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카페에서, 혹은 야외에서…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곳에서 자유롭게 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이라면 아마 한번쯤 이런 바람을 가져봤을 것이다.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있기보다는 근무 장소를 유연하게 바꿔가면서 일하면 왠지 능률도 더 오를 것 같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근무 시간을 쪼개서 사용하거나, 때로는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이런 혁신적인 근무 형태가 최근 독일 기업들 사이에서 실험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화제다.
16년 동안 다임러그룹에서 일하고 있는 아네트 라크루아. 그는 일주일에 하루, 재택근무를 하면서 두 자녀를 돌본다. 사진출처=슈테른
‘다임러 그룹’의 인사부에 근무하고 있는 죄렌 푸쉬(30)는 종종 카페에 앉아 사무를 보거나 혹은 집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이렇게 밖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선랜과 스마트폰, 그리고 클라우드 덕분이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그는 어느 곳에서든 동료 직원들과 사내망을 통해 연결할 수 있다.
<슈테른>과의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그는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안 부엌의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이용해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 에스프레소를 마시거나 잠시 일을 중단하고 피트니스 어플을 켠 후 한 시간 동안 운동을 하기도 했다. 운동 후에는 다시 1인용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을 펴고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이런 근무 형태에 대해 “매우 편안하다”고 말했다.
사실 근무 환경만 놓고 본다면 등받이가 편한 사무용 의자와 높낮이가 조절되는 책상, 그리고 환한 조명 등 모든 것이 갖춰진 사무실이 일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더 적합하다. 하지만 푸쉬는 회사가 직원들을 위해 제공하는 이런 편의성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사무실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일을 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사실 푸쉬가 이처럼 자기의사에 따라 자유롭고 유연한 근무를 할 수 있는 것은 ‘다임러 그룹’의 프로젝트 덕분이다. 1년여 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독일 기업들 사이에서는 유례 없는 것이었다. 직원들의 근무 형태를 대대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시작된 이 프로젝트의 처음 시작은 미래의 직장에 관한 온라인 설문조사였다. 3만 3400명의 직원들이 설문조사에 참여했으며, 질문은 모두 130개 문항으로 이뤄져 있었다. 참가자들은 ‘당신은 어떻게 일하고 싶습니까? ‘어떻게 일과 인생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화가 납니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와 같은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적어 제출했다.
그리고 직원들의 희망사항이 적힌 쪽지를 전달받은 디터 제체 다임러 그룹 회장은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여러분의 의견을 잘 들었습니다. 이 의견들을 바탕으로 회사를 더욱 좋은 곳으로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제체 회장은 앞으로 기존의 서열 구조나 회의 문화, 성과 평가제 등을 재검토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런 약속은 전통적으로 권위적이고 서열 구조가 강한 독일 기업에 있어서는 하나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다임러 그룹’의 이번 프로젝트는 노동경제를 연구하는 ‘프라우엔호퍼 연구소’와의 협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독일 금속노조 역시 이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노조위원장인 외르크 호프만은 “다임러 그룹의 프로젝트는 디지털 직장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일 ‘다임러 그룹’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다른 기업들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양성관리부의 부장인 우르술라 슈바르첸바르트의 말을 들어보자. 현재 ‘다임러 그룹’에는 150개국 출신의 다양한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이 저마다 회사에 바라는 바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공통된 희망사항은 갖고 있다. 모두들 9시~5시 근무 시간을 원하지 초과근무는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설문조사에 참여한 80%의 직원들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옮겨다니면서 일하길 원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대졸 사원이건 싱글맘 직원이건 또는 55세 팀장이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또한 시간도 자유롭게 쪼개서 사용하길 바랐다. 슈바르첸바르트는 “오전에는 세무서에 들러 볼일을 보고, 늦은 오후부터 출근해 일을 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야근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유연한 근무 형태에 대한 ‘다임러 그룹’ 직원들의 이런 갈망은 비단 ‘다임러 그룹’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베를린 소재 독일경제연구소(DIW)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근로자들 대다수는 집에서 일하길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경제연구소의 베르너 아이히호르스트는 노동의 미래에 대해 “유연한 근무 형태는 향후 5~10년 동안 독일 경제의 핵심 테마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기업들이 실제 이런 유연한 근무 형태를 지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경제연구소의 카를 브렌케는 “직원들 가운데 12%만이 간간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론적으로는 40%의 경우가 가능한데도 말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재택근무가 가능한 경우에도 거의 대부분은 반드시 상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실 모든 종류의 직업이 유연한 근무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독일 전국에서 17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다임러 그룹’ 역시 마찬가지다.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근무하는 생산직 근로자들의 경우에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관리직 및 개발직 근로자들에 비해 자유로운 근무가 어렵다. 따라서 이런 새로운 근무 형태는 사무직 직원들에게 더 적합한 것이다.
