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외교부가 비밀해제 문서를 공개하면서 시작됐다. 외교부는 외교문서공개에 관한 규칙(생산·접수된 후 30년이 지난 외교문서에 대해 심의를 거쳐 매년 공개)에 따라 4월 17일 전두환 정권이던 1985년도 문서들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여기에 반 총장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문서에 따르면 반 총장은 1985년 외교부 참사관 신분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다. 반 총장은 1월 7일 미국의 학계·법조계 인사들이 망명 중인 DJ의 안전 귀국을 요청하는 서한을 1월 10일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발송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 류병현 당시 주미대사에게 보고했다. 이는 ‘김대중 동정’이라는 전보로 8일 본국의 외교부 장관에게 전해졌다.
반 총장은 같은 해 1월 30일에도 DJ와 관련된 정보를 한 차례 더 보고했다. 주미대사관이 1985년 1월 30일 외교부 장관에게 보낸 ‘김대중 동정’ 전보에는 “하버드에서 연수 중인 반기문 연구원이 보내온 ‘85.1.23자 The Harvard Crimson’ 지의 김대중 관련 보도를 별첨 송부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반 총장이 보내온 하버드 크림슨지엔 DJ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당시 DJ는 신군부가 조작한 내란음모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다 1982년 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으로선 ‘눈엣가시’였던 DJ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특히 반 총장이 정보보고를 할 무렵은 DJ가 1985년 2월 총선을 앞두고 귀국을 시도하던 때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를 두고 외교가 반응은 엇갈린다. 우선 반 총장이 공무원 신분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업무라는 견해가 있다. 미국에서 세금으로 연수를 받고 있는 공무원이 한국과 관련된 주요 동향을 보고하는 것을 두고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선 안 된다는 얘기다. 반 총장의 한 측근은 “반 총장은 외교관이 해야 할 일을 응당 했을 뿐이다. 보고서에 대한 가치 판단은 본국이 할 일 아니냐. 과장급 참사관이 무슨 권한이 있단 말인가. 보고를 안 했으면 오히려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론도 적지 않다. 군부 탄압을 받고 있는 야당 정치인 사찰에 개입했다는 게 그 골자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외교관은 “솔직히 정보 수집이라는 것도 인간이 하는 건데 당사자 가치가 투영될 수밖에 없다. 본인의 판단에 따라 어느 정도 선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 총장이 적극적으로 윗선에서 관심이 높은 DJ 관련 보고를 했을 것으로 본다”면서 “반 총장이 외교부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업무 태도 때문 아니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반 총장이 어떤 목적으로 DJ의 동향을 보고했는지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정확히 파악하긴 힘든 부분이다. 다만, 정치권에선 반 총장의 이러한 행적이 향후 정치권에 입문할 경우 걸림돌이 될 것으로 점친다. ‘반기문 대망론’의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음은 권대우 정치평론가의 말이다.
“반기문 총장은 지금 2012년 안철수 신드롬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이 이미지화돼 있다. 이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외교관으로서 승승장구한 반 총장의 과거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관련 인물이 DJ라는 점에서 사실상 호남 민심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당연히 야권행은 물 건너갔다. 일단 반 총장의 선택지는 줄어든 셈이다.”
정치권에선 총선 직후 반 총장 관련 내용이 담긴 외교문서가 공개된 것을 놓고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총선과 무관하게 공개가 예정된 것이었다지만 유력한 차기 주자군인 반 총장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그 파괴력을 특정세력이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더군다나 외교문서공개 규칙엔 여러 제외조항도 있다는 점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이른바 ‘반기문 죽이기’다.
여권에선 그 진원지에 대해 당초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를 지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여권 계파 간 차기를 둘러싼 권력 다툼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쪽이다. 친박 핵심부가 반 총장을 ‘김무성 대항마’로 준비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잠재적 경쟁자일 수 있는 반 총장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기 위해 김 전 대표 측이 ‘은밀히’ 움직였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총선 패배로 인한 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빨라질 것이란 관측과도 맞물린다.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여권의 ‘미래권력’인 김 전 대표에게로 줄을 서고 있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의 한 원로 인사도 “친박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아시다시피 (반 총장은) 우리가 내세우려했던 선수 아니냐. 박 대통령 힘이 빠지자 관가 또는 사정라인 특정 세력들이 ‘작업’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권력 누수의 일환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반면, 친박 핵심부의 ‘자작극’일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주류인 친박계가 핵심 정보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설득력이 있다는 말도 뒤따른다. 이 역시 반 총장의 차기 행보와 관련이 깊다.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한 반 총장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비박계의 한 중진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 총장은 친박이 총선에 참패한 것을 지켜보면서 셈법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친박 꼬리표를 달고 나와 봤자 대선은커녕 당내 경선 통과도 힘든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반 총장에게 공을 들인 친박으로선 가만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반 총장에게 약점일 수 있는 내용을 살짝 흘렸을 것으로 본다. 친박 핵심들이 이것만 가지고 있겠느냐. 반 총장 입장에선 아마 ‘협박’으로도 다가왔을 것이다. 또 이번 DJ 외교문서 공개로 야권행을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이는 우리 쪽으로 데려오지 못할 바엔 다른 편으로도 못 가게 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