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투수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좋아해보지 않은 프로야구팬이 있을까. 한눈에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 투수들의 공통점은 바로 ‘100’이라는 숫자. 프로 통산 100승 고지를 밟은 영광의 주인공 명단이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투수들이 KBO리그를 거쳐 갔다. 그러나 100번 이상 승리투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선수는 단 27명뿐이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100승 투수들의 역사를 되돌아봤다.
지난 4월 24일 100번째 승리를 따낸 SK 김광현. 왼손 투수로는 세 번째다. 사진제공=SK 와이번스
# 4월에만 3명의 100승 투수 배출
올해는 100승 투수의 계보에 무척 기념비적인 사건이 벌어진 시즌이다. 4월 6일 수원 kt전에서 삼성 윤성환이 100승 투수 반열에 올랐고, 4월 24일에는 SK 김광현(인천 NC전)과 두산 장원준(잠실 한화전)이 차례로 100번째 승리를 따냈다. 한 해에 100승 투수 3명이 탄생한 시즌은 1996년(LG 정삼흠 4월, 해태 이강철 5월, 해태 조계현 9월)과 2000년(한화 이상군 4월, 한화 한용덕 8월, 현대 정민태 10월)밖에 없다. 한 번 맥이 끊기면 3년 넘게 100승 투수가 나오지 않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올해는 4월 한 달 사이에만 역대 25·26·27호 100승 투수가 쏟아졌다. 김광현과 장원준처럼 같은 날 100승 투수가 두 명 탄생한 사례도 당연히 처음이다. 이뿐만 아니다. 롯데 송승준 역시 통산 93승으로 올해 100승 등극을 노리고 있다. 송승준은 2군에서 재활 중이지만 1군 복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송승준이 올해 7승을 더 채우면 2016년은 최초로 100승 투수 4명이 탄생하는 시즌이 된다.
27명의 투수 가운데 1980년대(1982~1989년)에 100승을 달성한 투수는 삼성 김시진(1988년)이 유일하다. 1990년대(1990~1999년) 11명, 2000년대(2000~2009년) 9명, 2010년대(2010~2016년) 6명이 각각 배출됐다.
# 1·2호 100승 투수 김시진과 최동원의 이야기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100승 투수는 김시진이다. 데뷔 5년 만인 1987년 10월 3일 잠실 OB전에서 시즌 마지막 승리를 통산 100승으로 장식했다. 연 평균 20승이라는 무시무시한 페이스였다. 투수 분업화가 정착되기 전이라 가능했던 일. 186경기 만에 100승을 이뤄내면서 역대 최소 경기 100승 기록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야구 관계자들은 “이 기록만큼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당시에는 1958년생 동갑내기 투수인 김시진과 롯데 최동원 가운데 누가 먼저 최초의 100승 고지를 밟게 될지도 관심거리였다. 둘 다 당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투수였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한국에서 열리면서 국가대표로 발이 묶여 1년 늦게 데뷔하게 된 사정도 똑같았다.
김시진은 대구의 삼성, 최동원은 부산의 롯데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다. 1983년은 17승의 김시진이 9승의 최동원에 압승을 거뒀지만, 이듬해인 1984년에 최동원이 무려 27승을 쌓아 올리면서 김시진(19승)을 눌렀다. 이후 2년간의 양상도 비슷했다.
1985년은 김시진이 25승으로 20승의 최동원을 앞질렀지만, 1986년에는 최동원이 19승을 올려 김시진(16승)보다 3승을 더했다. 첫 4년간의 성적은 김시진이 통산 77승, 최동원이 75승. 단 2승 차였다. 1987년 개막을 앞두고 두 투수의 대결에 관심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의외로 싱겁게 승부가 갈렸다. 김시진은 100승까지 필요한 23승을 한 해에 모두 채우면서 아홉수 한 번 없이 사상 최초의 100승 고지에 올랐다. 반면 최동원은 14승을 올리는 데 만족하면서 통산 89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이후 최동원은 선수 노조 설립 문제와 연봉 협상 마찰, 트레이드(얄궂게도 1988년 11월 롯데와 삼성 간의 4대3 트레이드를 통해 최동원과 김시진이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더 이상 승수를 빠르게 쌓지 못했다. 1988년 7승, 1989년 1승을 올린 게 전부였다.
최동원은 1990년 7월 12일 대구 OB전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야 100승까지 남았던 3승을 어렵게 채우고 삼성 소속으로 100승을 따냈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2호 100승 투수. 예상됐던 주인공이지만, 그 시기는 예상보다 조금 늦었다. 이미 롯데 시절 혹사의 여파로 구위가 많이 떨어진 뒤였다. 김시진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연 평균 20승은 연 평균 220이닝을 던졌기에 가능했던 기록. 100승 달성 이후 5시즌 동안 합계 24승을 올리고 은퇴했다.