이와 관련, <슈테른>은 앞으로 근무 형태의 자유로운 정도가 직종을 분리시킬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를테면 디지털시대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출퇴근 시간에 얽매이게 되는 반면, 화이트칼라들은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16년 동안 ‘다임러 그룹’에서 일하고 있는 아네트 라크루아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녀의 사무실은 슈투트가르트 시내에 있지만 그녀의 집은 사무실로부터 100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교통정체가 심하지 않을 경우 출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가량이다. 현재 그녀는 비록 중책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하루는 일찍 퇴근해 재택근무를 한다. 이런 날은 오후 내내 집에서 두 자녀를 돌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저녁 8시부터 노트북을 켜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업무를 시작한다.
라크루아는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재택근무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회사에 요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요즘에는 직원 면접을 볼 때 응시자들이 나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혹시 일찍 퇴근하는 것도 가능한가요?’라고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1980년 이후 출생한 ‘Y세대’ 혹은 ‘Z세대’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자의식도 뚜렷한 경우가 많다. 때문에 직장을 구할 때도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이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율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회사로부터의 ‘독립성’은 값비싼 자동차보다도 더 중요한 새로운 신분의 상징이 됐다. 즉, 얼마나 자유롭게 근무할 수 있는지가 개인의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된 것이다. 스마트폰, 노트북, 클라우드 등 첨단기술과의 조화를 통해 이런 ‘자율성’에 대한 욕구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런 변화를 증명하듯 현재 ‘다임러 그룹’의 직원들 책상 위에서 데스크톱 컴퓨터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됐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으며, 세계 어디서든 무선랜을 통해 사내망에 접속하고 있다. 앞으로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이런 식의 근무를 하게 될 것이며, 이는 프로젝트의 일부인 ‘Always on’의 방침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슈테른>은 지적했다. 과연 근무 장소의 틀을 깬 이런 근무 형태가 고용인과 피고용인 모두에게 윈윈인 걸까? 아니면 결국에는 ‘번아웃 증후군(극도의 피로감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기력함, 자기 혐오 등에 빠지게 되는 증상)’에 시달리는 ‘퇴근이 없는 삶’이 될까?
유연한 근무 형태의 장점이라고 하면 앞서 살펴 보았듯이 출퇴근에 드는 비용 및 시간 절약과 함께 업무 집중력이 높아진다는 점 등이 있다. 하지만 ‘프라우엔호퍼 연구소’의 조세핀 호프만은 “이런 장점들은 개인생활과 직장생활 사이의 경계가 뚜렷이 구분된 경우에만 유효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장과 쉼터의 구분이 없다면 결국 부작용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실제 많은 상사들이 염려하는 것과 달리 재택근무를 신청한 직원들은 나태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령 아침식사를 먹으면서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거나, 점심식사를 준비하면서 상사와 통화를 하거나, 저녁에는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대신 이메일을 확인하는 식이다. 이는 상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자 자신의 능력을 상사에게 증명해보이기 위한 행동들이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모든 직원들이 이런 유연한 근무 형태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회사에서 벗어나 근무를 할 경우 자유를 얻는 대신 노동법에 기반한 법적 보호는 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스트레스가 쌓여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 경우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며, 지금까지 기업이 부담했던 이런 위험을 본인이 짊어져야 한다. 때문에 자유로운 근무 형태를 모든 직원들에게 일괄적으로 강요해선 안 된다고 <슈테른>은 말했다.
자유로운 근무를 허용할 경우 불거지는 또 다른 문제는 직원들에 대한 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 모든 직원들이 매일 여덟 시간씩 사무실에 앉아있지 않을 경우 어떻게 직원들을 관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 인사부장인 포스는 “앞으로는 성과를 내는 데 걸린 시간보다 성과 자체를 평가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임러 그룹’은 새로운 직원관리 파라미터를 개발할 예정이며, 앞으로 직원들에게 개별적인 목표를 부과하는 식의 업무 방식을 도입할 예정이다. 가령 팀장이 개개의 직원들에게 목표를 지정해 주되, 이 목표는 짧은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조정될 것이다. 이는 팀장급과 경영자들에게는 ‘경영 및 관리 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직원들에게는 ‘작은 실수도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다임러 그룹’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133개 작업장의 임원, 직원, 노조가 함께 설문조사의 결과를 시스템화한 후 분석을 마쳤고, 이에 따라 직원들의 권리와 의무를 분리했다. 앞으로 직원들은 ‘스타즈포유’ 프로젝트에 따라 매년 연말 지급되는 현금성 보너스 대신 다른 종류의 보너스를 신청할 수 있다. 가령 ‘벤츠 G 클래스’를 타고 포뮬러 1 자동차경주 트랙을 달리는 기회 같은 것이 그것이다.
또한 사내 문화도 다방면에서 변화할 것이다. 각 부서의 직원들은 휴게소의 소파와 테이블을 직접 고를 수 있으며, 복장도 간편해지고, 직원들 간에 존칭도 생략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들 가운데 무엇보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직원들이 늘 사무실에 앉아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슈테른>은 말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