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투 논란’이 재점화된 계기
4월 14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한화와 두산의 경기. 한화 선발 김용주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1회초 첫 타자에게 곧바로 볼넷을 내줬다. 그 순간 불펜에는 투수 한 명이 등장했다. 송창식이었다. 김용주는 수비의 도움으로 투아웃을 잡고 한숨을 돌리는 듯했지만, 다시 2사 만루 위기를 자초했다. 아직 1회도 안 끝났는데 투수가 송창식으로 교체됐다. 닷새 전 선발 등판해 3.2이닝 4실점(투구수 69개)을 기록하고, 하루 전 다시 불펜으로 나와 ⅔이닝 동안 공 15개를 던졌던 투수였다.
송창식이 등판할 때 스코어는 0-1이었다. 송창식은 등판과 동시에 오재일에게 우중월 만루홈런을 얻어맞았다. 2회에는 선두 타자 김재호의 좌월 솔로홈런을 포함해 볼넷, 안타, 폭투, 적시타가 이어지면서 3점을 잃었다. 3회 역시 유격수 하주석의 실책까지 겹치면서 추가 5실점. 스코어는 0-13이 됐다. 그러나 4회에도, 5회에도 한화 마운드에는 송창식이 올랐다. 벤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4회에는 김재환의 우월 솔로홈런, 5회에는 민병헌의 좌월 2점홈런이 터졌다. 그 사이 송창식의 직구 구속은 시속 120km대까지 떨어졌다. 투구수는 선발투수보다 세 배 가까이 많은 90개로 늘어났다. 5회가 끝나고 클리닝타임이 시작된 후에야 불펜에서 다음 투수 송창현이 달려 나왔다. 그때 스코어는 이미 2-16이었다.
1회 초 교체투입된 송창식은 무려 90개의 공을 던지며 12실점했다. SBS 방송 화면 캡처.
송창식은 이전에도 9점을 내줄 때까지 마운드에서 내려오지 못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12년 전인 2004년의 일이다. 그때의 송창식은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투수였고, 지금의 그는 한화 투수 조장을 맡고 있는 베테랑이다. 게다가 그는 최근 몇 년간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마당쇠 역할을 해온 탓에 ‘혹사’에 대한 우려를 샀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미 너무 많은 고생을 해온 고참 투수를 그렇게 오래 마운드에 세워놨던 이유가 무엇인지 많은 야구 관계자가 궁금해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김성근 감독은 경기 도중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병원에 갔다. 6회부터 더그아웃을 아예 비웠다. 경기 후 그 까닭을 아무도 물을 수 없었다. 다행히 병원 검진 결과는 이상 무. 다음 날 무사히 대전구장에 출근한 김 감독은 송창식 얘기가 나오자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혹사일 수 있지만 팀과 개인을 살리려는 선택이었다. 이미 흐름이 넘어가 이길 수 없는 경기였다. 패한 경기에서 뭔가 하나라도 주워야 하는데, 어제 건지고 싶은 게 송창식이었다. 2회까지 송창식은 팔로만 던졌다. 하체를 이용해 던지는 감각을 던지면서 깨닫길 바랐다. 3~4회에는 송창식이 하체를 이용하면서 나아진 모습을 보였고, 5회에는 다시 팔만 썼다. 계속 던지면서 많은 걸 느끼고 화를 내면서 성장하길 바랐다.”
# 시범경기에서 117개를 던진 유창식
‘마운드에서 얻어터지면서 스스로 깨닫고 배운다’는 주장. 김성근 감독이 그동안 숱한 벌투 논란의 중심에 섰을 때마다 늘 앞장세웠던 논리다. 지난해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화 소속이던 투수 유창식은 3월 21일 삼성과의 시범경기에서 6이닝 8실점을 기록하는 동안 공 117개를 던졌다. 시범경기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투구수. 4회까지 100개에 육박하는 공을 던진 선발투수가 5회와 6회에도 계속 등판하는 것은 사실 정규시즌에도 쉽게 나오지 않는 장면이다.