# 각 구단 최초의 100승 투수들
최동원 이후 100승 투수들의 숫자는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2개월 후인 1990년 9월 2일 잠실 OB전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는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해태 선동열이 개인 통산 100승 고지를 밟았다. 해태가 배출한 첫 100승 투수이자 당시에는 최연소 기록이었다. 김시진, 최동원, 선동열에게 줄줄이 1~3호 100승을 헌납했던 OB는 3년 후인 1993년 9월 14일 사직 롯데전에서 장호연이 역대 네 번째 통산 100승을 올리면서 100승 투수를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장호연은 베어스 한 팀에서만 100승을 올린 유일한 투수다. 장원준은 롯데에서 더 많은 승수를 쌓았다.
최동원은 롯데에서 대부분의 승리를 거뒀지만, 100승 고지는 삼성 이적 후에 밟았다. 이 때문에 롯데 구단 최초의 100승 투수는 윤학길(1994년)로 기록됐다. LG 정삼흠(1996년), 한화 송진우(1997년), 현대 정민태(2000년)는 차례로 팀 프랜차이즈 최초의 100승 투수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SK에서는 2005년 김원형이 가장 먼저 100승 투수로 이름을 올렸다. 다만 쌍방울 시절에 올린 68승이 포함된 기록이다. 김광현은 순수하게 SK에서만 100승을 따낸 최초의 투수다.
# 100승 관련 진기록은 누가 세웠나
27명 가운데 단일팀에서 100승을 달성한 투수는 총 19명. 나머지 8명은 한 차례 이상 팀을 옮겼다. 100승 달성 당시 소속팀으로 분류하면 삼성 소속이 8명으로 가장 많다. KIA(전신 해태 출신 포함)와 한화가 각각 4명, LG가 3명이다. 롯데와 두산(전신 OB 출신 포함), 현대, SK가 각각 2명씩 배출했다.
김시진은 앞서 언급했듯 역대 최소 시즌과 최소 경기 100승 기록 보유자다. 한화 정민철은 만 27세 3개월 2일의 나이로 100승을 달성해 역대 최연소 기록을 갖고 있다. 고졸 신인으로 데뷔해 여덟 번째 시즌에 달성했다. 이 부문 2위인 선동열과는 4개월 가까이 차이가 난다. 반대로 한화 이상군은 만 38세 9일이 되던 날 100번째 승리를 따냈다. 역대 최고령 기록이다. 삼성 이상목은 19년차였던 2008년에 100승 고지에 올랐다. 가장 높은 연차에 100승을 달성한 투수다.
송진우는 왼손 투수로는 최초로 100승 투수 반열에 올랐다. 데뷔 9년 만이던 1997년 9월 20일 인천 현대전이었다. 2002년에는 역시 사상 최초로 150승이라는 이정표를 세웠고, 2006년에는 200승이라는 금자탑까지 쌓았다. 한국 프로야구 200승 투수는 여전히 송진우뿐. 150승을 넘긴 투수도 아직까지 송진우와 정민철밖에 없다. 해태 이강철은 1996년 역대 7호이자 잠수함 투수로는 최초로 100승 투수가 됐다. LG 김용수는 1998년에 역대 10호 100승 투수로 이름을 올린 뒤 이듬해 200세이브까지 돌파했다. 사상 첫 ‘100승-200세이브’ 투수다. 이 기록은 김용수와 KIA 임창용만 보유하고 있다.
#왼손 100승 투수가 적은 이유
100승 투수들 가운데 오른손 투수의 비율은 압도적이다. 27명 중 23명(약 85.1%, 사이드암 2명 포함)이 모두 오른손으로 공을 던진다. 반면 왼손 투수는 네 명이 전부다. 김광현과 장원준이 최근 100승을 동시 달성하면서 한꺼번에 두 명이 늘었을 뿐, 이전까지는 25명 가운데 2명으로 더 적었다.
전 세계적으로 왼손잡이 비율은 10% 안팎이라고 하지만, 야구계에는 다른 분야에 비해 왼손잡이가 많다. 실제로 올해 KBO에 등록된 투수 305명 가운데 79명(25.9%)이 왼손 투수다. 아예 어릴 때 야구를 시작하면서 ‘후천적 왼손잡이’로 길러지는 투수도 많다. LA 다저스 류현진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런데도 왜 왼손 100승 투수는 턱없이 적을까.
왼손 1호 100승 투수인 송진우 KBSN스포츠 해설위원은 “감독이나 투수코치들이 왼손 투수들을 선발보다 불펜의 원포인트나 롱릴리프로 기용하는 일이 많았다. 선발로 꾸준히 던질 수 있는 여건이 잘 안 됐다”며 “특히 좋은 왼손 투수들은 선발로 던지다가도 마무리로 투입되는 보직 이동이 잦았다. 예전에 같은 팀에서 뛰었던 구대성이나 지금 LG의 봉중근 같은 투수들이 그렇다”고 말한다.
