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7000억 원대로 추정된 현대증권 인수금액은 1조 원대까지 치솟았다. 증권업계 마지막 대형 인수합병(M&A) 매물이란 점을 감안해도 예상 밖의 거액이다. 일요신문DB
이날 매각 주간사인 EY한영 측은 “KB금융과 한국금융이 써낸 가격 차이가 수백억 원 이내로 크지 않았다”며 “순유입액 기준 KB금융이 가장 높은 가격을 써냈다”고 전했다. 앞서 현대그룹은 2월 3일 매각 자문사로 EY한영을 선정하고,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대증권 지분 22.43% 등 22.56%의 ‘물량’을 시장에 내놨다.
이번 인수전에서 KB금융과 한국금융은 각각 1조 원대 초반의 입찰가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인수가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오는 7일 KB금융은 현대상선과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할 예정인데 과거 대우증권 인수전의 선례를 고려하면 가격 공개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지난 25일 KB금융과 한국금융, 홍콩계 사모펀드(PEF) 액티스는 현대증권 매각 본입찰에 참여했다. 이 중 액티스는 이번 인수전의 ‘다크호스’로 부각됐지만 두 금융지주사보다 낮은 입찰가를 써내면서 우선협상대상에서 제외됐다고 전해진다. 업계 일각에선 액티스를 통한 NH투자증권의 우회 입찰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NH투자증권은 30일 “현대증권 인수와 무관하다”며 선을 그었다.
당초 7000억 원대로 추정된 현대증권 인수금액은 1조 원대까지 치솟았다. 증권업계 마지막 대형 인수합병(M&A) 매물이란 점을 감안해도 예상 밖의 거액이다. 입찰을 따낸 KB금융 측은 지난 1일 통화에서 “이사회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과감한 전략을 세워 입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한국금융의 인수 가능성에 단체행동을 준비하던 현대증권 노동조합도 이번 심사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본입찰 결과 발표 당일(31일) 오전 현대증권 노조는 ‘한국금융으로의 매각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사측에 전달했다. 같은 날 현대증권 새 주인이 KB금융으로 확정되자 노조는 예고한 집회를 취소했다.
이처럼 인수자와 인수대상자 모두 만족하는 딜이지만 업계 일각에선 처음부터 매각자 측의 ‘복심’이 특정 회사에 쏠려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현대증권 우선매수권을 가진 현대엘리베이터는 ‘진성 매각’을 명분으로 지난 24일 입찰에 참여했다. 이때 현대엘리베이터가 써낸 가격은 본입찰 가격의 마지노선이 됐다. 현대그룹이 현대엘리베이터를 통해 ‘특정 입찰자’를 견제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25일 본입찰에서 KB금융과 한국금융은 모두 현대엘리베이터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액티스의 입찰가는 1조 원을 넘겼다는 설부터 1조 원에 못 미쳤을 것이란 추정까지 다양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액티스가 두 거대 금융지주사와의 가격 경쟁에서 일찌감치 밀려났다는 것이다.
최종 인수 후보자 결정이 예고됐던 29일 EY한영은 돌연 우선협상대상자 발표를 연기했다. 30일 오전으로 미뤄졌던 발표는 4월 1일까지 추가 연기됐다. 현대그룹 측은 1일 “언론보도에 나왔듯 매각자 측이 계약서 초안에 담긴 문구 수정을 요구하는 등 서류 보완이 이뤄져 최종 발표가 미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증권 인수 우선협상대상자가 된 KB금융 측은 “이사회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과감한 전략을 세워 입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일요신문DB
매각자 측이 발표 기한을 미루면서 투자업계에선 그 배경을 놓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입찰에 참여한 3사간 가격 비교가 끝난 시점(29일)에도 매각 주간사는 인수 후보자를 결정하지 못했다. EY한영 측은 31일 KB금융의 손을 들면서 “비가격적 요소를 꼼꼼하게 따졌으나 이 부분에서도 대등해 가격 조건으로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KB금융과 한국금융의 거래종결 능력은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 현금 유입의 신속성은 KB국민은행을 보유한 KB금융이 앞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입찰 심사의 또 다른 기준인 할인 조건이 비슷하다면 KB금융에 보다 유리한 인수전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의문은 한국금융이 이 같은 사정을 계산하지 않고 입찰가를 써냈겠느냐는 것이다. KB금융 측은 “우리의 입찰가는 비공개”라고 답했다. 1일 한국금융은 이번 입찰 결과에 대한 공식입장을 발표하기로 했지만 실제 발표가 이뤄지진 않았다. 지난해 한국금융은 대우증권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신 후 입장 발표 없이 결과를 수용했다.
앞서 복수의 정보 관계자들은 지난 2월 중순께 “현 회장이 청와대에서 PP를 만났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현 회장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PP는 박근혜 대통령(President Park)을 뜻한다. 당시 사정가는 경색된 남북관계 때문에 현 회장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현대그룹은 현대상선 발 유동성 위기로 같은 달 3일 현대증권 매각을 공고하고 ‘몸값 띄우기’에 힘을 기울인 상태였다. 또 이 무렵 KB금융은 대형 증권사 인수전에서 잇따라 탈락하며 비은행 강화 전략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만약 KB금융이 고가에 현대증권을 인수하면 서로 ‘윈윈’이 되는 셈이었다. KB금융 회장 선임에는 정치권의 입김이 닿는다는 게 정설이다.
앞서 KB금융지주는 대우증권 인수전 당시 최저가를 써내 체면을 구긴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인수전에선 1조 원을 베팅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이 같은 사전 교감설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그 말대로 인수자가 사전 내정돼 있었다면 매각자가 왜 발표를 며칠씩 미뤘겠느냐”며 “터무니없는 얘기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KB금융지주 측도 “처음 듣는 얘기”라며 부인했다.
만약 한국금융이 현대증권을 인수했다면 자기자본 규모만 6조 5000억 원대에 달해 7조원 대 규모인 미래에셋대우증권과 ‘빅2’를 형성했을 것이다. 박현주 미래에셋대우증권 회장은 호남 출신(광주),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부회장도 호남 출신(강진)으로 알려져 있다. TK(대구·경북)가 우세한 권력지형에서 이들의 양강 구도는 ‘원치 않는 시나리오’였을 것이란 추측도 나온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