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4년 후 이젠 한 남자의 아내, 그것도 유명 탤런트의 아내가 된 그는 여전히 코트를 누비며 맹활약 중이다. 지난 10일, 한국의 전승 우승으로 막을 내린 ‘제22회 FIBA 아시아선수권’은 그의 존재감을 새삼 확인케해줬던 무대였다. 오랜만의 대표팀 복귀, ‘잘하면 본전, 못하면 피박’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왕언니’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 삼성생명의 박정은(30)이 다시 기자 앞에 나타났다.
#탤런트의 아내
박정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남편 안부부터 물었다.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의 오른팔로 충성을 다했던 박건하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한상진. 이전엔 농구 선수 박정은의 남편이었지만 그 드라마 이후 ‘하얀거탑’ 한상진의 아내 박정은으로 신분 이동이 이뤄졌다.
“드라마 끝나자마자 시나리오가 엄청 많이 들어왔어요. 결혼하고 그렇게 많은 시나리오를 받아보긴 처음인 것 같아요. 이전엔 한두 개가 고작이었거든요. 요즘은 밖에 나가면 남편이 사인 요청을 더 많이 받아요. 그래도 기분 좋더라구요.”
결혼한 지 3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신혼이라는 두 사람. 합숙과 경기, 드라마 촬영과 녹화 등으로 평소 자주 만날 수 없는 이 부부는 볼 때마다 애틋함과 설레임을 느끼며 연애하듯 살아가는 결혼 생활이 행복하기만 하다.
“우리 집은 가스비가 안 나와요. 제가 한약 다려 먹을 때 3000원이 나왔는데 그게 제일 많이 나온 거예요.”
그래도 남편은 불만이 없단다. 시즌 중 모처럼 집에 들어온 아내를 위해 직접 밥상을 차려주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이 차고 넘칠 정도다.
“연예인의 아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이전 남편이 출연한 연극을 보러갔다가 무대 위의 키스신을 보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느꼈죠. 평생 이런 벌렁거림을 느끼며 살아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키스신 보고도 가슴 떨리는 사람이 만약 베드신을 보게 된다면? 물론 영화나 연극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박정은은 이렇게 유쾌한 멘트를 날린다. “당연히 못 참겠죠. 그래도 출연료 많이 받는다면 한 번 고려해 보려구요. 호호”
#막내서 왕고참으로
박정은과의 인터뷰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은퇴’다. 팀의 최고참이라는 타이틀은 노장과 체력이란 연결 고리가 생긴다. 마치 혼기 앞둔 처녀에게 ‘결혼 언제 할 거냐?’고 묻는 것처럼 박정은은 인터뷰때마다 은퇴를 ‘종용’하는 듯한 질문에 조금씩 맘 상해지는 건 숨길 수가 없다.
“막내 시절 나이 많은 언니들이 은퇴하지 않고 뛰는 거 보면서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데 제가 그 나이가 되다보니 은퇴하는 게, 아니 은퇴를 결심하는 게 참으로 어렵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직 뛸 수 있는 체력이고 팀에서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니 자꾸 미루게 돼요. 언젠가는 그만둘 날이 오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박정은은 이번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췄던 정선민보다는 세 살이, 신한은행의 전주원보다는 다섯 살이 더 어리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농구의 노장 트리오에 패키지로 묶이는 건 억울하다는 속내다. 이제 막 30대에 진입한 그로선 ‘노장’이란 단어가 버겁기만 한 모양이다.
박정은은 지난해 자유계약선수(FA)였다. 소속팀보다 더 많은 몸값을 주겠다는 팀이 있었다. 그러나 돈보다 명예와 자부심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은퇴할 때까지 ‘삼성의 박정은’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도 한몫했단다.
“성정아 선배의 은퇴 경기가 잊혀지질 않아요. 무릎 부상으로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는데 경기 종료 직전 3점슛을 성공시키더라구요. 우승과 함께 은퇴하는 모습이 얼마나 근사해 보였는데요. 우승하고 은퇴하고 싶어요. 우승하기 전까진 은퇴 안 할 거예요(웃음).”
