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를 만났다. 악수를 나눴고, 반갑다는 말을 건넸다.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늘 다른 곳을 향했다.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가끔 미간이 구겨졌다. 그때마다 짙은 한숨이 함께 흘러 나왔다.
무죄를 주장하는 최 아무개 씨와 장 아무개 씨. 아직까지 실명과 얼굴은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들은 강도살인, 강도상해, 강도강간, 특수강도, 특수감금, 공무원자격사칭, 도로교통법위반 등 모두 8가지 혐의를 받았다. 지난 1992년 8월 11일 부산지방법원은 두 남자에게 강도 살인을 근거로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항소심과 대법원도 같은 판단을 했다.
그런데 판결문을 보면 물적 증거가 없다. 지문은 물론, 범행 도구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법원은 이들을 유죄라고 판단했다. 그 근거로 “이 사람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모호한 간접 증거 하나, ‘피해자’들의 진술, 경찰이 받아낸 두 남자의 자백을 들었다.
경찰 조사에서 스스로 범행을 시인한 두 남자. 하지만 이들은 “그래도 무죄”라고 주장한다. ‘자백’을 하기 전, 경찰이 고문을 했고, 두려움에 몸을 떨며 시키는 대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이 최 아무개 씨(당시 29세)를 찾아온 건 지난 1991년 11월 8일 오후 3시다. 부모와 함께 운영하던 김 양식장에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막 선착장에 내리던 참이었다. 이틀 전, 자연보호 활동을 하던 최 씨가 엉겁결에 무면허 운전 교육을 하던 한 남성이 쥐어준 3만 원을 받은 게 화근이었다. 당시 부산시 소속 한 자연보호 단체에 속해있던 최 씨는 경광봉과 수첩 등을 가지고 있었고, 차에는 스티커 등이 부착돼 있었다. 최 씨를 공무원으로 오인한 남성이 “봐달라”며 돈을 건넨 것이다.
경찰은 최 씨에게 임의 동행을 하자고 했다. 최 씨의 차량 번호를 확인한 앞서의 남성이 경찰서에 확인을 했고 ‘공무원 사칭’으로 신고가 접수된 것이었다. 경찰은 최 씨에게 “서에 가서 간단히 몇 마디만 하면 된다”고 했다. 최 씨가 부산 사하경찰서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을 받은 날 함께 있었던 장 아무개 씨(당시 32세)도 형사들과 함께 들어왔다.
최 씨는 경찰에 “오해였다”고 진술했다. 돈을 받은 건 맞지만 공무원 사칭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경찰은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앞서 관내에서 발생한 사건 19건을 두고 최 씨와 장 씨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모두 지난 1991년 8월부터 11월 사이에 발생한 금품 갈취 및 강도 사건으로, 범행 대상은 모두 운전 연습을 하거나 당시 차 안에서 데이트를 나누는 커플 등이었다. 최 씨는 “모두 처음 들어 본 사건이었다. 신고가 접수된 사건이냐고 물었지만 형사들은 ‘네가 알아서 뭐하게’라며 윽박질렀다. ‘피해자들’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고 확인해달라고 했지만 무시당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3일 뒤인 1991년 11월 11일 오전, 이번엔 부산 사하경찰서의 한 경찰이 갑자기 이들을 찾아와 “이놈들에게 강도를 당했다”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1989년 12월 새벽, 부산 사하구 신평동 인근 강변도로에 세워 놓은 자신의 차량 안에서 데이트를 하다 강도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무려 2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앞서의 경찰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최 씨와 장 씨의 얼굴은 똑똑히 기억한다”고 진술했다. 공무원 사칭과 강도혐의에 강도 상해까지 추가됐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이제 두 남자는 살인자가 된다. 1년 전인 지난 1990년 1월 4일 새벽 2시, 부산 사하구 신평동과 엄궁동 사이 강변도로와 갈대숲에서 발생한 강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것. 차량 안에서 한 커플이 2명의 강도를 만나 여성은 성폭행을 당한 뒤 둔기에 맞아 숨지고, 남성은 트렁크에 감금돼 있다 강도들과 격투 끝에 도망쳐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 당시 용의자는 물론 범행 도구, 지문 등 별다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미제로 남아 있었다.
두 남자가 ‘검거’된 이후 부산 사하 경찰서가 작성한 수사기록을 보면 이날, 1991년 11월 11일 이후 같은 달 18일 검찰에 송치되기 전까지 두 남자는 총 3차례의 진술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모든 범죄 사실에 대해 “그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인정하고 ‘자백’한다.
이 과정에서 최 씨와 장 씨는 경찰의 고문과 폭행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고문을 받았던 장소와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현재 없다.
2000페이지가 넘는 수사기록 중 일부 .
다만 이들이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을 보면, 두 남자의 △범행 전후 상황과 시간 △범행 수법과 사용한 도구 △사체를 유기한 장소 등에 대한 자백이 수시로 바뀐다. 여성을 살해한 둔기가 호신용 가스총에서 팔뚝만 한 각목, 돌멩이로 바뀌기도 하고, 장갑은 없었다고 했다가 범행 이후 벗어 강물에 던져 버렸다고 했다. 수사 초기 피해자와 치열한 격투 끝에 도주했다고 했으나, 나중에는 그를 제압해 테이프로 묶어 트렁크에 감금했다고 진술한다.
