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왼쪽)와 문재인 전 대표. 일요신문DB
한 발 더 나아가 더민주 총선 전략의 숨은 그림을 보면, 문재인 딜레마가 선명해진다. 더민주의 총선 전략은 투 트랙이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호남을 비롯한 전국각지, 문 전 대표는 비호남, 특히 부산 ‘동부벨트’에 방점을 찍었다. 친노(친노무현)계에 대한 호남 비토 정서 탓이다. 호남과 비호남을 이원화하는 전·현직 대표의 ‘투톱 체제’로 총선을 돌파하겠다는 복안인 셈이다.
하지만 ‘야권분열=필패’다. 선거 막판 연대론을 앞세워 총선 정국에 나선 문 전 대표의 드라이브는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선거 이후 전망도 밝지 않다. 전·현직 투톱 체제의 정치적 함의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더민주 총선 전략의 숨은 그림이 문재인 딜레마의 핵심이다.
애초 문 전 대표 앞에는 △백의종군 △비례대표 및 지역구 출마 △후방 선거지원 등 크게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범친노계 내부에선 의견이 분분했지만, 출마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일부 측근들은 ‘대선 직행’을 권유했다. 장고를 거듭한 문 전 대표는 마지막 카드인 후방 선거지원을 택했다. 문 전 대표 측 관계자는 “(당의 공식적인 선거운동은) 김 대표를 비롯해 선거대책위원회 중심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경남 양산에 칩거해온 문 전 대표는 3월 10일 강원도 강릉 유세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22일 경남 창원(허성무 후보·현재 노회찬 정의당 후보로 단일화)을 시작으로, 중·후반부터 당의 열세지역인 동부벨트(강원·영남) 유세에 모습을 드러냈다. 19대 총선 때 사실상 실패했던 ‘낙동강 벨트’ 탈환 작전에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동부벨트를 ‘문풍(문재인 바람)의 교두보’로 만들겠다는 전략적 셈법이 깔렸다. 영남 분열 없이는 대권을 거머쥘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한몫했다.
실제 ‘51.6%(1577만 3128표·박근혜) vs 48%(1469만 2632표·문재인)’의 박빙 승부였던 18대 대선 당시 문 전 대표는 부산·울산·경남에서 ‘마의 40% 벽’을 넘지 못했다. 부산 39.9%(88만 2511표), 울산 39.8%(27만 5451표), 경남 36.3%(72만 4896표)에 그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지역에서 각각 59.8%(132만 4159표), 59.8%(41만 3977표), 63.1%(125만 9174표)를 얻었다.
강원에서도 문 전 대표는 37.5%(34만 870표)로, 62.0%(56만 2876표)의 박 대통령보다 열세였다. 호남과 수도권의 강세를 동부권으로 확산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문 전 대표가 동부벨트 전초기지인 낙동강 벨트에 사활을 건 이유다. 낙동강 벨트는 부산의 사하·갑을을 시작으로 사상, 북·강서갑과 북·강서을, 경남의 김해갑, 김해을, 양산갑과 양산을 등 총 9곳에 달한다. 19대 총선 땐 이 중 부산 사상(문재인)과 사하을(조경태) 경남 김해갑(민홍철), 단 3곳에서만 승리했다.
20대 총선 환경은 더욱 암울하다. 문 전 대표는 배재정 의원에게 지역구를 물려줬고, 조경태 의원은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더민주 한 당직자는 “낙동강 벨트가 문 전 대표의 대권가도 시험대”라고 말했다. 경남 양산갑(송인배)을 비롯해 양산을(서형수), 경남 김해을(김경수), 부산 북·강서을(전재수), 해운대갑(유영민) 등이 ‘문재인 대권가도’의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얘기다.
문 전 대표는 이밖에도 3월 23∼24일 부산·울산을 거쳐 서울 마포을(손혜원), 25일 강원도, 26일 남양주갑(조응천)·을(김한정)·병(최민희), 송파갑(박성수), 27일 분당갑(김병관), 28일 경남 합천·진주·거제, 29일 충남 당진·서산·홍성·논산 등을 방문했다. 사실을 호남을 뺀 전 지역을 다닌 셈이다.
더민주 ‘단독 선대위’ 체제를 꾸린 김종인 대표는 4·13 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개시된 3월 31일 0시 서울 동대문 신평화시장을 시작으로, ‘종로→남대문시장→중구·성동갑→동대문갑→안산→서대문갑·을’ 등 서울 일대에서 집중 유세를 펼쳤다. 1∼2일과 3일에는 전북과 광주, 제주 등지에서 바람몰이에 나선다. 더민주는 선거 막판 광주 등 호남 집중유세를 통합 텃밭 수성에 나설 계획이다. 문 전 대표와 김 대표의 선거전략 차이는 ‘호남 유세’, 딱 하나다.
