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감독위원의 진짜 역할은?
경기감독위원 제도는 1997시즌에 처음 시행됐다. 사실 ‘비’보다 경기감독위원과 더 관련이 깊은 단어는 ‘심판’이다. 경기 중의 판정이야 심판들이 하지만, 심판 판정을 감시하는 역할도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경기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자리가 생겨난 것이다. 초대 경기감독위원은 심판위원 출신인 오광소(당시 54세)·김양경 씨(당시 50세)와 배성서(당시 53세)·박용진 전 프로야구 감독(당시 49세)이었다. 이후 프로야구 경기감독위원은 전직 감독과 심판위원장 출신들이 주로 맡아왔다. ‘전관예우’ 차원이라기보다, 감독과 심판 출신만큼 경기 전체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아서다.
사실 경기감독위원의 업무에 대해서는 비가 오는 날 경기 진행 여부를 판단하는 것 외에 잘 알려진 바가 없다. 많은 야구팬이 “경기감독위원은 좋은 자리에 앉아 야구를 보다 집에 가는 편한 직업 아닌가”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경기감독위원을 경험했던 A 전직 감독은 이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일단 경기감독위원은 앞서 언급했듯 심판을 ‘심판’한다. 심판 판정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경기 내내 살핀다. 심판 연봉 고과도 경기감독위원이 매긴다. 연말 연봉 산정 때도 당연히 참여한다. 경기 도중 벤치 클리어링이나 감독 혹은 선수의 퇴장과 같은 사안이 벌어졌을 때, 상벌위원회에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는 것도 경기감독위원의 몫이다.
상벌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선수의 징계 여부와 수위를 결정한다. 이뿐만 아니다. 흔히 ‘비디오 판독’이라 부르는 심판 합의판정에 경기감독관도 참여한다. KBO리그 규정에는 경기에 출장하는 심판팀의 팀장, 감독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심판, 대기심, KBO 경기운영위원까지 총 4인을 심판합의판정의 책임자로 명시했다. 각 구장 경기감독위원실이 심판실과 바로 붙어 있는 이유다. 이 외에도 경기 도중 각종 시설 문제로 진행에 지장이 생기면, 경기감독위원과 심판이 상의해 경기 속개 여부를 결정한다.
애로사항도 많다. 일단 늘 혼자 한다. 지방 경기의 경우 KBO에서 교통비와 숙박비 등이 나온다. 감독 출신의 경기운영위원이라면 널찍한 구단 버스와 특급 호텔 대신, KTX나 고속버스 같은 대중교통과 모텔급 숙소를 이용해야 한다. 출장 짐을 아무리 간단하게 싸더라도 직접 들고 여기저기 이동하는 건 그리 편하지 않다. 한 경기감독위원은 “그냥 어슬렁어슬렁 야구장 다니면서 좋은 데서 야구 보고 그러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고 했다.
#비와 경기운영위원의 이야기
물론 여전히 ‘비’와 경기운영위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일단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경기감독위원의 부담감과 업무량은 더 늘어난다. 평소에는 경기 시작 1시간 30분 정도 여유를 두고 출근해 경기장 전체 상황을 살피면 되지만, 비가 예보된 날에는 3시간 전(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경기 취소 결정은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 할 수 있다)에 야구장에 도착해 끊임없이 기상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
그냥 눈으로 어림짐작하는 것도 아니다. A 전 감독은 “KBO가 전국 야구장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과 긴밀한 공조 관계를 취한다”며 “공항은 비행기의 이·착륙을 관리하기 때문에 기상청 이상으로 날씨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잠실구장의 기상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공군 성남기지에 있는 서울공항에 협조를 구하는 식이다. KBO에 올리는 보고서에는 기상청 일기예보 외에 인근 공항이 예측한 날씨 관련 사항이 반드시 포함된다.
구단에 소속된 경기관리인을 만나 협의도 해야 한다. 대부분 각 팀의 단장이 경기관리인을 맡고, 부재시에는 각 구단 부장급 이상의 대리인을 따로 둔다. 시즌을 시작하기 전에 관리인과 대리인을 미리 정해 KBO 규정에 명시한다. 경기감독위원이 경기 강행과 취소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경기관리인과 상의를 거치게 돼 있다. 이 과정에서 각 구단의 ‘민원’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전날 밤늦게까지 연장전을 치러 투수들을 거의 소진한 팀, 선발 로테이션에 구멍이 난 팀, 상대 에이스와 맞붙는데 5선발을 내보내게 돼 최대한 경기를 피하고 싶은 팀, 최근 연패에 빠져 분위기가 좋지 않은 팀들이 주로 그렇다.
