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천수는 “K리그 개막이 다가오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됐다”면서 “이제 누가 K리그 정상에 오를 수 있는지 겨룰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들이대면서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천수다운 것”이란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천수는 분명 모든 일들이 자신한테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했고 후회했다. 그러나 ‘솔직, 당돌, 진심’으로 똘똘 뭉친 이천수의 특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준다면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수렁에 빠진 선수를 아예 헤어나오지조차 못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천수는 이 모든 스트레스를 훈련을 통해 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장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느낀 이래 훈련 시간만 되면 말 그대로 ‘미친듯이’ 훈련에만 몰입한다. 오는 3월 4일 K리그 개막을 앞두고 울산에서 마무리 훈련 중인 이천수를 만나 최근의 심경을 들어봤다.
이천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전보다 말수도 부쩍 줄어들었다. 평소 ‘누나’라는 호칭으로 말을 놓고 편하게 대했던 태도도 존칭을 사용하며 거리감을 두려 애썼다. 이유를 물었더니 ‘말하는 게 무섭다’는 대답이 나왔다. 자신이 말을 할 때마다 이슈가 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며 많이 지쳤다는 고백도 곁들였다. 그래서 ‘말 조심을 하지 그랬느냐’고 충고 아닌 충고를 던지자 허탈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너무 아프다 못해 쓰려서 회복이 더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없이 가볍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천방지축의 이미지는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인터뷰 약속을 해놓고 이렇게 긴장했던 건 처음이에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이상한 말을 내뱉어서 또 다시 여론의 몰매를 맞는 건 아닌지, 내가 한 말이 이상하게 전달돼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는지… 정말 많이 걱정됐어요.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댈까…. 만약 공항에서 했던 말을 박주영이나 박지성 선수가 했다면 그들한테도 그렇게 가혹한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다음부턴 말하기가 싫어졌어요.”
이천수는 어느 팬으로부터 ‘루니(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하면 사랑이고 이천수가 하면 불륜이냐’며 답답함을 호소한 편지를 받고 많은 부분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공항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대해 조심스럽게 설명해 나갔다.
“‘(구단에서 자신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6개월 쉬겠다’고 말한 건 다분히 하소연 섞인 멘트였어요. 그런데 ‘6개월 쉰다’는 부분만 헤드라인으로 뽑아서 이천수를 완전히 ‘문제아’로 만들더라구요. 이젠 누구 원망은 안 해요. 모든 게 제 탓이고 저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니까요.”
이천수는 요즘 네티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박지성과 이천수의 인터뷰 비교’를 빗대어 이번 ‘은퇴 소동’을 이렇게 비유했다.
“만약 (이)영표 형이나 (박)지성이 형이 은퇴 운운 했다면 그날 신문 제목은 아마도 ‘이영표, 박지성 프리미어리그에서 마음 고생 심하다’라고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했기 때문에 ‘폭탄’ ‘충격’이란 단어가 등장하면서 훈련을 볼모로 구단과 싸움을 불사하겠다는 ‘건방진 천수 씨’가 돼 버린 겁니다. 진짜 고민됐어요. 어떻게 해야 부정적인 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갈 수 있을지를. 그런데 이젠 고민 안하려구요. 축구 선수는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되는 거잖아요.”
이천수는 이적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한마디로 잦은 이적 무산이 구단에 대한 불신과 반감으로 작용됐다는 내용이다.
“팬들이 지겨워할 만큼 제 이적 문제는 심심할 때마다 거론됐어요. 그중에서 실제로 진행됐다가 무산된 경우의 대부분이 높은 이적료 때문이거든요. 전 그 부분에 대해 구단과 타협을 하고 싶었어요. 현실적인 몸값을 책정해 주면 그에 맞는 팀을 찾아보겠다고 부탁드리려고 했어요. 한마디로 이천수를 좀 봐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던 거죠. 선수는 구단을 상대로 약자일 수밖에 없잖아요.”
▲ 인터뷰 내내 웃지 않던 이천수가 “이젠 고민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처럼 인터뷰가 끝난 뒤 활짝 웃으며 기자와 포즈를 취했다. | ||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어요. 팀에 복귀하면서 구단 측과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았어요. 이젠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아요. 어차피 물 건너 간 일이잖아요.”
이천수는 이적 문제를 뒤로하고 대표팀에 복귀한 뒤 천금 같은 프리킥을 성공시키며 2007년 베어백호에 첫 승을 선사한 그리스전의 ‘감동’을 회상했다. 그 경기를 통해 핌 베어백 대표팀 감독에 대해 새로운 ‘느낌’을 가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보단 감독님한테 그리스전의 경기 결과가 더 중요했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적 문제로 거의 운동을 하지 못했던 전 제외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도 감독님은 고집스럽게 절 불러 들이셨고 영국에서 제 몸 상태가 50%도 채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 잘 아시면서 주전으로 출전시키셨어요. 골을 성공시킨 뒤 바로 감독님 얼굴을 봤어요. 환하게 웃고 계시더라구요. 가슴에 맺혔던 뭔가가 확 뚫리는 것 같았어요. 감독님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경기를 뛴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천수에게 되돌아가고 싶을 만큼 후회스런 시간들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보낸 1년 6개월이 뼈저리게 후회된다며 이런 고백을 털어 놓았다.
“스페인에 있는 동안 단 한 골도 넣지를 못했어요. 공격수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거죠. 골이 터지지 않으니까 집착만 늘어서 경기장에 들어서면 침착한 플레이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골을 터뜨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절 많이도 망가뜨렸어요. 만약 지금 스페인에 진출한다면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뭣 모르고 빅리그에 진출해서 쓴맛, 신맛, 떫은 맛까지 잔뜩 맛보고 정말 ‘고개 숙이고’ 돌아왔어요.”
이천수는 위건행이 결렬되면서 미들즈브러에 입단한 이동국이 참으로 부러웠다고 한다. ‘6개월 만에 뒤바뀐 운명’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남는 자와 떠나는 자의 엄청난 차이를 또 다시 되새김질했다.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만 있다면 이적 문제를 여유있게 설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절정의 기량을 가지고 최고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간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이천수는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자신의 목표와 조금씩 멀어지는 현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괴롭기만 하다.
“해외 진출은 운명인 것 같아요. 지금까진 그 운명이 저에게 전달되지 않았나 봐요. 대신 K리그 개막이 다가오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됐어요. 이번 시즌은 (안)정환이 형과 (고)종수 형을 볼 수 있어서 저 또한 묘한 설렘이 있어요. 최고를 가려야죠. 저를 포함해서 모두 MVP 수상자들인데 누가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 겨뤄 보고 싶어요. 이런 모습이 이천수다운 거잖아요. 이렇게 들이대면서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저 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