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택배사 직원이 소화물 취급소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고성준 기자
‘수상한’ 퀵서비스 업체가 경찰에 적발됐다. 경쟁이 치열한 퀵서비스 업계에서 유일하게 호황을 누리던 곳이었다. 배송 물품은 끊이질 않았고, 그만큼 매출은 수직상승했다. 이 업체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한 물품의 유통을 책임지고 있었다. 배송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규모도 컸다.
해당 퀵서비스 업체 경쟁력의 비밀은 ‘대포통장’이었다. 업체 대표는 자신의 내연녀이자 대포통장 모집 총책인 중국인 오 아무개 씨(여‧34)를 통해 보이스조직과 공모, 대포통장을 배달했다. 나름의 전문분야를 만들어 낸 셈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연계배송’이라는 새로운 유통 과정을 활용했다. 전국 각지의 대포통장 양도자가 퀵서비스로 주거지 인근 터미널에 배송하면, 이를 지역 터미널에서 고속버스 택배를 이용해 서울‧수도권 터미널로 운반됐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대포통장들은 다시 통장 모집책, 또는 인출책에게 퀵서비스로 전달됐다.
이를 통해 업체 대표는 퀵서비스 배송료 외에 건 당 3만 원가량의 수수료를 챙겼다. 또한 하루 평균 수십 건 이상의 연계배송 활동으로 2013년 4월부터 2015년 5월까지 약 6억 원을 벌어들였다.
한 경찰 관계자는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여러 배송단계를 거쳐 범행에 쓸 대포통장을 확보한 것”이라며 “특히 연계배송은 통장 여러 개를 한 번에 확보할 수 있는 데다 빠르게 유통할 수 있어 이런 방법을 활용하는 조직들이 종종 적발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3월 29일에도 앞서와 같은 수법으로 60차례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통장과 카드 등 300여 개를 국내에 있는 현금 인출책에게 넘긴 30대가 검거됐다.
경찰에 적발된 고속버스 택배를 활용한 범죄는 대포통장뿐만이 아니다. 대포폰부터 500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사기 도박단의 사기물품, 대마초, 마약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불법, 유해 물질 등이 택배로 둔갑해 고속버스에 탑승한 승객들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고 또 다시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초기 고속버스 택배는 개인적으로 이뤄졌다. 버스 운전기사에게 편지나 서류 등의 배송을 부탁하고 일종의 수고비를 건네는 방식이었다. 일반 이용자들은 급하게 보내야 할 물품을 하루 만에 전달할 수 있었고, 우체국을 통해 전달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가격도 저렴했다. 고속버스 기사들에게는 꽤 쏠쏠한 부업이기도 했다.
버스 회사들은 고속버스 택배가 점차 관행으로 자리 잡고 수요가 늘어나자,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소화물 운송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고속버스를 이용한 택배 운송이 법제화돼 있지 않아 불법이었지만, 이용객의 편의와 버스 회사 수익이 맞물리면서 암암리에 성행했다. 시작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고속버스 택배는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한 고속버스 터미널 관계자는 “따로 집계를 해보진 않았지만 택배 서비스 이용객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고속버스 택배는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서비스지만, 문제는 이를 이용해 물건을 맡기거나 찾는 과정에서 인적사항 기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범죄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관행으로 이어져온 서비스라 우체국이나 택배 업체를 이용할 때와는 달리 수취인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만 기재하면 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을 통해 운송사업자의 소화물 운송을 합법화하고, 소화물의 허용 규격 및 수신·발신인의 이름과 전화번호 등을 기재하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해 지난 2014년 7월 시행했다.
하지만 확인 결과 여전히 발신‧수취인의 신분을 감출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 고속버스 터미널 소화물 취급소에 방문해 택배로 짐을 부치겠다고 하자, 관계자는 목적지와 전화번호, 이름 등의 간략한 정보만 기재하라고 했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다르게 적어 내고 현금으로 계산을 했지만, 신분증 확인 등 정확한 신원 확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해당 물품의 목적지인 지방의 한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받는 사람의 신원 확인 절차도 없었다. 기자가 보낸 물품을 받은 수취인은 “6자리의 운송장 번호만 말했는 데도 물품을 받을 수 있었다. 별도의 신분 확인 절차는 없었다”고 말했다.
앞서의 경찰 관계자는 “고속버스 택배는 신분을 노출하지 않아도 물건을 ‘안전’하게 옮길 수 있다”라며 “물론 일반 택배 역시 신분을 숨길 수 있지만, 수령지로 직접 배달하는 일반 택배와 달리 고속버스 택배는 버스 터미널에서 받아가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거의 추적이 불가능해진다. 사실상 첩보‧제보가 없으면 단속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그동안 고속버스 택배를 활용하다 적발된 마약사범 가운데 대부분은 적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거래를 했지만 SNS나 익명 메신저를 활용해 연락을 취했을 뿐 서로의 신원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용물 확인이 어려운 점도 고속버스 택배가 범죄에 활용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터미널 측은 “위험한 물건이나 현금, 여권, 유가증권 등은 발송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고지를 하고 있지만, 내용물을 들여다볼 권한은 없어 단순한 권고사항에 불과하다. 택배 물품을 버스 짐칸에 싣고 있던 관계자에게 내용물 확인에 대해 문의했지만 그는 “하루 1000건이 넘는 택배를 취급한다. 모두 포장이 끝나 있어 물건을 일일이 뜯어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앞서의 운수사업법 개정안에 ‘전국 고속버스 터미널에 X선 투시기 등 공항 수준의 화물검색 장비 구비할 것’을 포함했지만 실제로 설치된 곳은 없다.
상황이 이렇지만 국토교통부는 아직까지 뾰족한 대안은 없다는 입장이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X선 투시기 등은 민간 사업자가 직접 비용을 부담해 설치해야 한다. 장비를 갖추면 배송 비용이 덩달아 올라갈 가능성이 있어 업계와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면서도 “터미널 화물 운송은 이용객들이 조금 있는 편이지만, 결국 부수적인 업무다. 그런데다 범죄를 100% 예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고가 장비 설치 등을 이용 편의와 함께 고려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내용물 확인을 위해 전국 터미널에 소형 제품 70~80개를 투입해서 관리하고 있으며, 지자체 운송 약관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인적사항과 운행 기록을 남기는 관리체계를 만들었다. 터미널 점검할 때마다 수시로 확인하고 있다”며 “앞으로 CCTV를 보강하고 보완사항 등을 점검해 시스템 상 고칠 수 있는 부분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