당시 자백 진술을 모아 한 눈에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앞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 이후 피해 남성이 부산 북부경찰서에서 진술한 내용과 비슷해진다. 초기 자백 진술과는 모든 내용이 크게 다르다. 한 경찰 관계자는 이러한 자백 진술에 대해 “진짜 자백이라면 시간이 지나든, 말을 바꾸든 ‘핵심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신빙성이 없는 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피해자들의 진술도 점차 달라진다. 앞서의 강도를 당했다고 주장한 형사는 처음엔 장 씨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하다가도,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 진술한다. “2년 전 어두운 새벽에 본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경찰관이다. 얼굴을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살인사건의 피해 남성 역시 최 씨와 장 씨가 검거되자 “이들이 맞다”고 주장했지만, 1년 전 사건 발생 당시 기록을 보면 그는 “범인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고 진술했으며 그가 기억한 범인들의 신장도 최 씨, 장 씨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자백 외에 경찰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는 현장에서 발견된 정액 묻은 하얀 손수건이다. 당시 국과수는 “정액의 혈액형은 AB형”이라며 “다만 정액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혈액형을 판정했다. 이 경우 A형과 B형, A형과 AB형, B형과 AB형이 혼합된 경우도 AB형으로 반응할 수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최 씨의 혈액형은 AB형이다. 그리고 여성을 성폭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 안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은 A형과 B형이었다.
최 씨와 장 씨는 검찰에 송치된 이후에도 범행을 인정했다. 최 씨는 “형사들이 ‘검찰에 가서도 범행 인정 안 하면 똑같은 수사를 또 할 거다’라며 으름장을 놨다. 무섭고 두려워서 검찰에서도 자백을 했다”고 말했다. 최 씨와 장 씨는 3차 검찰 조사에서부터 범행을 부인했다. 처음 3만 원을 받았던 혐의 외에 모든 혐의는 자신과 관련 없다고 주장한 것. 특히 장 씨는 “어린 시절부터 시력이 매우 좋지 않다. 어두운 밤에 끔찍한 사건을 저지를 수가 없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실제 한 대학병원에서 장 씨의 시력을 감정한 결과 “시야 검사 결과가 불가능할 만큼 눈이 나쁘며 교정 불능으로 렌즈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다. 밝은 곳에서도 극히 가까운 거리의 물체밖에 구별하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장 씨는 사건 발생 당일 정상근무를 했고 이후 3일간 야근까지 했다는 회사 출근 내역서까지 제출했지만 검찰은 이를 외면했다. 결국 경찰 수사 결과를 그대로 적용했고, 1심 법정에서 두 남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지난 1992년 8월 11일, 부산지방법원 1심 재판부는 두 남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판결문 곳곳에서 허점도 발견된다. 범행 도구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직경 팔뚝 굵기 각목으로 살해했다’와 ‘주먹크기만한 돌로 살해했다‘는 표현이 혼재돼 있다. 또한 ‘경험칙상 불가능하다’ ‘선뜻 믿을 수 없다’ 등의 모호한 표현이 들어있다. 2심과 대법원 역시 원심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21년이 지났다. 최 씨는 지난 2013년 6월에, 장 씨는 같은 해 4월에 출소했다. 청년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중년이 됐다.
세상은 ‘전과자’를 선뜻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낙인은 아이들에게까지 찍혔다. 최 씨와 장 씨의 취업도 쉽지 않았지만, 아이들도 부모의 전과에 수차례 최종 면접 문턱을 넘지 못하곤 했다. 장 씨는 “어색하고 서먹하게 지내던 딸이 어느 날 함께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 사람들이 아빠 이야기를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해?’라고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기였던 딸이 세상에 나와 보니 다 큰 어른이 돼 있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어린 딸을 돌봐주지 못했던 것, 자라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걸 생각하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최 씨와 장 씨는 최근 재심 청구를 계획하고 있다. 당시 형사들은 모두 퇴직했고, 사건의 열쇠가 될 수도 있는 살인사건의 피해 남성은 21년 전 재판이 진행되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다. 재심 청구로 인해 또 힘든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두 남자는 잘 알고 있지만, 자신들을 위해,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라고 한다. 최 씨는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처음부터 알고 싶다”고 말했다.
답이 될 수 있을까. 두 남자가 혐의를 부인하고 고문‧폭행을 주장하자 당시 담당 형사 1계 주임(팀장)이 검찰에 출두했다. 두 남자를 검거한 이후 특진을 한 해당 형사는 검찰 조사에서 “본 사건에 대해 더 할 말이 있는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최 씨가 너무 자연스럽게 자백을 했는데 무엇 때문에 부인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엄궁동 살인사건 증거는 정액을 닦고 버린 손수건 하나뿐이었는데, 혹시나 하여 최 씨에게 혈액형을 물었더니 AB형으로 판명됐습니다. 최 씨가 범인이 틀림없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고 수사에 임하게 됐습니다. 또한 이 사건 범인이 검거된 것은 사건 수법상으로 특징이 있어 꼬리가 잡힌 것입니다. 범인들은 자가용을 탄 남자와 여자를 대상으로 경찰관을 사칭해 금품을 빼앗았는데, 엄궁동 살인사건 때도 자가용을 탔고 남자와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비슷해 수사를 했고 진범이 틀림없었습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