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김 대표가 3월 24일을 ‘D-DAY(디데이)’로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 대표는 공직선거법상 후보자 등록이 시작돼 당적 이탈이나 변경이 불가능한 24일을 택했다. 김 대표가 25일까지 공천장에 직인을 찍어주지 않으면 진박 후보들은 새누리당 후보 자격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무소속 출마의 길도 막힌다.
김 대표는 초강수를 둔 후 자신의 지역구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김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고 김영삼 대통령(YS)을 ‘벤치마킹’했다는 말이 나온다. YS는 1991년 민정당계의 축출시도로 고립될 위기에 처하자 당무 거부를 한 뒤 마산에 칩거하며 반전을 노린 바 있다. 김 대표는 부산에 도착해서는 유 의원이 탈당하면서 언급한 “오직 국민만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김 대표가 무공천을 선언한 5곳은 서울 은평을, 서울 송파을, 대구 동구갑, 대구 동구을, 대구 달성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진박 후보들이 출사표를 던진 곳이다. 동시에 대구 동구을의 유승민 의원이나 서울 은평을의 이재오 의원처럼 친박계가 핵심 물갈이 대상으로 준비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김 대표의 ‘옥새전쟁’이 박 대통령을 향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새누리당은 25일 김 대표 주재로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5곳 중 대구 동구을과 서울 은평을, 송파을에만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다. 이로써 유승민 이재오 의원은 사실상 유일한 범여권 후보로 20대 총선에 출마하게 됐다. 친박계가 공을 들였던 동구을의 이재만 전 동구청장은 후보 등록이 끝내 무산됐다. 김 대표로선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정치권에선 김 대표 결단을 두고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 우세하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유승민 의원 탈당으로 공천 전쟁은 일단락될 것으로 봤다. 김무성 대표는 그동안 박 대통령과의 일전에서 번번이 꼬리를 내렸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으로 전개됐다. 상향식 공천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김 대표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차기를 노리는 김 대표로선 현직 대통령과 등을 돌린다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군다나 김 대표는 공천을 통해 명분은 잃었지만 실리를 챙겼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번 공천에서 비박계는 지역구 253곳 중 친박(130) 및 중립지역(20) 150여 석을 제외한 100석 정도를 얻어냈다. 이 중 김무성계로 꼽히는 후보자는 대략 50명이다. 친박계의 공천학살이 공공연히 이뤄졌지만 김 대표 본인만은 향후 대권을 위한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앞서의 김 대표 최측근 의원도 “사실 비박계는 친박의 대척점이라는 의미만 있을 뿐 엄밀히 말하면 김 대표 세력은 아니다. 결속력도 느슨하다. 그러나 이번에 공천을 받은 후보자들은 누가 뭐래도 ‘김무성 키즈’다. 김 대표는 친위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정치 생명을 걸고 승부수를 던졌다. 김 대표 주변에선 “여기서 밀리면 대권도 없다”는 절박함이 묻어나온다. 또 “현재권력은 미래권력을 이길 수 없다”는 자신감도 들린다. 이와 관련, 정치권에선 여러 얘기가 나오고 있다. 우선 김 대표가 향후 행보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는 관측이다. 다음은 한 비박계 의원의 말이다.
“유승민계가 이한구 칼날에 다 날아가는 동안 김 대표 측근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김 대표가 친박계와 이면계약을 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던 상향식 공천이 무너질 때도 김 대표는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 김 대표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의원들이 늘어났다. 김 대표도 아마 이런 내부의 기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차기 대권을 위해 김 대표는 친박이 내세운 후보와 진검승부를 펼쳐야 한다. 친박계는 공공연히 ‘김무성 대항마’를 찾고 있는 상황이다. 친박 진영은 결속력도 남다르다. 이를 위해선 비박계 지원사격이 절실하다. 즉, 이번 옥새전쟁은 공천 과정에서 사분오열된 ‘집토끼’를 단속하기 위한 차원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유승민 의원(왼쪽)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일요신문DB
김 대표로선 그다지 달가운 상황만은 아니다. 김 대표가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동안 ‘핍박받는 유승민’은 비박계의 새로운 차기 주자로 급부상했다. 향후 비박 진영 주도권을 놓고 김 대표와 맞붙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공천에 탈락한 한 유승민계 의원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유 의원이 살아온다면 김 대표보단 더 유력한 잠룡이 될 것이다. 김 대표 쪽에서도 이를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 대표가 유 의원에 대해 모호한 스탠스를 취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됐건 김 대표 전략은 주효했다. 탈당 선언으로 유 의원에게 쏠려있던 스포트라이트는 하루 만에 김 대표의 옥새전쟁으로 옮겨갔다. 또 유 의원이 선점했던 ‘여당 내 야당’의 이미지도 덤으로 얻었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김 대표가 유 의원 견제를 노리고 옥새 투쟁을 벌인 것이라면 그야말로 ‘정치 9단’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말했다.
친박계는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김 대표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말이 공공연히 돈다.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던 김 대표가 작정이라도 한듯 24일 무공천 지역을 발표하며 ‘외통수’를 던진 것에 대해선 ‘항명’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공천에 대해 김 대표와 친박 핵심부 간에 어느 정도 조율이 이뤄졌던 것 아니냐는 추측을 뒷받침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 대선캠프 출신의 한 원로 인사는 “김 대표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공천은) 어느 정도 합의가 된 부분이었다. 부산 지역 김 대표 측근들이 모두 공천 받은 것만 봐도 알지 않느냐. 김 대표가 이런 식으로 언론 플레이나 옥새 투쟁을 할 것이란 우려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했다. 대권을 꿈꾼다는 김 대표가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나. 이제 우리도 그냥 있을 순 없다. 앞으로 김 대표도 쉽지 않은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