실제로 구대성(67승 214세이브)은 물론 이상훈(71승 98세이브), 조규제(54승 153세이브) 같은 정상급 왼손 투수들은 선발과 마무리에서 모두 활약하느라 100승 달성 기회를 놓쳤다. 성준(97승), 김정수(92승), 주형광(87승)도 상대적으로 일찍 불펜으로 돌아선 선수들이다. 송 위원은 “나도 한때 마무리 투수를 경험했고, 지금도 불펜에서 뛰고 있는 좋은 왼손 투수들이 많다. 삼성 장원삼, 김광현, 장원준은 실력도 뒷받침된 데다 그동안 마무리 차출 없이 선발로 계속 뛰었기 때문에 100승이 가능했다고 본다”고 했다.
역대 오른손 최다승 투수인 정민철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도 “과거에는 지금처럼 왼손 타자가 많지 않아서 오른손 투수가 주로 선발 역할을 맡았다”고 분석하면서 “지금처럼 투수들의 구종도 다양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좌투수들은 대개 우타자 몸쪽으로만 승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진우 선배는 우타자 바깥쪽으로 승부하는 서클체인지업을 던져서 좌완인데도 선발투수로 롱런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송진우를 제외한 좌완 100승 투수들은 모두 2010년 이후에 나왔다. 장원준(2004년), 장원삼(2006년), 김광현(2007년)은 모두 2000년대 중반 이후 프로에 데뷔했다. 정 위원은 “좌타자들이 점점 늘고 투수들이 던지는 구종도 많아져서 점점 왼손 선발 투수들의 경쟁력이 커지고 있다. 앞으로는 왼손 100승 투수도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점쳤다.
복병은 바다 건너에 있다. KBO리그를 주름잡는 왼손 투수들은 이제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탐내는 대상이다. 류현진은 한화에서 7시즌 동안 통산 98승을 쌓아 올렸지만, 100승을 눈앞에 둔 채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좌완 100승 다음 순번이 유력한 KIA 양현종(77승)도 올 시즌을 끝으로 FA 자격을 얻는다. 해외로 진출할 가능성도 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선데이 나이트 제도 때문에…’ 김광현 장원준 100승 비하인드 스토리 지난 4월 24일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의미 있는 날이다. 100승 투수 두 명이 최초로 동시 탄생했다. 게다가 둘 다 그동안 희귀했던 좌완 100승 투수. SK 김광현이 좌완 3호, 두산 장원준이 좌완 4호가 됐다. 그렇다면 같은 날 등판한 둘의 순서는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그 명암을 가른 게 바로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이다. 사연이 있다. 김광현과 장원준은 그 경기 전까지 나란히 프로 통산 99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4월 19일에도 두 투수가 나란히 마운드에 올랐지만, 그날 희비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먼저 99승을 따냈던 김광현은 인천 넥센전에서 6이닝 8피안타(1홈런) 2실점을 기록하고도 패전을 안은 반면, 장원준은 수원 kt전에서 똑같이 6이닝 8피안타(1홈런)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99승으로 어깨를 나란히했다. 이때부터 KBO의 고민이 시작됐다. 두 투수가 100승을 같은 날 달성하면 과연 누구의 100승을 먼저 인정해야 하느냐라는 문제가 있어서다. 경기가 공평하게 똑같은 시간에 시작한다면 오히려 결정이 쉽다. 승리투수 기록은 경기 종료 후에 확정이 되니, 둘 중 먼저 경기를 끝낸 투수에게 3호 기록을 주면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김광현과 장원준이 등판하는 경기 시작 시간이 달랐다. 김광현은 문학 NC전에서 오후 2시에 마운드에 올랐지만, 장원준이 등판하는 잠실 한화전은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 경기라 오후 5시에 플레이볼 됐다. 이렇게 되면 경기 일정 때문에 먼저 100승을 달성할 기회를 놓친 장원준 입장에서는 조금은 억울할 수도 있다. 송진우와 장원삼의 뒤를 잇는 좌완 3호 100승 투수 타이틀을 어느 투수에게 줘야 할지, KBO도 고민에 빠졌다. 결국 ‘기록 달성 시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KBO 관계자는 “올림픽 같은 대회도 미리 잡힌 경기 일정에 관계없이 금메달이 나온 시간에 따라 한국 선수 1호, 2호 금메달을 결정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합리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김광현과 장원준의 기록 달성 순서는 그렇게 순리대로 결정됐다. 물론 둘에게는 100승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한 기록이다. 입단 직후부터 전국구 인기를 누렸던 슈퍼 에이스였지만 도중에 부상으로 인한 굴곡을 겪어야 했던 김광현, 그리고 출발은 덜 화려했지만 지난해까지 6년 연속 꼬박 두 자릿수 승리를 올리며 꾸준하게 활약해온 장원준. 둘의 100승에는 서로 다른 의미의 가치가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