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한 친박계 중진 의원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짐을 정리하며 최근 돌아가는 당 사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그는 “다들 답을 아는데 아무도 그 답을 적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로 유승민 무소속 당선자(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얘기를 꺼냈다.
원내대표 경선을 둘러싼 친박계 내부의 자중지란, 친박 후보와 비박 후보 간 연출될지도 모를 계파 대결 등등을 언급하며 “지금 우리 당이 이럴 때냐”며 혀를 쯧쯧 차더니 대뜸 “유승민 의원 같은 양반이 지금 당에 있었으면 이렇게 시끄럽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이 당 자산인 줄 알면서 저쪽(청와대) 눈치 보느라 아무도 돌아오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대나무 숲에서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떠들 줄 알아야 한다. 나아가서 누구 하나쯤은 무소속 의원들의 복당 이야기를 해야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유승민 무소속 의원의 복당 문제를 놓고 여권이 뒤숭숭한 모습이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수평적인 당청관계로 가자” “박근혜 대통령은 더는 사당(私黨)화 말라” “토론이 있는 의원총회를 활성화하자” “상명하복이 아닌 하의상달식으로 의제를 설정하자”는 등의 언론 인터뷰가 그것이다. 일각에선 공식적인 ‘워딩’이 그렇지 의원들끼리의 대화에선 청와대와 친박계 비토론이 거친 표현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쇄신파로 분류되는 한 3선 의원은 “다들 건강한 보수,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를 외치면서도 아직 유승민이란 이름을 거론하진 않는다. 하지만 유 의원이 복당을 신청했고 지금은 지역구에서 칩거 아닌 칩거로 정중동하고 있으니 당내에서도 그의 복당이 뜨거운 감자로 공론화될 것”이라고 점쳤다. 그러면서 “원내대표 경선까지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이면 일부 의원들과 의견을 모아 그의 복당을 공개적으로 거론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일단 유 의원 복귀 분위기는 소위 유승민계로 분류되는 전·현직 의원들이 불을 지피고 있긴 하다. 유 의원과는 ‘정치적 형제’로까지 거론된 조해진 의원(20대 총선서 낙천)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유 의원의 보수개혁 노선과 중도 개혁적 지향성이 우리 당의 활로다. 다음 대선에 기대와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노선인 것이 분명하다”며 “유 의원이 (정권재창출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크며 나도 힘을 보탤 것”이라고 밝혔다.
3선 의원이 되는 이혜훈 당선자는 “유 의원은 사실상 현재로서 여권에서 가장 강력한 대선주자 카드이며 이번 총선은 유 의원이 차기 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유 의원의 복당을 기정사실화하는 것도 모자라 새누리당의 차기 주자군으로 분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계파색이 옅은 심재철 의원은 “유승민·윤상현 의원은 나중에 복당시키더라도 5+2 단계적 복당이 필요하다.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해 무소속으로 생환한 이들 중 안상수, 주호영, 이철규, 장제원, 강길부 의원부터 복당시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했다. 순서만 다를 뿐이지 유 의원의 복당도 요구한 셈이다.
친박계 한 소식통은 “총선에서 패한 것은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에 원내1당 자리를 내준 것으로 우리는 자숙해야 할 처지다. 게다가 친박에서는 작금의 사태를 해결할 인물이 없기도 하다”며 “친박 안에서도 유 의원 복귀를 꺼내는 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귀띔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식통의 이야기가 있은 하루 뒤 친박계 핵심으로 손꼽히는 유기준 의원이 원내대표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유 의원의 복당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간 친박계는 공식선거운동 기간 “무소속을 찍는 것은 야당을 찍는 것과 같다(최경환)”는 논리로 복당불가론을 줄기차게 설파해 왔지만 그와 정면으로 반대되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이다. 유기준 의원은 4월 28일 유승민·윤상현 의원 등 탈당파들의 복당 문제에 대해 “국민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복당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당의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친박계와 당 안팎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다. 지난 18대 국회에서 지식경제부 장관, 19대 국회에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까지 지낸 친박계 실세 최 의원을 향해 “너만 잘나가냐”는 친박계 내부의 불만이 터졌다는 얘기다.
유기준 의원은 최 의원이 자신의 원내대표 출마를 말리며 “친박계 단일후보가 아니다”라고 하자 곧바로 “최 의원의 충정을 이해하지만 지금은 계파 이야기를 하지 않고 새누리당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며 마이웨이를 선언, 일격을 가했다. ‘탈계파’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친박계 내부에서는 최 의원 자신이 차기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 원내대표에 친박계가 출전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을 보내고도 있다.
이를 두고 여권 한 관계자는 “불과 며칠 전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에 대해 언급하며 유승민 의원을 새삼 비토했음에도 친박계의 이탈 움직임이 시작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친박계로 분류되는 정진석 당선자(4선)도 “무소속 의원의 복당은 새누리당 당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청와대 입장과는 다른 사안 아니냐”며 “박 대통령이 (유승민) 복당 불가 방침을 밝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친박 일각에선 유기준 의원이나 정진석 당선자를 향해 ‘이쯤 되면 항명’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앞서 박 대통령은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과의 간담회(4월 26일)에서 ‘배신의 정치 심판’ 발언에 대해 “자기 정치를 한다고 대통령을 더 힘들게 만들고 하나도 도와주지 않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평소의 비애와 허탈감 같은 것을 전반적으로 얘기한 것”이라고 재차 유승민 의원을 겨눈 바 있다.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유 의원은 새누리당 대구시당에 복당 신청서를 낸 뒤 대구 자신의 지역구에서 당선 인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상경하더라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눈에 띄는 약속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각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복당을 기다리는 이 시점에서 지금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정중히 사절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정치인들과의 회동도 일절 삼가고 있다고 한다.
대구 정가에서는 “박 대통령이 저렇게 싫어하는데도 왜 굳이 새누리당으로 돌아가려 하느냐”는 지역구민들의 질문에 유 의원이 “2000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시작해 16년이나 지켰던 바로 내 집”이라고 애정을 피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