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소야대 국회가 되면서 임종룡 위원장이 추진하는 금융개혁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월 증권시장 개장식에서 발언하는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당장 박근혜 대통령의 4대 개혁과제 가운데 임 위원장이 책임을 맡은 ‘금융개혁’이 올스톱될 위기를 맞았고, 인터넷은행과 성과주의 도입 등도 불투명한 상황이 됐다. 게다가 금융위 조직 내부에서도 ‘복지부동’이 고개를 드는 등 레임덕 현상마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4·13총선 다음날인 지난 14일 금융위원회는 금융권 임원들을 불러 모아 진행하려던 회의 일정 가운데 일부를 갑작스럽게 취소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4대개혁 과제 가운데 하나이자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틈만 나면 강조하는 ‘금융개혁’ 관련 내용을 다룰 예정이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정을 비웠다는 한 금융사 고위 임원은 “사전 통보도 없었고, 취소 이유에 대한 설명도 딱히 없었다”면서 “아무래도 전날 선거 패배의 충격이 금융위에 미친 것 아닌가 짐작된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여당이 참패하고 정치판이 새로 짜이니 금융위 공직자들도 신경이 업무보다 그쪽에 가 있는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요즘 서울 세종로 프레스센터에 위치한 금융위원회 내부에서는 ‘입조심, 몸조심’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총선 참패로 여소야대 정국이 예고되자 금융위 공직자들의 몸 사리기가 시작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임 위원장은 요즘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가뜩이나 선거 패배로 금융개혁 관련 법안들의 국회 통과가 어렵게 된 마당에 부하직원들마저 복지부동 조짐을 보이면서 자칫 금융개혁이 좌초할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감돌고 있다.
금융권에는 이미 ‘금융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성과주의 도입이나 인터넷은행 연내 출범 등 금융개혁의 핵심 내용들은 관련 법안 통과 없이 불가능한데, 이를 관장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번 선거에서 대거 낙선했기 때문이다.
제19대 국회 정무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은 총 12명이었다. 24명인 정무위 의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데다 새누리당 출신인 무소속 김태환 의원까지 더하면 정부 측 ‘아군’이 과반을 넘겨 법안발의에는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로 12명의 새누리당 의원 중 6명이 떨어져나가면서 정무위는 야당 의원들이 장악할 전망이다. 게다가 20대 국회에서는 기존 여당 의원들마저 대거 교체될 것으로 알려져 있어 임 위원장은 금융개혁 법안 통과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처지다.
금융권에서는 새로운 정무위 소속 의원들을 만나고 법안 통과를 설득하는 작업을 박 대통령 임기 내에는 사실상 끝내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야당 의원들이 이미 관련 법안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임 위원장이 금융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국회의 힘을 빌려야 하는 현안은 크게 두 가지다. 은산분리(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완화를 위한 법안 개정과 성과주의 정착이 주요 쟁점들인데, 이 두 사안은 모두 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있다.
우선 은산분리 완화는 산업자본이 보유할 수 있는 은행지분을 현행 4%에서 50%까지 늘리는 것이 골자다. 이는 당초 올해 출범키로 했던 인터넷은행의 규제를 완화하기 위해 추진한 것으로, 카카오나 KT 같은 ICT기업이 인터넷은행의 대주주가 돼 주도권을 쥘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임 위원장은 총선을 불과 1주일 앞둔 지난 6일 열린 정례 언론 간담회에서도 “인터넷은행이 제 기능을 하려면 은산분리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며 “은행법을 개정해 혁신적인 IT기업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할 만큼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야당의 입장은 단호했다. 정무위 간사를 맡고 있는 김기식 더불어민주당(더민주) 의원은 임 위원장의 간담회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SNS를 통해 “19대 국회 임기 내에 은행법 개정안 등 관련 법안의 처리는 없을 것“이라고 대못을 박았다. 그는 “은산분리는 더민주의 당론이며,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180석을 넘기지 않는 한 이 원칙은 지켜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금융권은 이 때문에 인터넷은행이 올해 안에 출범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20대 국회 임기가 5월 30일에야 시작되고 상임위 구성과 위원장 선임 등이 이뤄지려면 빨라야 7월에나 국회 활동이 시작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9월에 국정감사가 예정돼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올해는 법안심사조차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임종룡 위원장조차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임 위원장은 “인터넷전문은행 출범 시기가 올해 하반기보다 늦어질 수 있다”며 은행법 개정이 힘들어졌음을 사실상 받아들이는 듯한 발언을 내놨다.
성과주의도 첩첩산중이다. 성과주의는 금융권의 임금체계를 연공서열에 따른 호봉제에서 연봉제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금융위는 현재 8개 금융공공기관과 이미 협약을 한 상태며, 민간 분야에 성과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금융사들을 독려하고 있던 터였다.
금융위 내부에서도 복지부동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임 위원장은 지난 6일 간담회에서 “우리나라 금융권은 생산성에 비해 임금 수준이 높아 이를 수정하지 않고는 갈수록 경쟁력이 떨어지고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금융권 전체의 성과주의 문화 확산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야권은 부정적인 입장이다. 특히 금융노조가 성과주의 도입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더민주 등은 이미 총선 전부터 반대 입장을 표명한 상태다. 여기에 국민의당까지 성과주의 도입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어 임 위원장이 추진동력을 얻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성과주의 도입은 별도의 법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노사가 합의하는 사항이어서 국회가 직접 개입할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금융노조가 총파업 등으로 정치이슈화에 나설 경우 거대 야당이 어떤 방식으로든 힘을 쓸 것이고, 임 위원장이 이에 맞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융위 고위직들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듯 당분간 금융사들과 ‘거리두기’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민간 금융사들과 자주 접촉하다 자칫 야당 의원들 눈에 띄기라도 할 경우 관치금융이라는 오해를 살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다른 민간 금융사 관계자는 “금융위 공직자들과의 식사 약속이 취소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다”면서 “꼭 나눠야 할 얘기가 있으면 금융위를 방문하지 말고 외부에서 만나거나 전화로 얘기하라는 주문도 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