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동계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 마지막 코너를 돌던 중 미국의 안톤 오노(왼쪽), 캐나다의 매튜 투르코(가운데)와 뒤엉켜 넘어진 안현수. 연합뉴스 | ||
나이 어린 ‘초짜’를 위해 연맹과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인 전명규 감독은 자신의 이미지에 먹칠하는 악소문이 나돌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솔직히 부모 입장에선 그런 전 감독이 새삼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터라 선입견만 가지고 그 분을 대했는데 현수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준 부분이 너무 고마울 따름이었다. 솔직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소문 때문에 연락조차 하기 어려웠다.
‘막내’인 현수는 선배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때문에 이런 저런 잡음이 일고 있는 걸 아는 상황에서 마음 편히 운동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1000m 예선을 거쳐 결승까지 올라가는 장면에선 가슴이 먹먹할 정도였다. 나중에 현수 얘기로는 1등은 어렵고 2, 3등을 목표로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레이스 도중 오노와 리자준이 몸 싸움을 벌이다 리자준이 넘어지고 말았다. 마지막 코너에서 뭔가 빛이 보이는 느낌이 든 현수는 오노를 치고 나갈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오노의 손이 현수의 발에 닿았고 순간적으로 페이스를 잃은 현수는 넘어지면서 나머지 선수 모두가 우르르 넘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노가 실격돼야 정상이지만 심판은 리자준을 실격 처리했고 1등을 할 수 있었던 현수는 경험 미숙으로 실수를 범해 4위에 만족해야 했다. 만약 현수가 조금만 경험이 있었다면 그 순간에 눈치 볼 것 없이 치고 나갔을 것이다. 찰나의 고민이 금메달을 눈 앞에서 잃어버린 결과를 낳았고 이 일에 대해선 현수보다도 전 감독이 두고두고 가슴 아파했다.
1500m는 원래 민룡이 출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민룡이 경기 초반 부상으로 개인전 출전이 어렵게 돼 생각지도 못한 현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불운은 거듭됐다. 다른 선수를 치고 나가다 엎어져 실격처리가 되고 만 것. 그날 현수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선 통곡을 했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전 감독이 대로했다고 한다.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에서다.
어린 자식이 저 멀리 이국 땅에서 메달 경쟁을 벌이며 마음 고생 몸 고생 하는 걸 생각하면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애비 입장에선 지금의 모습도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욕심을 부리는 건 무리라고 마음먹으니까 홀가분했다. 그러나 메달 하나 따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현수는 달랐다. 마치 독이 오른 표정이었다. 실력도 중요했지만 경험은 더 중요했다. 온갖 반칙이 난무하는 링크에서 어떻게 하면 교묘하게 태클을 피해가 자신만의 레이스를 펼칠 수 있는지가 숙제였다.
이후 현수는 세계선수권대회와 동계아시안게임 등에 나가 2002년 올림픽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고 한층 안정된 플레이로 하나둘씩 메달을 쌓아갔다.
지금은 대표팀에서 물러난 전명규 교수가 하루는 이런 얘기를 던졌다. 자신이 점찍은 선수들 중 가장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사람이 현수라고. (김)동성이처럼 좋은 체격과 화려한 자질을 갖진 못했지만 현수는 성실하다는 게 장점이란 평가다. 내 자식이지만 현수의 훈련에 대한 열정과 목표를 향한 도전 정신은 정말 칭찬할 만하다. 주위의 칭찬과 환대에 조금은 우쭐대고 스타 의식에 사로잡힐 수도 있지만 현수한테선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현수와 오노와의 관계에 많이들 궁금해 한다. 안톤 오노가 한국 쇼트트랙사에 ‘스캔들 메이커’로 자리한 까닭에 김동성과 오노보다 현수와 오노와의 사이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주 절친한 사이다. 특히 2006 토리노올림픽 이후 더 가까워졌다. 오노가 토리노올림픽이 끝나고 은퇴 의사를 밝혔을 때 가장 안타까워했던 사람이 현수다. 경쟁자가 있어야 운동할 맛이 나는 게 스포츠 세계다. 리자준이 힘을 잃은 상황에서 오노까지 빠지면 현수에게 동기 부여할 수 있는 경쟁자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인지 현수는 은근히 오노가 은퇴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얼마 전 오노가 한국에서 현수와 함께 훈련하고 싶다는 의사를 건네 왔다고 한다. 그리고 오는 10월 전주에서 열리는 세계쇼트트랙 월드컵대회에 오노가 참가한다고 하니 현수가 더욱 의욕적으로 훈련을 매달리고 있다. 라이벌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