심지어 유창식은 정규시즌 때도 단 한 차례 119개를 던진 게 개인 최다 투구수인 투수였다. 피칭 내용 역시 좋지 않았다. 스트라이크보다 볼이 더 많았다. 볼넷 7개를 내줬고, 폭투 2개가 허무한 실점으로 이어졌다. 투구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투지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그래도 김 감독은 그저 지켜봤다. 경기 후에는 “투수들이 스트라이크를 잘 던지지 못했다. 유창식을 마운드에 계속 내버려 둔 이유도 앞의 이유와 같다”고만 했다. 결국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공을 던지게 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한화의 5선발로 낙점됐던 유창식은 개막 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도 제 공을 던지지 못했다. 4월 1일 두산전에서는 불펜으로 등판했다가 연속 15개의 볼을 던져 강판되기도 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팀 KIA로 트레이드됐다.
벌투 논란 재점화의 장본인 한화 김성근 감독.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국내 최고의 투수 가운데 한 명인 SK 에이스 김광현도 한 차례 ‘벌투’ 논란의 희생양이 된 적이 있다. 김성근 감독이 SK 사령탑이던 시절의 일이다. 김광현은 2008년 다승왕(16승)에 오르고, 2010년에는 17승으로 자신의 개인 한 시즌 최다 승리를 따냈다. 그러나 2011년 부상 후유증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시즌을 시작한 데다, 직전 해에 193⅔이닝을 던진 탓에 어깨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런 김광현이 그해 6월 23일 광주 KIA전 마운드 위에서 혹독한 ‘수업’을 받았다. 8이닝을 던지는 동안 무려 147개의 공을 뿌리면서 8실점. 피안타 14개 가운데 3개가 홈런이었다. 그런데 3회와 5회 연이어 3점 홈런을 맞았던 김광현이 6회 솔로홈런을 하나 더 맞고 7점째를 내주자 오히려 몸을 풀고 있던 불펜 투수들이 모두 철수했다. ‘벌투’ 의혹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김광현의 외로운 싸움은 시작됐다. 7회까지 125개의 공을 던진 김광현이 8회에도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야구장 전체가 술렁였다. 이미 힘이 빠진 상태라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하기도 어려웠다. 8회를 마칠 때까지 다시 공 22개가 더 필요했다.
김광현은 다음 날 곧장 2군으로 내려갔다. 김성근 감독은 “김광현은 좋은 공을 던지면서도 스스로 잘 던지는 법을 모른다. 모든 면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김광현이 2군에 있는 동안 김성근 감독은 SK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 빈볼에 사과한 불펜 투수, 120구 투구
앞서 언급된 이유가 전부라면, ‘벌투’가 아닌 ‘수업’이라는 의미로 긍정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 SK 투수 조영민은 조금 다른 이유로 벌투 논란에 휘말렸다. 조영민은 2008년 4월 목동 우리 히어로즈전에서 2회부터 마운드에 올라 7회까지 공 120개를 던졌다. 6이닝 16피안타 4볼넷 9실점. 당시 그는 SK 불펜의 핵심 요원이었다. 경기 상황에 따라 수시로 몸을 풀고 대기해야 하는 불펜 투수들은 한 경기에서 30~40구만 던져도 ‘많이 던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조영민은 요즘 웬만한 선발투수들도 한 경기에서 다 못 던지는 120개의 공을 느닷없이 던졌다. 앞선 4경기에서 총 4⅓이닝을 던졌는데, 이 한 경기에서 그것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당시 SK 사령탑이었던 김성근 감독은 경기 후 “초반에 실점한 뒤 경기를 내줬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투수를 아끼려고 조영민을 계속 던지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내부 사정을 아는 관계자들은 다른 얘기를 했다. 4회에 조영민이 당시 히어로즈 소속이던 정성훈에게 빈볼을 던진 뒤 ‘미안하다’는 의미의 수신호를 보냈는데, 그 모습이 김 감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정성훈은 조영민의 광주일고 1년 선배다. 요즘은 몸에 맞는 볼이 나오면 투수가 타자에게 사과의 제스처를 보내는 게 오히려 ‘매너’로 여겨진다. 그러나 김 감독은 경기 후 “아무리 선배라도 그라운드에서는 적이다.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안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불펜 투수로 자리를 잡아가던 조영민은 경기 후 2군에 갔다.
