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가 지난 2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표직 유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신간회 등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병로 선생의 손자로 살아온 특유의 자존심도 김 대표의 독특한 캐릭터에 한몫했다. 서강대학교 한 경제학과 교수는 “평생 부르주아 계층에서 어려움 없이 산 김 대표는 자존심 등 명예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거침없는 그의 품성은 여기에 기인한다”고 밝혔다.
그의 만기친람식 리더십은 때때로 정치활동에 독으로 작용했다. 유신정권 시절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데 일조했던 김 대표는 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에서 재무분과 위원으로 참여했다. 1987년 헌법 개정 땐 경제민주화 조항(제119조 2항) 신설을 주도했다.
그의 파격 행보는 노태우 정권에서도 빛을 발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1990년 강력한 재벌규제로 평가받은 5·8 조치를 전격 추진했다.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대거 강제 매각, 부동산 가격 안정화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거침없던 김 대표는 1991년 12월 당시 안영모 동화은행장으로부터 ‘연임 청탁’ 대가로 이듬해 3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2억 1000만 원을 받았다. 1993년 구속된 그는 의원직을 상실한다.
풍찬노숙을 하던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제수장 하마평에 올랐지만, 그 누구도 그를 선뜻 임명하지 못했다. 부담스러운 파격 행보 탓이다. 4번의 비례대표를 하면서 ‘김종인계’가 전무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더구나 네 번의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대표발의한 법안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자신의 상징인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도 대표발의하지 않았다. 공동발의한 법률안 55개 중 3건만 수정가결됐고 51건은 폐기, 1건은 철회됐다.
특히 공동발의한 55개 법안은 17대 국회에서 했다. 정권의 단물을 먹던 민주정의당(11·12대)과 민주자유당(14대) 땐 법안 발의를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책무인 입법활동을 사실상 방기한 셈이다.
국민의당 관계자는 “김 대표가 정치활동을 한 과거와 지금의 국민 검증 눈높이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며 “김 대표의 원내 진입은 국회 활동 내내 역풍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대표의 ‘셀프 공천’이 자신의 대망론을 덫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