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당선인들이 국회 의원회관 방 배정을 놓고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국회 의원회관 전경.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의원들 세계에서 기운이 센 방이 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
4월 27일 만난 새누리당의 한 보좌관은 이같이 말했다. 그는 “그 기운을 받으려고 다선의원들이 근무했던 방을 서로 차지하려고 난리”라며 “국회의장을 배출한 방은 의장 방, 국무총리가 나온 방은 총리 방 이런 식으로 소문이 난다. 옛날엔 풍수지리사들이 회관에 찾아와 의원실과 책상 위치도 봐줬다. 같은 값이면 그런 방으로 가지 않겠나”고 말했다.
제20대 국회의원들의 임기 시작일은 5월 30일. 각 당의 원내 행정실은 그날 이전까지 의원 300명의 방 배치를 마쳐야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방들 중 최고의 방은 어디일까. 앞서의 보좌관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545호의 주인이었다. 대통령 기운 탓인지 이완영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살아남았다. 이 의원은 초선 때 575호를 썼지만 545호로 이사했다. 정보 싸움에서 이겨 일부러 옮겼다. 초선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우왕좌왕했지만 중간에 손을 써서 방 배정에 신경을 썼다. 그 방은 확실히 대통령의 정기가 있다. 이쪽 사람들은 다 안다. 실제로 545호 주변은 쑥대밭이 됐다. (545호는) 대통령의 은덕이 흐르는 방이다.”
쉽사리 믿기 힘든 풍문이지만 뜻밖의 정황증거들은 속속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의 정기(?)가 흐른 탓일까. 실제로 이 의원의 오른쪽 옆방(547호)을 이용했던 전하진 새누리당 의원은 제20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앞방의 권은희 새누리당 의원(546호)도 여의도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왼쪽 옆방의 황인자 의원(543호)은 경선에서 탈락했고 대각선쪽 손인춘(544호) 의원은 불출마했다. 한바탕 폭풍이 5층 의원실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오로지 이완영 의원실만 그 바람을 피했다. 국회의원 보좌진들이 방 배정에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보통 의원들이 선호하는 로열층은 7~8층이다. 이곳에선 국회 분수대와 잔디가 한눈에 보인다. 전망이 좋은 방들이 많은 층이다. 하지만 유독 이번 총선에서 낙선한 의원들이 나왔다. 이재오(818호) 황우여(848호) 최규성(707호) 의원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때문에 제20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역대 대통령의 의원실이 있는 ‘전통적 로열층’이 다시 뜨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312호)과 김대중 전 대통령(328호)이 의원 생활을 했던 3층이다. 손학규 민주통합당 전 상임고문도 의원생활 시절 회관 3층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3층의 시설관리 담당자는 “이번에 3층 동쪽 방이 많이 됐다. 한 명만 공천 탈락하고 다 됐다”며 “제 입장에선 움직이지 않아도 돼서 편하다. 낙선의원들이 많으면 그 층은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설명했다.
국회 의원회관은 지하5층, 지상 10층 규모다. 의원회관 3층부터 10층에는 300개 의원실이 있다. 더민주 원내수석실 관계자는 “국회 사무처에서 의석수에 따라 의원실의 블록을 지정해서 각 교섭단체에 준다. 우리가 교섭단체 안에서 각 의원실을 배정한다”며 “기존에 있는 분들의 의사를 일단 확인하고 옮기길 원하는 분들은 빈방으로 간다. 다선의원들이 좋은 구역을 가져간다”고 설명했다. 새누리당 원내수석실 관계자 역시 “중앙당이 원내대표와 원내수석을 정하면 방 배정을 시작한다”고 전했다.
방 배정 기준은 선수(選數)와 연령이다. 선수가 높을수록 로열층을 손에 넣기 쉽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방 배정을 담당하는 원내수석실엔 의원들의 민원이 빗발치곤 한다. 좋은 방을 위해 의원들이 로비(?)를 벌이기 때문. 또 다른 비서관은 “원내수석이 도면을 놓고 쭉쭉 넘기면서 ‘그건 안 돼’ 하면 실무진이 다시 조정하고 또 조정한다”며 “방 배정을 시작하면 의원실에선 원내수석실의 실무진 명단부터 확보한다. 그 다음 슬쩍 전화해서 ‘나 딴 거 안 바래. 잔디만 보이면 돼’라고 은근히 압박한다. 국민의당 박지원 김관영 의원실 쪽 전화에 불이 났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누리당과 더민주는 아직 원내대표와 원내수석부대표를 선출하지 않았다. 양당의 의원들은 아직 여유롭지만 국민의당 의원들은 다르다. 국민의당은 최근 박지원 의원을 신임 원내대표로 뽑았다. 박 의원은 김관영 의원을 원내수석부대표로 지명했다. 국민의당은 천정배 주승용 의원 등 유난히 다선의원들이 많다. 선수가 높기 때문에 방 배정도 유리하다. 정동영 김성식 등 중진 의원들도 돌아왔다. 치열한 방 쟁탈전이 일어날 전망이다. 김관영 의원실 관계자는 “아직 전화가 많이 오진 않았다. 우리 의원도 젊을 때 안 좋은 방을 받았는데 선수 기준이라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 뒤에 두 번이나 이사를 했다“고 말했다.
‘다선’방들 역시 인기가 높다. 여의도 호사가들은 “국회의장의 기운도 무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총선에서 6선에 성공한 문희상 더민주 의원은 꽤 오래전부터 의원회관 454호를 이용하고 있다. 454호는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사무실. 이 전 국회의장은 8선 의원으로, 역대 최다선(9선)이었던 YS와 DJ의 뒤를 잇고 있다. 문 의원의 최측근은 “대표적인 명당이 여기다. 이 방은 정치에 한 획을 그은 분들이 쓰던 방이다. 특히 이분들은 끝맺음이 좋았다. 최고의 명당 중에 하나”라며 “의원들은 다선의 기운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기운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선방 다음 순위는 실세방”이라고 말했다.
‘실세’방은 당대표나 대권주자들 방이다. 옆방을 사용할 경우 실세들과 꾸준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매년 실세들의 옆방을 차지하기 위한 눈치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현재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706호를 쓰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518호,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는 325호를 배정받았다. 문 전 의원을 제외하고 김 의원과 안 대표는 여의도 귀환에 성공했다.
익명을 요구한 보좌관은 “사실 실세들의 옆방은 모 아니면 도다. 옆방에 있으면 실세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그만큼 내 방의 움직임도 실세들에게 노출된다”며 “예를 들어, 문 전 대표 옆방에 비주류 비노가 있으면 김한길이 찾아 올 수 있겠나. 일단 이런 모습은 부자연스럽다. 초선 의원들이 잘 모르고 실세 방쪽으로 붙으려고 하는데 나중에 결국 후회들을 많이 한다”고 귀띔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