주목할 부분은 더민주 전·현직 대표의 선거전략이 ‘함수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야권 발 정계개편의 최대 승부처인 호남에서 더민주가 국민의당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면, ‘문재인 역할론’은 축소된다. 호남 없이 승리 없다는 ‘호남 필승론’은 가속페달을 밟게 된다. 호남 필승론이 야권을 강타할 경우 ‘문재인 필패론’은 확전될 수밖에 없다. 총선 정국에서 보폭을 넓히는 손학규 전 더민주 상임고문 등의 영향력이 한층 커지면서 ‘손학규 등판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호남에 약한 고리를 가진 문 전 대표로선 차기 대권도 장담키 어렵다는 얘기다.
단독 체제로 호남을 돌파한 김 대표의 위상도 강화된다. 김 대표는 자신과 가까운 박범계(대전 서구을)·박영선(서울 구로을)·변재일(충북 청원군)·이용빈(광주 광산갑)·이용섭(광주 광산갑)·서형수(경남 양산을)·진영(서울 용산) 후보 중 생환한 이들과 함께 ‘김종인계’를 구축할 것으로 보인다.
호남에서 더민주가 패한다면, 호남 발 북상 전략도 사실상 무력화된다. 전체 지역구(253곳)의 절반가량인 ‘수도권(122곳) 전멸’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 이 경우 호남의 ‘친노 심판론’과 함께 공천 과정에서 터진 계파 갈등이 부각되면서 ‘문재인 한계론’이 부상할 전망이다.
앞서 문 전 대표는 서울 마포을 지역구 유세에 다니면서 “손혜원 후보가 정청래보다 더 크게 이길 것 같죠?”라고 말했다. 불출마하는 자신 대신 동지들의 ‘집단 생환’을 전면에 부각, 이 지점을 잠재적인 자신의 대권 평가의 잣대로 삼은 셈이다.
하지만 이 지점이 문 전 대표의 덫일 수도 있다. 손 후보를 비롯해 자신이 전략 공천한 인사들이 줄줄이 낙선한다면, ‘동지 집단 생환’이란 목표가 문재인 필패론의 진원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김 대표를 비롯해 범비노계는 공천 과정에서 불거진 ‘정체성 논란’을 끌어내 “당 정신 빼고 다 바꾸자”며 패배의 독박을 피하는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문 전 대표의 후방 지원을 둘러싼 ‘막후 정치’ 논란이 야권 내부에서 제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당은 문 전 대표가 선거지원을 할 때마다 “차라리 선거 전면에 나서라”며 맹비난을 가했다. 문 전 대표는 더민주가 패배할 때만 ‘김종인 체제’와 공동운명체로 묶인다는 얘기다. 승리 땐 ‘문재인 필승론’이 얼마나 부각될지 알 수 없다.
반면 김 대표의 길은 열린다. 내각제 등의 개헌 카드도 유효하다. 제한적인 입지에 그친 김 대표가 ‘대망론’의 전진기지 구축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이 친노 멍에를 쓴 문 전 대표의 운명이다.
막판 뒤집기를 위한 승부수는 역시 ‘야권연대’다. 전망은 안개속이다. 각 지역별 후보자 간 연대 성사 여부를 떠나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갈등 핵’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화학적 시너지 효과는 없다. 문 전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는 3월 정국 마지막까지 야권연대를 놓고 대충돌했다.
문 전 대표가 공식 선거운동 개시 직전(30일 저녁)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수도권 지역의 경우 정말 당선될 수 있는 후보가 안철수 대표 본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실정”이라며 야권연대를 고리로 국민의당을 압박했다.
국민의당은 폭발했다. 안 대표는 문 전 대표 발언 다음날 서울 노원구 수락산역에서 출근길 인사를 하던 중 기자들과 만나 “정말 그렇게 간절하게 (단일화를) 바란다면 국민의당 후보 대신에 더민주 후보를 정리하는 게 순서”라고 잘라 말했다.
국민의당 한 관계자는 “탈당 사태 때 손 놓고 있던 문 전 대표가 선거가 임박하자, 야권연대를 외치고 있다”며 “대선 패배에 대해 책임지는 게 먼저”라고 힐난했다. 패배의 그림자는 문 전 대표를 옥죄고 있다. 방법은 남은 기간 화학적 연대를 통한 총선 승리밖에 없다. 그래야만 대선의 기회라도 확보할 수 있다. 키는 국민이 쥐고 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