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가 지난 2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표직 유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사상 유례가 없는 ‘비례대표 5선’이란 진기록을 눈앞에 둔 김 대표는 저돌적인 승부사 기질로 대선 정국까지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킹메이커냐 킹이냐, 그것이 문제다. 물론 내상도 적지 않았다. ‘만기친람’ 식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낸 것. 친노계와 운동권 세력과의 불안한 동거도 그대로다. 정치판을 소용돌이에 빠지게 하기 위한 승부수가 불가피하다. 키워드는 ‘개헌’이다. 김 대표의 퍼즐 맞추기는 이제 시작이다.
더민주 공천 내홍은 김종인 대표의 실력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다. 김 대표 말 한마디에 당 비대위원들은 ‘반성문’을 썼다. 문재인 전 대표는 사실상 백기투항을 했다. ‘셀프 공천’ 논란으로 촉발한 노욕 논란에도 꿈적하지 않았다.
셀프 공천 파동은 지난 20일 불거졌다. 김 대표가 자신을 비례대표 후보 2번에 배정, 원내 진입을 ‘셀프’로 확정했다고 해서 그런 말이 붙었다.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A(1∼10위)·B(11∼20위)·C(21∼43위) 그룹으로 세분화한 비례대표 예비후보자 순위 투표 방식은 중앙위원회의 비례대표 선출 권한을 침해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막장 공천’ 파장도 일었다. 당 대표 몫인 1번의 박경미 홍익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는 2007년 제자의 석사 논문 표절 의혹에 휘말렸다. 6번 최운열 서강대 교수는 2011년 ‘검은 머리 외국인’이란 비판을 받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을 변호한 칼럼을 쓴 인사다. 친노계가 다수인 중앙위원들은 “최악의 공천”이라며 강하게 반발, 비례대표 순위 명부 의결이 결국 무산됐다.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도 “그럴 줄 알았다”며 힐난했다.
김 대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지난 21일 서울 광화문 개인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그따위로 대접하는 정당에서 일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며 “패권을 하려면 잘하라고 해. 그따위로 패권 행사하려고 하지 말고…”라며 친노·운동권 세력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날 예정된 비대위 회의도, 비례대표 명부 확정을 위한 중앙위원회 회의도 ‘보이콧’했다.
당은 쑥대밭이 됐다. 총선을 불과 20여 일 앞두고 당무도, 선거일정도 모두 마비됐다. 더민주는 김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즉각 비대위 회의를 열고 김 대표의 비례대표 순번을 ‘2번→14번’으로 조정하는 수정안을 의결했다. 비대위가 수장 없이 비례대표 순번을 바꾸면서 일종의 ‘반란 구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또한 수정안에는 애초 A·B·C 그룹으로 나뉜 순번투표 대신 칸막이를 허물고 중앙위의 심판을 받자는 내용도 포함됐다.
역효과였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서울 남산의 한 호텔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14번으로 미루는 것은 당당하지 못한 태도”라며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하겠다는 것인데, 그게 무슨 셀프 공천이냐”고 격노했다. 김 대표 앞에선 조직력의 친노도, 강성인 운동권도, 비노(비노무현)계도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친노계가 다수인 더민주 중앙위는 22일 새벽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순번 지정 문제를 김 대표에게 위임하기로 재결정했다. 돌고 돌아 사실상 2번으로 복귀한 셈이다. 문재인 전 대표도 서울로 상경, 김 대표와 회동하고 “꼭 필요한 분”이라며 몸을 한껏 낮췄다. 김 대표는 묵묵부답으로 시간 벌기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비대위원 전원이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공천 파동 내내 ‘으름장 정치’를 선보인 김 대표는 23일 “고민 끝에 이 당에 남겠다고 생각했다”며 “약속한 대로 모든 힘 다해 당 정상화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또다시 반전 카드를 꺼냈다. 그러면서도 비례 2번 배정에 대해선 “비대위원이 하는 일”이라며 사실상 수용했다. 셀프 공천을 둘러싼 당내 반발 이후 ‘격노→당무 거부→사퇴 시사’ 등의 고비마다 배수진을 치며 당내 친노뿐 아니라 비대위의 보이지 않는 손의 패권을 꺾은 셈이다. 일각에선 박근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 정치로 강한 리더십을 선보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상처뿐인 영광에 그쳤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애초 전문직 인사 위주로 짰던 비례대표 명단은 공천 파동을 거치면서 친문(친문재인)계 인사들이 대거 당선권에 포진됐다. 문미옥 전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기획정책실장(7번)·이철희 당 전략기획본부장(8번)·권미혁 당 뉴파티위원장(11번)·이수혁 전 6자회담 수석대표(15번) 등은 대표적인 친문계다.
