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마포 당사에서 선거상황판에 당선된 후보의 이름표를 붙이고 있다.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13일 오후 6시. 서울 마포 국민의당 당사에서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국민의당이 40석 전후를 차지할 것이란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다. 하지만 정작 안 대표는 묵묵히 박수만 쳤다. 표정의 변화 없이 상당히 침착한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양 볼이 빨개지는 등 상기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총선 결과는 출구조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민의당은 38석을 획득(지역구 25석, 비례대표 13석)하며 단숨에 제3당으로 올라섰다. 제3당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30석을 넘긴 것은 1996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이후 16년 만이다. 안 대표는 총선 직전 “최소 20석, 최대 40석이 목표다.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면 책임을 지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제시한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향후 정국에서 국민의당의 역할이다. 새누리당과 더민주가 모두 과반 획득에 실패하면서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의당의 몸값은 더욱 치솟을 것으로 보인다. 양당이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기에 반드시 국민의당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형국이다.
정치권에서는 국민의당이 반드시 야당 편만 들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여야가 첨예하게 맞섰을 때 사안에 따라 편을 달리하며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국민의당은 여당이 주도해온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북한인권법, 테러방지법 등 처리에 일부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19대 때 여야의 극렬한 대치로 처리되지 못했던 ‘노동5법’은 국민의당이 존재감을 보일 시험대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한 야권 관계자는 “외교, 안보는 여당, 경제, 복지는 야당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며 “국민의당이 어떤 칼을 휘두르냐에 따라 정국의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전했다.
벌써부터 국민의당은 ‘4·13공약평가이행추진특별위원회’와 ‘미래일자리특별위원회’를 만들 것을 여야에 제안하는 등 주도권 선점을 위한 첫발을 뗐다. 안 대표는 14일 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회의에서 “이번 선거는 20대 국회를 제대로 일하는 국회로 만들라는 국민의 명령”이라며 “국민의당부터 총선 정책공약 이행점검단을 설치해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실천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안 대표가 주도권을 잡는 데 있어 당 외부보다 오히려 당 내부를 신경 써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무려 23석의 지역구를 몰아준 호남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호남 맹주’들과 당내 역할 및 주도권을 놓고 쉽지 않은 기싸움을 펼쳐야 한다.
이번 총선에선 목포에서 4선 반열에 오른 박지원 의원을 비롯해 과거 대권주자였던 정동영 전 의원이 재기에 성공했고, 사실상 호남 맹주로 등극한 천정배 공동대표가 모두 생환했다. 3인방을 중심으로 ‘호남 중심성’을 내세우는 호남 세력과 ‘전국정당’을 강조하는 안 대표 측의 갈등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호남 맹주들은 문 닫게 생겼던 국민의당이 호남을 기반으로 돌풍을 일으킨 것을 자신들의 공으로 볼 것이다. 안철수 대표에겐 정국에서 캐스팅보트 역할보다 이 호남 세력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가장 큰 과제가 될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당내 호남맹주들과의 관계설정과 당 정체성 확립이 최대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안 대표는 이번 선거에서 ‘호남 싹쓸이’보다 ‘정당 투표’ 결과에 좀 더 방점을 찍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국정당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셈이다. 안 대표는 14일 “정당 투표 결과가 여러 가지로 저희에게 말씀해주시는 바가 크다고 본다”며 “우선 두 번째로 높은 정당 지지를 보내주셨다는 거, 지역별로 보더라도 수도권에서 서울, 인천, 경기 모두 다 제2당으로 만들어주시고 특히 서울은 새누리당과 차이가 크지 않았다”고 자평했다.
비례대표 정당투표 결과 국민의당은 26.7%의 득표율을 기록해 25.5%의 지지를 받은 더민주보다 1.2%포인트 앞서는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새누리당 지지층을 일부 흡수한 반사효과로 분석된다.
하지만 그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지층을 유지할 수 있는 ‘정체성 확립’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정국에서 막강한 캐스팅보트 역할을 쥐었다지만 자칫하면 별다른 기준이 없는 오락가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 대표의 정치력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는 시각도 그래서 나온다.
1995년 자민련 창당 당시 김종필 전 총리는 7선 의원을 지낸 정치 9단이었다. 자민련이 1996년 15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1997년 15대 대선에서 ‘DJP연합’을 통해 공동 여당의 지위까지 올라간 것에는 김 전 총리의 역할이 컸다. 재선의 안 대표가 제3당의 공고한 지위와 ‘캐스팅보트’라는 칼을 쥐었을 때 어떤 역할을 할지 아직 의문부호를 다는 시각들이 상당하다.
일각에서는 그동안 안 대표가 내세운 ‘정치혁신’의 과제를 선점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캐스팅보트라는 역할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의미다. 만약 캐스팅보트 역할에만 그친다면 국민의당과 안 대표는 여야 독과점 구조 속으로 빠져서 국민들이 원하는 제3당의 역할을 하나도 못할 것”이라며 “독점구조를 깨라고 3당이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안 대표가 나서서 정치혁신, 선거구제 개혁 등을 먼저 들고 나오고 여야가 따라오게 만들어야 진정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