군의 빈자리를 메우려고 타석에 섰다가 안타를 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급기야 1989년 전반기에 OB와의 2군 경기를 참관하러 온 구단 사장 앞에서 만루홈런까지 날려 버렸다. 주변 관계자들에게 “저 선수가 투수다”라는 얘기를 들은 사장은 “그렇다면 타자를 한번 시켜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타격에 점점 흥미를 느끼고 있던 김 코치가 투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된 계기였다. 김 코치는 당시 이성득 타격코치와 손잡고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배트를 잡았다. 이후 올스타전 MVP와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며 타자로 다시 태어났다.
사실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김 코치가 투수를 포기한 이유는 고려대 시절 어깨 부상을 당한 탓이 컸다. 프로 입단과 동시에 타자로 전향하는 투수들은 대부분 김 코치와 비슷한 이유로 변화를 결심한다. 이대호 역시 입단 후 첫 전지훈련에서 어깨 부상을 당해 타자가 된 케이스다. 부상 후유증으로 140km 중반대였던 구속이 130km 초반대까지 떨어지면서 “체격에 비해 공이 너무 느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때 우용득 당시 롯데 2군 감독이 타자 전향을 권유했고,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다.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해 멋지게 성공한 NC 나성범. SBS 방송 화면 캡처.
반면 나성범은 스카우트들이 이른바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 온다’는 왼손 강속구 투수였다. 게다가 대학 3학년 때부터는 아예 배트를 놓고 투수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고교 시절부터 나성범을 눈여겨 봐온 NC 김경문 감독이 첫 면담 자리에서 곧바로 타자 전향을 제의했다. 이유는 역시 대학 시절의 어깨 부상이었다. 김 감독은 훗날 “부상 전의 공이라면 프로에서도 10승 이상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깨를 다친 대학 3~4학년 때의 공으로는 7~8승 정도의 투수에 그칠 것 같았다”며 “오히려 타격 쪽으로 재질이 뛰어나고 체격 조건도 좋다고 판단했다. 평범한 투수로 남기보다 타자로 대성해서 창단팀 NC의 구심점이 돼주길 바랐다”고 털어놨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 됐다.
# 과정과 사연도 제각각
앞서 언급했듯 권준헌은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한 뒤 드물게 좋은 성적을 낸 선수다. 심지어 1990년 태평양에서 데뷔한 뒤 1998년까지 쭉 내야수로 활약했기에 더 놀라운 결과였다. 1995년에는 3할 타율을 기록한 적도 있다. 그러나 현대 시절인 1999년 개막전을 이틀 앞두고 펑고를 받다가 오른쪽 팔에 부상을 당했다. 이때 권준헌의 강견을 유심히 봤던 신언호 당시 코치가 투수 전향을 제의했다. 신 코치 스스로가 현역 시절 강한 어깨로 유명했기에 3루수였던 권준헌이 1루에 총알같이 송구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당시 권준헌의 구속은 150km에 육박했던 데다 공 끝 변화가 심해서 1루수들이 “송구를 잡기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일도 잦았다는 후문이다. 그렇게 권준헌은 반신반의하며 투수로 변신했고, 특급 투수는 되지 못했지만 좋은 셋업맨으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그래도 이들은 약과다. 투수와 타자 사이의 다리를 건너갔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 선수들도 있다. 넥센 심재학 코치가 대표적이다. 1995년 LG에 입단해 강견의 외야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1999년에 투수 전향을 꾀했다. 당시 LG에는 김재현이나 이병규처럼 실력과 스타성이 뒷받침되는 왼손 외야수 후배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충암고 시절 초고교급 왼손 투수로 유명했던 심 코치는 위기의식을 느낀 끝에 정삼흠 투수코치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1999년 한 해 동안 10경기에서 3승 3패, 방어율 6.33을 기록한 뒤 현대로 트레이드 됐다. 현대는 심 코치에게 다시 배트를 쥐어줬다.
LG 김광삼은 그 반대다. 1999년 투수로 입단한 뒤 2005년까지 선발과 중간을 오가면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2006년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으면서 주춤했고, 당시 김용달 LG 타격 코치의 제안에 따라 타자로 전향했다. 김 코치는 고교 시절 우투좌타로 전국대회를 누볐던 김광삼을 좌타자로 키워보려고 했다. 다만 이미 20대 중후반에 접어든 김광삼이 몸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 사이 수비 훈련을 하다 외야 펜스에 부딪혀 손을 다쳤고, 슬라이딩을 하다 포수와 충돌해 왼쪽 무릎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김광삼은 다시 투수 복귀를 준비해 2010년 마운드로 돌아왔다.
배영은 스포츠 자유기고가
‘868홈런’ 왕정치도 시작은 투수였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타자로 꼽히는 이승엽(삼성)이 그랬듯,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아로새겨진 두 거목 역시 투수에서 타자로 변신해 놀라운 역사를 써내려갔다. 베이브 루스(조지 허먼 루스)는 1915년부터 1935년까지 22시즌 동안 메이저리그 통산 714개의 홈런을 때려낸 전설적 홈런왕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는 홈런타자보다 왼손투수로 먼저 이름을 날렸다. 당시는 왼손 선발투수가 귀하던 시절이라 더 그랬다. 만 19세였던 1914년에 투수로 마이너리그에 데뷔한 뒤 이듬해부터 빅리그에서 승수를 쌓아갔다. 1915년 18승, 1916년 23승, 1917년 24승. 그 사이 틈틈이 눈에 띄었던 루스의 타격 재능이 아까웠던 보스턴 구단은 급기야 1918년 5월부터 루스를 타석에도 세우기 시작했다. 선발 등판하지 않는 날에는 1루수나 외야수로 출전하는 식이었다. 그해 루스는 정규시즌 18승을 올리고 월드시리즈 두 경기에 선발 등판하는 한편, 타자로서도 4할 타율(0.484)에 11개의 홈런을 때려내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에 등극했다. 또 이듬해인 1919년에는 급기야 29홈런을 기록해 2위를 3배 가까운 격차로 앞질렀다. 그러나 돈이 필요했던 보스턴 구단주는 1920 시즌을 앞두고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팔았다. 12만 5000달러가 루스의 몸값이었다. 루스는 양키스로 이적한 뒤 본격적으로 타격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1920년 54홈런과 1921년 59홈런을 각각 때려내면서 새 장을 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투수의 시대’가 저물고 ‘홈런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일본에는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성공 시대를 열었다. 그 역시 1959년 당시 고졸 신인으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요미우리에 투수로 입단한 유망주였다. 부드러운 투구폼이 일품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즈하라 시게루 당시 감독은 다짜고짜 “넌 투수로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혹평했다. 프로에서 성공할 만한 특장점이 없는 데다, 고교 시절에 너무 많은 공을 던지면서 힘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배팅 훈련 때 놀라운 가능성을 보였다. 감독은 끝내 야수 전향 지시를 내렸다. 오 사다하루는 훗날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결국은 이 결정이 ‘신의 한 수’가 됐다. 오 사다하루는 투수를 상징하는 등번호 1번을 단 채로 홈런왕 15회, 타점왕 13회, 정규시즌 MVP 9회를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한 시즌 50홈런을 세 번이나 돌파했는데, 그 가운데 한 번은 은퇴가 멀지 않은 만 35세의 나이로 만들어낸 기록이었다. 정형화되지 않은 특유의 외다리 타법 또한 오 사다하루의 트레이드마크. 그가 그때 공을 놓고 배트를 들지 않았다면,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 868개의 홈런이 사라질 뻔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