비가 조금만 내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구단 관계자가 경기감독위원실 문을 두드린다. “이 정도면 취소시켜도 되지 않느냐”고 계속 찔러 본다. 가끔은 그날의 담당 경기감독위원과 인연이 있는 선수들이 장난스럽게 ‘읍소’할 때도 있다.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을 치는 여름에는 더 그렇다. 그래도 두 팀의 이해관계가 같으면 그나마 다행. 어떤 날은 양 팀 관계자가 동시에 찾아와 “경기 하자”, “경기 하지 말자”고 서로 다른 소리를 할 때도 있다.
한때는 구단들의 우는 소리가 그대로 반영되던 시절도 있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비가 조금만 내리면 선심 쓰듯 취소 결정을 내려주는 인사들도 일부 존재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게 통하지 않는다. 곧바로 성난 야구팬들의 철퇴가 떨어진다. 이 때문에 경기운영위원들은 공항에 전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일기예보 애플리케이션을 휴대전화에 깔아 놓고 수시로 체크해야 한다.
B 경기감독위원은 “원래 통화와 문자메시지만 되는 옛날식 전화기를 사용하다가 일기예보를 보는 게 불편해서 스마트폰으로 바꿨다”며 “지금 비가 내리느냐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비가 계속 올 것인지, 아니면 경기 시작 즈음 그칠 것인지도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장 운이 없는 케이스는 경기 취소 결정 직후 비만 그치는 게 아니라 하늘까지 맑아질 때다. 그럴 땐 그 야구장의 경기감독위원이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A 전 감독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취소했는데, 꼭 그 직후에 날씨가 갤 때가 있다. 예보에도 분명히 비가 더 온다고 했는데, 그런 상황을 미리 알 수 없지 않느냐”고 한탄했다. 또 다른 전직 경기감독위원 C 씨도 “웬만하면 늦게까지 기다려서 경기를 하려고 하지만, 비가 실제로 내리지 않더라도 그라운드 상태 때문에 취소해야 할 때도 많다. 아무리 배수가 잘되는 야구장이 많다 해도, 선수들의 부상 위험은 고려해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한 경기감독위원은 2년 전 비슷한 상황으로 곤욕을 치렀다. 오후 5시부터 하늘이 내려앉을 듯 시커멓고 폭우가 계속 쏟아져서 경기 취소를 선언했는데, 오후 6시쯤 퇴근하려고 야구장 밖으로 나오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환해져 있었다. 그야말로 망연자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경기감독위원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맑아진 하늘을 보며 야구장으로 향하던 팬들이 어느새 경기감독위원의 이름까지 파악하고 ‘분노의 검색’을 시작한 것이다. 그 위원은 나중에 “비가 그렇게 많이 왔고 다들 내 손이 엑스(X) 자를 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김재박 위원의 징계와 그 효과
이런 일이 한두 번 벌어지면, 경기감독위원들은 이전보다 더 신중해진다. 특히 지난해에는 시즌 초중반 우천 취소가 너무 많아 KBO가 시즌 막바지 잔여일정과 포스트시즌, 국제대회 프리미어12 관련 일정을 짜는 데 애를 먹었다. 올해 KBO가 ‘시즌 초반부터 우천 취소 결정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경기감독위원들에게 권고했던 이유다. 그러나 개막하자마자 비 때문에 경기감독위원이 징계를 받는 일이 터졌다. 경기운영위원장인 김재박 경기감독위원이 그 장본인이었다.
김재박 경기감독위원이 경기를 거행할 수 있음에도 우천 취소 결정을 내렸다는 이유로 6경기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받았다. 채널A 뉴스 화면 캡처.
김 위원장은 개막 3연전 마지막 경기인 4월 3일 잠실 LG-한화전을 앞두고 비가 아침부터 오락가락하자 고심 끝에 경기 시작 32분 전인 오후 1시 28분에 취소 결정을 내렸다. 문제는 이 게임이 일요일 낮경기인 데다 이미 예매로만 1만 9000장이 팔려나가면서 수많은 팬들이 야구장 안에 입장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팬이 많은 LG와 최근 최고의 인기팀인 한화가 맞붙은 터라 앞선 2경기에 이어 이 경기도 매진이 예상됐다. 조마조마하며 경기 개시만을 기다리던 팬들은 빗줄기가 거의 잦아든 시점에 경기 취소가 결정되자 불같이 달아올랐다.
