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정신을 상징하는 대형 SUV는 강인한 남성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시가 발달하고 시골마을조차 도로가 잘 닦인 오늘날 진짜 오지가 아니면 필요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넉넉한 공간과 넘치는 힘, 견고한 보디에서 나오는 안정감은 대형 SUV를 찾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소다.
국내에서는 기아자동차 모하비(4025만~4744만 원)가 유일하게 플래그십 SUV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프레임타입의 SUV는 모하비와 쌍용자동차 렉스턴·코란도 스포츠(트럭으로 분류)뿐이다. 나머지 SUV와 모든 종류의 세단은 프레임타입이 아닌 모노코크 방식의 섀시다.
프레임타입 보디는 사다리 모양 프레임에 엔진·변속기·구동축·바퀴를 장착할 수 있다.
프레임타입은 사다리 모양의 프레임에 엔진·변속기·바퀴가 달린다. 탑승공간·외관은 별도로 장착된다. 자동차 섀시는 대개 1㎜ 안팎의 두께를 지닌 철판으로 만들지만, 프레임은 그보다 두꺼운 철로 만들어서 무겁다. 연비가 떨어지고 승차감이 투박하다.
모노코크 보디는 외관을 지탱하는 섀시에 엔진·변속기·구동축·바퀴가 장착된다.
반면 모노코크는 껍질, 즉 외관이 프레임까지 겸하는 방식이다. 옛날 건물들을 보면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선 기둥이 많아야 했지만, 최근 건물들은 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기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즉 외벽이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 역할까지 겸하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모노코크 방식은 섀시에 파워트레인(엔진·변속기·바퀴 등)이 직접 장착되는 구조다. 별도 프레임이 없으므로 제작비가 싸고, 가볍고, 승차감도 우수하다.
과거에는 ‘세단은 모노코크, SUV는 프레임타입’이라는 공식이 존재했지만, 재료기술의 발달로 모노코크 방식으로도 충분히 오프로드가 요구하는 강성을 구현할 수 있게 됐다. ‘SUV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도 모노코크 방식이다. 지금까지 국내 메이커 차량 중 프레임 방식이 적용된 차는 쌍용차 렉스턴·무쏘·코란도·액티언, 현대차 테라칸·갤로퍼, 기아 모하비와 구형 쏘렌토 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프레임타입 SUV는 ‘오프로드의 영혼’이라는 상징적 의미만 남아 있다. 기아차 모하비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 SUV의 자존심이라고 할 만하다. 전장 4.93m, 전폭 1.915m의 대형 사이즈, 후륜구동 베이스(엔진 세로배치)의 4륜구동, 프레임타입 섀시를 갖추고 있어서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프레임타입 방식의 정통 SUV인 기아자동차 모하비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모노코크가 대세지만 프레임타입이 선택되는 이유는 자동차 성능이 상향 평준화돼 차별화가 어렵고, 대신 메이커가 추구하는 ‘정신(spirit)’을 구매하려는 것이 소비자들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모하비는 지난해 9월 유로6 기준을 맞추지 못해 단종됐다가 올해 2월 22일 새로운 엔진을 장착하고 재출시됐다. 단종 기간 동안 계약대수는 무려 4500대인데, 2008년 출시 이후 연 1000대 안팎이 팔린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인기다.
지난해 8월 단종 이후 새 모델을 내놓지 않고 있는 현대자동차 베라크루즈는 정통 SUV가 되기에 뭔가 모자랐다.
현재 단종된 베라크루즈는 현대자동차를 대표하는 SUV였지만 전륜구동 베이스(엔진 가로배치), 모노코크 섀시라는 점에서 정통 SUV가 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SUV의 인기가 치솟는 요즘, 현대·기아차가 베라크루즈를 단종시킨 대신 모하비에 집중해 새로운 엔진을 장착한 마이너 체인지 모델을 올해 내놓은 것은 베라크루즈가 SUV로서의 매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베라크루즈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기준이 강화된 유로6에 부합하지 못해 지난해 단종됐다.
