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제20대 총선 대구·경북 지역 공천 신청자 면접을 실시하는 가운데 유승민 의원(뒤쪽)이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그는 그날 밤 자택에서 낙천한 동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본인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것 같다고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 용기 잃지 말고 각자가 잘 판단해서 향후 거취를 결정하고 좋은 정치를 하자고 당부했다고도 한다. 유 의원의 전화를 받은 한 의원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다”고 말했다.
유 의원과 그날 밤 연락을 주고받았던 지인들에 따르면 당일 유 의원은 잠을 청하지 않고 뜬눈으로 샜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4시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자택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언론사 취재진이 빠진 사이 그는 자신의 지역구 밖으로 나갔다. 수행비서와 단 둘이었다. 보좌진과 측근들에게조차 자신의 행방을 알리지 않았고 그들 또한 묻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8일간의 칩거가 시작됐다.
언론은 그의 행방을 찾아 백방으로 뛰었다. 조해진 권은희 의원 등 그의 동지들이 속속 탈당 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면서 유 의원의 거취가 큰 관심사로 증폭됐다. 경북 영주 선친(고 유수호 의원)의 묘 인근 호텔에 있다는 이야기, 경북 청도와 영주 등 인근 사찰에서 칩거 중이라는 설에서부터 한 번씩 가족과 가던 모처의 게스트하우스에 있다는 이야기까지 퍼지면서 여러 언론사가 방향을 나눠 탐색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몸을 꽁꽁 숨긴 유 의원이 측근들에게도 행방을 알리지 않으면서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다.
여러 전언들을 종합해보면 칩거 중이었던 가운데 유 의원의 걱정은 하나로 모아진다. 만약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회가 유 의원을 단수추천할 경우였다. 민현주 정수성 박성호 이에리사 장윤석 정희수 김제식 민병주 한기호 등 자신과 가까운 의원들이 모조리 경선에서 탈락한 뒤였고, 권은희 김희국 류성걸 이종훈 조해진 이이재 의원 등은 아예 경선 기회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19대 국회의 ‘이재오 고사작전’과 마찬가지로 수족을 모조리 잘라내고 혼자 덩그러니 내버려둘 것이란 말이 크게 회자한 터였다. 정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친박계로서는 친유승민계 공천학살이란 비판여론을 잠재우고 극적으로 막판에 유승민 살리기를 함으로써 반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역발상은 항상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측근 인사도 “유대(유승민 원내대표) 스타일상 만약 공천을 받았으면 공천장을 쥐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본다. 샌님처럼 보여도 의리를 소중히 하는 경상도 상남자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분위기는 단수추천으로 흐르지 않았다.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그 뒤로도 수차례 ‘당 정체성’을 거론하면서 유 의원을 겨누는 분위기를 풍겼다. 유 의원 지역구 논의는 계속 후순위로 밀렸고 급기야 23일이 됐다. 관련법상으론 ‘꼼수’가 가능한 시간. 공직선거법상 정당의 공천을 못 받은 사람이 출마를 하려면 23일까지는 탈당해야 한다.
만약 총선 후보자 등록기간인 24, 25일에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하면 후보 등록 자체가 무효가 된다. 당이 공천을 줄 것 같지도 않고, 경선에조차 붙일 수 없는 시간이었으니 유 의원은 23일에 탈당을 선언해야 했다. 대신 새누리당으로선 유 의원이 당원이 아니니 다른 인물을 공천할 수 있게 됐다.
지난 2월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제20대 총선 대구·경북 지역 공천 신청자 면접을 실시하는 가운데 대구 동구을 지역 공천 면접을 기다리며 유승민 의원(왼쪽)과 이재만 전 대구 동구청장이 묘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유 의원과 연락이 닿지 않는 시간, 유 의원의 주변부에서는 만약 당이 경선을 붙여주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이 컸다고 한다. 100% 국민여론조사라고 하더라도, 유 의원 측근만 모조리 배제된 결과가 쏟아지면서 여론조사의 신뢰성에 의문표가 달렸기 때문이다. 만약 경선에 붙여지고 유 의원이 탈락한다면 출마 자체를 할 수 없게 됐다. 유 의원으로선 경선에서 탈락하는 것보다는 무소속으로라도 나와 대구 동을 유권자로부터 직접 심판을 받고 지는 것이 후회가 덜 되는 선택이었다는 얘기다.
8일간의 칩거 중에 대구에서는 여러 소문이 돌았다. 하나는 불교계의 불만이 폭주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한구 공관위원장은 대구 수성을을 여성우선추천지역으로 정했다. 이 지역은 불교계와 신망이 두터운 주호영 의원의 지역구였다. 주 의원은 불교계 특사로 불릴 정도로 불교계가 전폭으로 지원하는 정치인인데 이 위원장이 단칼에 그를 잘랐다며 여기에는 인접 지역구에서 의정활동을 하며 쌓인 개인적 감정이 녹아 있을 것이란 말이 돌았다.
게다가 유 의원의 모친 강옥성 씨(86)는 법명이 ‘정각심’으로 깊은 불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역의 불교신자라면 ‘강 할머니’를 모르는 이가 없다고 전해진다. 지난해 원내대표 사퇴 파동에서는 강 할머니가 대구 수성구 범어동의 청수사를 찾아가 자신이 직접 키운 쑥으로 만든 떡과 물김치를 법당에 올려 “물김치는 그저께 밤에 박근혜 대통령이 만드셨고, 쑥떡은 어제 밤 승민이가 만들었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지역에서 불교계 신망이 두터운 두 유력 정치인이 공천 파동 속에서 애를 먹으니 불교계가 뿔났다는 말이 크게 돌았다. 대구에서는 또 친박계 등이 유 의원의 도덕적 결함을 찾기 위해 그간 백방으로 뛰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낙천으로 승부수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회자했다.
결국 유 의원은 탈당을 했고 무소속 후보가 됐다. 새누리당의 상징색인 빨간색 점퍼를 입지 못하게 됐다. 대구에서 무소속 돌풍이 분 전례는 없다. 2008년 몇 명의 무소속 후보가 선전했을 땐 박근혜라는 유력 정치인이 구심점이 됐고,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았었다. 하지만 구심점이 되어야 할 본인조차 무소속 신분이다. 하지만 승리한다면 그는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된다. 레버넌트.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