전날까지 이틀 연속 연장 혈투를 펼친 두 팀의 경기 취소 부탁을 김 위원장이 받아들인 게 아니냐는 의혹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 위원이 평소 우천 취소를 빨리, 자주 결정하는 경기감독위원으로 유명했던 점도 팬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게다가 잠실과 기상 상태가 비슷했던 문학구장에서는 경기가 차질 없이 열려 더 논란이 됐다. KBO와 양 구단에 항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결국 KBO는 이례적으로 다음날 김 위원에게 6경기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내렸다. KBO는 “김 위원장은 우천에 따른 조기 방수 조치가 미흡했고, 관객 입장 이후 그라운드 정리를 통해 경기를 거행할 수 있음에도 우천 취소를 결정해 경기장에 입장한 관중에게 불편함과 혼선을 일으켰다”고 제재 이유를 설명했다. 예전에는 비나 그라운드 컨디션 같은 문제가 경기 취소 판단의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팬들의 편의’를 더 먼저 고려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징계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6일 광주 KIA-LG전이 좋은 예다. 야구장에는 오후 2시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오후 5시가 넘어가면서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이미 취소 결정이 내려지고도 남았을 정도의 비였다. 그러나 경기 강행 혹은 취소 여부는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일단 플레이볼이 선언되면 경기 강행 여부 결정 권한이 경기감독위원의 손을 떠나 심판진의 몫으로 넘어간다. 결국 시간은 오후 6시30분을 넘겼고, 오후 6시41분에야 심판진의 결정에 따라 우천 취소가 확정됐다. 팬들이 오히려 이번에는 “빨리 결정 해달라”고 항의할 만큼 이례적인 풍경이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우린 비가 와도 ‘끝까지 간다’ 메이저리그선 ‘우천취소’ 흔치 않은 까닭 메이저리그에는 ‘우천 취소’라는 단어가 흔치 않다. ‘웬만하면 경기를 한다’고 보면 된다. 시범경기야 선수들의 부상 위험 탓에 종종 취소되곤 하지만, 정규시즌 경기는 그렇지 않다. 경기시작 시간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야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기다렸다가 그냥 한다. 메이저리그 팬들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이다. 양대 리그 30개 팀이 경기를 치르는 탓에 한번 취소되면 다시 일정을 짜기 어려운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팬들과의 약속은 가능한 한 꼭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게 메이저리그 사고방식이다. 4월 5일(한국시간) 오리올파크에서 펼쳐진 볼티모어와 미네소타의 시즌 개막전이 좋은 예다. 때마침 볼티모어 김현수와 미네소타 박병호의 만남으로 한국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던 경기였다. 이 경기 소요 시간은 총 5시간 44분. 비 때문이다. ‘우중 혈투’였다. 두 차례나 게임이 지연됐다. 홈팀인 볼티모어의 경기 전 개막 행사가 끝났지만, 비가 계속 내리고 바람이 몰아쳐 경기 개시가 계속 연기됐다. 결국 예정보다 1시간 40분 정도 지나서야 플레이볼이 선언됐다. 그러나 미네소타의 3회 공격을 앞두고 빗줄기는 다시 강해졌다. 두 번째 우천 중단. 구장 내야 전체에 다시 방수포가 덮였다.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팬들은 야구장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1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경기는 그 순간 다시 속개됐다. 총 소요 시간 5시간 44분. 그 가운데 실제 경기 시간은 2시간 50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3시간 가까운 대기시간보다, 팬들이 겨우내 야구를 기다린 시간이 더 길었다. 대신 볼티모어와 미네소타 선수들은 빗속에서 야구장을 지킨 팬들에게 명승부를 선사했다. 9회초까지 2-2 팽팽한 승부를 이어갔고, 볼티모어가 매트 위터스의 끝내기 안타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 경기는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벌어진 김재박 경기감독위원의 징계 사건과 맞물려 더 큰 경종을 울렸다. 비가 내려도 경기는 계속되고, 한 번 시작한 승부는 끝까지 내야 한다는 믿음은 더 많은 팬들을 야구장으로 이끄는 비결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