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군 현동면의 마을회관 옆에 앉아 있던 마을 주민 A 씨(75)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주민도 “이장 참 잘 뽑아놨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숨진 주민이) 마을회관에 맨날 와서 부침개도 주고 밀린 설거지도 하고 마을 위해 신경 많이 썼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 마을에는 52가구 총 98명이 살고 있으며 매일 주민 10여 명이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웃고 떠들며 음식 등을 나눠먹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로 주민들은 문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삼가고 있는 상태다.
현동면사무소의 한 직원은 “마을회관이 모범상을 받을 정도로 동네 분위기가 좋았는데 이번 일이 터져 모두 충격이 크다”라며 “다른 곳에 가면 의심을 받을 까봐 주민들은 별 다른 일이 없으면 집 안에만 머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농약소주 사건’이 발생한 경북 청송군 현동면 마을 전경.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던 이곳이 발칵 뒤집힌 것은 지난 9일. 이날 오후 9시49분께 마을회관에서 소주를 마시던 현 이장 박 아무개 씨(62)와 3년 전 이장을 맡은 허 아무개 씨(67)가 쓰러졌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박 씨는 끝내 숨을 거두고 허 씨는 중태에 빠졌다.
당시 마을회관에는 주민 13명이 있었고 박 씨 등 8명은 작은 방에서 함께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그러나 두 병째 소주를 마신 박 씨와 허 씨가 쓰러지면서 마을회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들이 마신 소주는 작은 방 안의 김치냉장고에 보관돼 있던 38병의 소주 중 단 한 병으로 숨진 박 씨가 직접 냉장고에서 꺼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국과수 조사 결과 소주에는 고독성 살충제인 ‘메소밀’이 발견됐다. 지난해 경북 상주에서 발생한 ‘농약 사이다’ 범행에 이용된 살충제와 같은 것이다. 소량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독성이 강해 2012년부터 판매와 유통이 중단됐으나 대다수 농가에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송 경찰은 주민을 대상으로 1차 탐문 조사를 마쳤고 현재 2차 탐문 조사에 들어갔다.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주민 13명에 대한 진술을 종합해 용의자 특정이나 범행 동기 등을 파악할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 파악한 4~5가지 주민 간 갈등 요인을 바탕으로 사건 관련성을 집중 추적하고 있다”며 내부 소행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마을회관이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노리고 몰래 들어온 외부인의 범행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외부인이 ‘묻지마‘식으로 독극물을 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범행에 이용된 소주병은 30여 병의 다른 소주병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마을의 누가 ’농약 소주‘를 마실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마을회관은 2차선 도로와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을과 300여m 떨어져 있다. 마을회관 출입 열쇠는 이장을 포함해 5명가량이 가지고 있지만 마을 특성상 문단속은 제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마을회관에 CCTV가 없어 마을회관에 드나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외부인의 흔적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경찰은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
남경원 기자 ilyod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