김현권 당 전국농어민위원회 부위원장(1번)은 2012년 총선 때 문 전 대표가 후원회장을 맡았다. 제윤경 주빌리은행 대표(9번)는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대선후보 공동선대위원장, 이용득 전 최고위원(12번)은 민주통합당의 핵심 축, 정춘숙 전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13번)는 김상곤 혁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친문계로 분류된다.
반면 김 대표가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 양정숙 국무총리 소속 행정심판위원(19번)과 김숙희 서울시의사회 회장(29번) 등은 후순위로 밀렸다. 조희금 대구대 가정복지학과 교수는 36명 명단에서 배제됐다. 김 대표가 밀었던 박경미(1번)·최운열(4번) 교수와 김성수 당 대변인(10번) 등 소수만이 당선권에 포진했다. 밀약설 의혹에 휩싸인 김 대표와 문 전 대표가 ‘전략적 제휴’에 나섰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들이 정체성 등을 놓고 상당한 이견을 노출한 만큼, 총선 후 이념·노선 투쟁의 2라운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공천 내홍은 수습했지만, 김 대표가 당 갈등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희경 국민의당 대변인은 김 대표가 잔류를 선언하자 “역사상 가장 추악한 거래”라고 맹비난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가 지난 22일 국회 당대표실에서 비공개 비대위 회의를 마치고 국회를 나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등 분권형 개헌하에선 김 대표도 실권자로 등극할 수 있다. 이미 김 대표는 지난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30년 동안 대통령 직선제를 해왔는데, 실질적인 문제를 대통령들이 하나도 해결 못 했다”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각제가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더구나 그는 “더는 킹메이커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 발언과 개헌이 맞물린다면, 김 대표 스스로 킹으로 부상할 수도 있다. 앞서 김 대표는 지난 2011년 10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나는 문재인 같은 사람은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본다”며 “정치 경험이 너무 없다. 인품 좋고 깨끗한 게 좋지만, 대통령이란 자리는 그런 자격만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여권의 권력구도다. 그간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 내부에선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 등 분권형 개헌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강력한 대선후보가 없는 친박계로선 이원집정부제 등을 통해 ‘바지 대통령-실권 총리’ 모델을 만들 수 있는 분권형 개헌이 ‘포스트 박근혜’를 유지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총선 이후 친박계와 김 대표가 개헌을 고리로 최소공약수를 형성한다면, 개헌 태풍이 대선 정국을 뒤흔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대표가 친노계 후보를 바지 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자로 부상할 수 있는 승부수라는 얘기다. 더민주 비노계 관계자는 “김 대표의 의중에 내각제 등 개헌이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키는 김 대표가 쥐고 있다. 김 대표는 지난 24일 새누리당을 탈당한 진영 의원과 김진표 전 의원 등 경제통을 선대위 부위원장에 임명하며 본격적인 선거체제로 전환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을 향해 “경제정책이 완전히 실패했다”며 “이번 총선은 ‘잃어버린 8년’ 심판 선거”라고 대대적인 대여공세를 예고했다.
첫 번째 관문은 스스로 공언한 20대 총선 107석이다. 여당이 개헌선(200석)을 확보하거나, 야당이 개헌 저지선(100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치적 변곡점마다 개헌 정국은 돌출 변수처럼 등장할 수밖에 없다. 김종인 대망론의 현실 가능성은 4월 13일 자정께 드러난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