# 넥센과 KIA도 한 차례 겪은 ‘벌투’ 홍역
물론 역대 프로야구 감독 가운데 김성근 감독만 ‘벌투’ 논란의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니다. 유난히 떠들썩했던 의혹의 사례가 주로 김 감독의 팀에서 나왔다고 보는 게 맞다. 실제로 지난해 4월 8일 광주 KIA-NC전에선 KIA 투수 임기준이 6이닝 동안 13피안타에 4사구 10개를 내주면서 10실점했다. 투구수는 120개. 선발투수가 10점을 내주는 상황에서도 투수가 바뀌지 않자 자연스럽게 ‘벌투’라는 단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김기태 KIA 감독은 “벌투가 아니었다. 이미 승부가 넘어간 상황이라 다음 일정상 투수진을 아끼기 위해 그날 등판한 선발투수가 최대한 많은 이닝을 책임지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넥센도 2014년 5월 7일 목동 NC전에서 선발 문성현이 2이닝 만에 10피안타 3홈런 10실점으로 무너지자 마운드에 두 번째 투수 윤영삼을 올렸다. 이날이 프로 데뷔전이었던 윤영삼은 4이닝 동안 공 90개를 던지면서 안타 11개(홈런 3개)를 맞고 12점을 더 내줬다. 이날 스코어는 5-22 넥센의 패배. 강우 콜드게임으로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실점을 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마운드가 무너진 날이었다.
염경엽 넥센 감독 역시 “선발이 초반에 너무 무너진 상황에서 불펜 투수들을 많이 쓰기 어려웠다. 그럴 때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데, 윤영삼이 그 역할을 해준 것”이라며 “벌투를 통해 선수가 깨닫는 바가 있다면 의미가 있겠지만, 그날은 벌투가 아니었다. 윤영삼은 그런 상황을 이길 만한 정신력이 있다고 판단해 맡겨뒀다”고 해명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수술 후 복귀하자마자 PS까지…맷 하비 투구 이닝 제한 논란 지난해 가을,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킨 선수는 뉴욕 메츠 에이스 맷 하비였다.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하비의 ‘투구 이닝 제한’ 조건이 리그 전체를 뜨겁게 달궜기 때문이다. 하비는 2013시즌 막바지에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2015년이 수술 복귀 후 첫 시즌. 메이저리그는 투수가 수술을 끝내고 복귀한 첫 시즌에 투구 이닝을 제한하는 일이 자주 있다. 워싱턴 투수 조던 짐머맨이 팔꿈치 수술 후 첫 시즌인 2011년에 161.1이닝만 던지고 피칭을 마감한 게 그 사례다. 같은 팀 투수 스티븐 스트라스버그도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2012년에 159.1이닝만 던졌다. 워싱턴은 그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 데도 스트라스버그를 보호하기 위해 포스트시즌 경기에 등판시키지 않았다. 스트라스버그가 던질 수 있었던 20이닝가량을 포기한 대신 디비전시리즈에서 졌다. 그 정도로 메이저리그는 투수의 팔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맷 하비. 사진 출처=뉴욕 메츠 홈페이지 하비도 마찬가지다. 하비가 166⅓이닝을 던진 시점에 뉴욕 메츠의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높아지자 에이전트와 주치의가 반기를 들었다. 하비의 에이전트는 메이저리그 구단에 악명 높은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다. 보라스는 하비의 주치의인 제임스 앤드류스 박사와 함께 “하비의 올 시즌 투구 이닝을 180이닝에서 제한해야 한다. 포스트시즌에는 등판시킬 수 없다”고 펄펄 뛰었다. 천문학적 금액이 오가는 ‘고객’의 팔을 철저하게 보호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2006년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오른 메츠 입장에서는 하비가 없는 포스트시즌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팬들 역시 즉각 들고 일어났다. 문제가 커지자 하비가 직접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 등판할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하비를 둘러싼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숱한 논란 끝에 내려진 결론은 역시 ‘팀’이 먼저였다. 처음에는 하비의 등판을 ‘시리즈당 1회, 1경기 투구수 60개 이하’로 제한하자는 절충안까지 등장했지만, 이 역시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비난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결국 앤드류스 박사가 포스트시즌까지 동행하면서 하비의 상태를 면밀하게 체크하고, 등판을 계속해도 되는지 판단해 경기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하비는 디비전시리즈와 챔피언십시리즈는 물론 월드시리즈에서도 1차전과 5차전에 선발 등판하며 에이스의 책무를 다했다. 투구 이닝도 200이닝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았다. “내게는 좋은 이정표가 됐다.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등판해서 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또 하나의 승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팀을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했다. 메츠는 월드시리즈에서 준우승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