![]() |
||
▲ 지난 7일 인천 삼산체육관에서 열린 제22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경기에서 한국 박정은이 중국 우징징의 수비를 옆에 두고 레이업슛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
얼마 전 여자농구 스타 박찬숙(48)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경기 기술위원이 우리은행 여자농구팀 감독 공모 과정에서 성차별로 탈락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낸 일이 있었다. 성차별 주장은 우리은행 전임 감독의 성추행 사건과 맞물려 여자 농구계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대한 박정은의 생각이 궁금했다. 쉽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박정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기가 안 좋았다고 생각해요. 가뜩이나 성추행 문제로 선수들도, 감독님들도 애매한 상황이 됐는데 성차별 논란까지 불거졌으니 사람들이 여자 농구를 어떻게 보겠어요.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대표팀 선수들이 힘들 때마다 뭐라고 하면서 기운을 낸 줄 아세요? 농구 외적인 일로 여자 농구의 이미지가 땅바닥으로 떨어졌으니 부디 우승해서 추락한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올려 놓자며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웠거든요. 그런데 우승한 다음날 박찬숙 선배님 일이 터진 거예요.”
박정은은 선수들이 오히려 여성 지도자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털어 놓았다.
“지금 선수들은 디지털 세대예요. 그런데 이전에 뛰었던 언니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죠. 더욱이 스타플레이어 출신의 여성 코치나 감독은 선수를 선수가 아닌 후배로 보는 시각이 있어요. ‘난 선수 때 이런 거 다 했는데 왜 너는 못하느냐’며 야단을 치기도 해요. 그러다보니 같은 여성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거리감을 느끼게 돼요. 차라리 남자 선생님이 더 편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죠.”
하지만 박정은은 이번 아시아선수권대회를 통해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바뀌었다고 한다. 유수종 감독과 함께 절묘한 호흡을 일궈낸 이옥자 코치의 지도 스타일과 훈련 방법, 선수들을 아우르는 부분들이 신비한 카리스마와 함께 엄청난 매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정말 멋있어 보였어요. 여성 지도자도 농구 코트에서 멋지게 일할 수 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된 거죠. 정말 능력있고 인정받는 지도자라면 여자라고 해서 또는 남자라고 해서 기용되고 안 되고 하지 않을 것 같아요. 농구 잘 했다고 해서 좋은 지도자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여자 프로농구 감독의 성추행 사건도 너무나 창피한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감독님들이 다 그렇지 않거든요. 마찬가지로 모든 선수들이 그런 일을 겪는 것은 더더욱 아니구요.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선생님들과 선수들 사이가 굉장히 서먹서먹해졌어요. 이전에는 같이 찜질방도 가고 식사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선생님들이 먼저 자리를 피하세요. 서글픈 현실인 거죠.”
![]() |
||
▲ 기자와 함께 사진을 찍느라 다리를 구부려 키를 낮춘 박정은. 그녀의 미소가 소녀처럼 해맑다. | ||
아시아선수권대회가 끝난 후 박정은과 함께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한 정선민이 ‘올림픽은 후배들의 몫’이라며 대표팀에 미련이 없음을 밝혔다. 이에 대해 박정은은 “선배들의 존재도 필요하다”며 ‘뽑힌다면’ 올림픽에 나갈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를 통해 새삼 고참들의 역할과 존재감을 느꼈어요. 저나 선민이 언니가 합류했을 때랑 안 그럴 때랑 팀 분위기가 많이 달랐거든요. 선민이 언니랑도 얘기한 부분인데 감독님께서 고참에 대한 배려만 좀 해주신다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배려냐구요? 노장, 노장 하면서 어린 선수들이랑 똑같이 훈련하라는 건 너무 가혹해요. 아시아선수권대회 때는 감독님이 훈련을 조금씩 줄여 주시면서 쉬게 해주셨어요.”
박정은은 후배들의 개인 기량은 뛰어나지만 팀 플레이가 약하다며 쓴소리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한국여자농구의 희망’이라고 말한다는 하은주의 존재감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며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드높였다.
결혼 3년차이다보니 주위에서 2세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은은 2~3년 더 있다가 아이를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이한테만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때 가지려구요. 아이 낳고 선수 생활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은퇴하고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박정은은 은퇴 후 프로팀 지도자보다는 농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농구교실을 열고 싶다는 바람도 나타냈다.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박정은은 농구 선수로 활약하는 한 ‘날라리 며느리’ ‘날라리 아내’일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지만 친정보다 외려 시댁 식구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관심, 응원 속에서 농구 인생의 마지막 라운드를 향해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