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2일 기업 구조조정 관련 여야정 협의체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국가 경제수장의 이 같은 발언에 현대상선 주가는 지난 18일 장중 2000원대가 붕괴하며 사상 최저치(1890원)를 기록했다. 구조조정 대상으로 함께 거론된 한진해운 역시 지난 22일 장중 신저가(2580원)로 떨어졌다. 두 해운업체는 지난해부터 정부 주도 ‘강제합병 1호’가 될 것이란 풍문에 시달렸다.
기업 구조조정에 이견을 보여 왔던 정치권도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20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실업대책 마련을 전제로 “적극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도 “구조개혁을 늦추면 더 큰 위기가 닥칠 것”이라며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정부·여당은 일찌감치 ‘노동개혁’ 등을 통한 구조조정의 시급성을 주장해 왔다.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논의가 시작된 것은 지난해 10월이다. 당시 정부는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국토해양부·해양수산부 등 4개 부처 차관들이 참여한 ‘구조조정 협의체’(협의체)를 구성했다. 이 협의체는 두 차례 회의에서 조선·해운·건설·철강·석유화학 분야에 대한 구조조정 원칙과 공급과잉 해소 방안을 논의했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을 움직여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이 가운데 국회에선 기업 구조조정 촉진법과 일명 원샷법(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대형 구조조정에 필요한 제도 마련과 가이드라인 선정, 여론 환기가 동시에 이뤄진 셈이다. 협의체는 이르면 이달 중 3차 회의를 열고 구조조정 대상과 시기, 방법 등을 조율할 예정이다.
해운업계 구조조정 1순위인 현대상선. 홈페이지 캡처.
정부가 지목한 5개의 취약 업종 가운데 구조조정이 임박한 곳은 해운업계다. 지난 22일 해운업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물동량에 비해 운항 중인 선박 수가 많아 소석률(배에 화물 등을 채운 비율)이 떨어지고 있다”며 “부산-함부르크간 운임은 지난해 900달러에서 올해 300달러까지 내려왔다. 이익률을 맞추기 어려운 구조”라고 전했다.
해운업계 구조조정 1순위인 현대상선은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으로부터 용선료(선박 임대료) 인하 압박을 받고 있다. 해외 선주들과 용선료 인하 협상 결과에 따라 기업 명운이 판가름날 전망이다. 현재로선 법정관리에 돌입하거나 산업은행이 출자전환을 통해 대주주가 될 가능성 등이 점쳐진다.
한진해운도 구조조정 태풍에 휩싸였다. 선복량 기준 세계 10위권 업체인 한진해운은 지난해 말 기준 부채 총계가 5조 6600억 원에 이르는 등 유동성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만나 ‘경영권 포기’ 등 구조조정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한진해운은 지난 22일 산업은행 등 채권단에 조 회장의 경영권 포기 등을 내걸고 ‘조건부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산업은행은 한진해운의 경영정상화가 추진되면 채무재조정을 도울 것으로 관측된다.
조선업계도 해운업계와 비슷하다. 선박 공급 과잉에 따른 발주량 감소, 중국산 선박의 저가 물량 공세는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켜 조선업의 향후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영국 조선·해운 분석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 1분기 국내 조선사가 수주한 선박 물량은 8척에 그쳤다.
조양호 한진 회장은 한진해운의 경영권 포기 등을 내걸고 산업은행 등 채권단에 조건부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한때 한국 경제를 지탱하던 조선업의 위기는 단발성이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더하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발간한 ‘4월 경제동향’에 따르면 전년 대비 올해 선박 수출액은 36억 달러에서 26억 달러로 10억 달러가량 감소했다. 또 올 하반기에도 실적 반등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추가 구조조정은 불가피할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조선·해운업계에 비해선 시황이 낫지만 철강·건설·석유화학 회사들도 구조조정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철강업계에선 “공급 과잉으로 철값이 종이값보다 싸다”는 말이 나온다. 건설업계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지만 대형 토목공사 발주량 감소가 뼈아프다. 석유화학업계는 중국산 신기술에 고전할 가능성이 대두된다.
이 가운데 금융감독원(금감원)은 지난 13일 주채무계열 회사 39곳을 선정하고, 주채권은행을 통해 재무구조 평가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철강·건설·석유화학 회사 중에선 포스코, 동국제강, 대우건설, 금호석유화학 등이 포함됐다. 금감원은 39곳의 업체 중 재무구조가 취약한 계열 등을 상대로 ‘재무구조 개선약정’ 등을 체결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를 대신해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수 있는 은행은 산업은행과 KB국민은행이 꼽힌다. STX조선해양, 금호아시아나, 금호석유화학, 동국제강, 하림, 한솔 등은 산업은행이 주채권은행이며 KT, 신세계, 홈플러스 등은 국민은행을 주채권은행으로 두고 있다.
정부가 수차례 선제적 구조조정 의사를 밝힌 만큼 조선·해운업계에 대한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면 또 다른 업계로 구조조정의 불씨가 옮겨 붙은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진다. 채권은행들은 오는 6월까지 기업평가를 마무리하고 이르면 7월께 구조조정 대상을 선정할 예정이다. 총선 패배라는 악재를 딛고 드라이브를 건 정부가 어느 수준까지 구조조정을 추진할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