또 다른 이유는 향후 제네시스 급에 장착할 승용디젤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엔진이 꾸준히 생산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베라크루즈에 장착된 전륜구동형 3.0ℓ 디젤엔진은 활용도가 떨어진다. 유로6 기준을 충족하는 엔진을 개발해도 현대·기아차 전체 라인업 중 오로지 베라크루즈에만 써야 한다. 개발비가 부담될 수 있다. 반면 후륜구동형 3.0ℓ 디젤엔진은 향후 제네시스, EQ900 등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미 BMW,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등은 10년 전부터 기함급 세단에 디젤엔진 사양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쌍용자동차 렉스턴W(2818만~3876만 원)은 정통 SUV의 명맥을 잇는 또 다른 모델이다. 프레임타입 섀시, 후륜구동 베이스의 4륜구동 파워트레인을 갖추고 있다. 다만 2008년 출시된 모하비와 달리 2000년 출시된 렉스턴은 쌍용자동차의 주인이 대우자동차, 상하이기차, 마힌드라로 바뀌면서 부침을 겪는 가운데 후속모델이 나오지 않아 옛 방식이 아직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프레임타입이었던 코란도 후속으로 나온 코란도C에서는 모노코크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현재 판매 중인 렉스턴W는 2.2ℓ 디젤엔진이 장착돼 3.0ℓ 디젤엔진을 얹은 모하비보다 파워는 떨어지는 편이다. 쌍용차는 올해 말 렉스턴W 후속 차량을 출시할 계획이다. 2013년 발표한 콘셉트카 LIV-1으로 미뤄보면 기존의 투박한 모습보다 다소 날렵한 모습으로 짐작된다. 쌍용차 측은 프레임 보디를 유지할 계획이라고 해 새로운 정통 SUV의 탄생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굳이 프레임타입이 아니더라도 국내 메이커를 대표하는 정통 SUV가 모하비, 렉스턴W 2대밖에 없다는 점은 아쉬움이다. 한국GM, 르노삼성은 전체 판매량이 많지 않아 틈새 모델보다는 중형·준대형 세단처럼 많이 팔리는 주력 모델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다. 쌍용차는 SUV가 주력이기 때문에 정통 SUV를 판매할 수 있었다.
국내 메이커들의 SUV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식 수입된 수입차로 눈을 돌려야 한다. 가격대별로 닛산 패스파인더(5240만 원), 혼다 파일럿(5460만 원), 포드 익스플로러(5540만~5690만 원), 지프 그랜드 체로키(6870만~8000만 원), 폭스바겐 투아렉(7720만~9750만 원), 랜드로버 디스커버리4(8180만~9660만 원)를 고를 수 있다. 1억 원이 넘는 가격대에서는 인피니티 QX90(1억 2030만 원), 랜드로버 레인지로버(1억 6780만~2억 420만 원)와 같은 프리미엄급 SUV가 있다. 랜드로버와 지프는 모노코크 방식에 제한적인 프레임을 적용한 유니프레임을 적용하고 있다.
닛산 패스파인더는 길이(전장)가 무려 5m가 넘는다(5010㎜). 5m가 넘는 것으로는 QX90이 있는데, 무려 5305㎜다. QX90은 전폭(너비)도 2030㎜, 전고(높이)도 1925㎜로 미니버스에 가까운 덩치다.
일본·미국계 SUV의 특징은 패스파인더, 파일럿, 익스플로러, QX90 모두 가솔린 엔진이라는 점이다. 일본과 미국 메이커들은 승용차에 디젤엔진을 장착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반면 디젤엔진은 한국과 유럽에서 인기가 있는 편이다. 한국산 모하비, 렉스턴W, 독일 브랜드 투아렉, 영국 브랜드 레인지로버, 디스커버리4는 모두 디젤엔진이 주축이다. 미국산 그랜드 체로키는 가솔린과 디젤 모두 선택 가능하다.
수입산 대형 SUV들이 국내 판매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모하비라는 한국 대표 SUV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통 SUV라는 면에서 수입산들이 오히려 한국산보다 매력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SUV는 디젤’이라는 한국인들의 입맛 때문에 가솔린 모델은 판매가 더욱 요원하다. 바꿔 말하면 ‘프레임타입+디젤엔진’ 조합 모하비가 해외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종국 자동차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